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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에 아나키즘 떡밥이 돌길래 아나키즘의 왕자로 불리우는(자기자신은 이 별명을 싫어했음) 크로포트킨에 대해 써봤음 아직 사상을 배우고 있는 로붕이라 글이 많이 부족한거 감안하고 읽으면 좋을듯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그는 바쿠닌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는 탁월한 아나키즘 이론가이자 혁명가였으며 지리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과학자였으며 동시에 프랑스 혁명사를 집필한 역사가, 윤리의 역사와 이론, 자유로운 인간의 삶과 억압었는 사회를 연구한 사회철학자였다.

크로포트킨은 1842년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남자만 해도 무려 1200명이 넘는 농노를 거느린 대지주였다. 비참하게 노동하는 농노와 그들의 노동 위에 편히 생활했던 이 모순은 그를 평생 괴롭게 만들었으며 또한 그가 아나키즘이란 사상을 일깨우게 해준 계기였다.

이후 크로포트킨은 다른 귀족 자녀들처럼 육군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졸업 후 근위장교로 일하는 대신 머나먼 시베리아로 떠났다. 귀족으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대신 스스로 힘든 일에 자진한 것이었다,

1872년, 시베리아에서의 빙하연구, 화산 연구 등을 하고 돌아온 그는 스위스로 여행할 기회를 얻는다. 그곳에서 그는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제 1인터내셔널에도 가입한다. 특히, 위도 아래도 없이 자발적으로 연합하여 각자 맡은 부분을 성실히 수행하는 시계공들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았고 이런 삶의 모습에서 상호부조론의 초석을 구상하였다. 2년 후,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혁명 단체의 회원이라는 이유로 구금되었다. 건강악화로 감옥에서 출소할 수 있었지만 40년이란 긴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크로포트킨은 이 기간 동안 시베리아 여행에서 본 동물들과 유목민들의 삶을 바탕으로 아나키즘 이론을 체계화한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동종 간의 투쟁이 적었다는 점, 인간은 여전히 집단을 이루고 서로 협력했다는 점에서 그는 상호투쟁 이외에도 상호부조란 보편적인 본능이 존재한다고 보았고 이것이 도덕과 윤리로 발전하여 사회를 이루고 결속시켜주는 힘이라 밝혔다. 이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한뿐만 아니라 개인의 무한한 자유와 권리를 주장했던 이전 아나키즘 또한 비판한 것이었다.

그는 더욱 자본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는 자본주의가 불필요한 경쟁을 조장하고 인위적인 희소를 일으켜 시장에 혼란을 일으키고 그 혼란 속에서 이윤을 챙긴다고 밝혔다. 또 노력에 비례하지 않고 더 높은 지위(작업반장이나 더욱 많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업)에 따라 차등되게 지급되는 급여제가 노동자들의 단합을 억제한다고 비판하였다.

이전 아나키스트들과 다르게 크로포트킨은 평등이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기본 전제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를 인간을 노예로 만드며 타인의 노동력 착취에 기초된 사유재산의 수호자라고 비판하였다. 국가의 대안으로 그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자치하는 단위들의 자유로운 연방, 일종의 코뮌을 제시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마침내 그는 고국으로 돌와왔다. 케렌스키가 그에게 정부 고위직을 제안했지만 크로포트킨은 그의 신념대로 \'구두닦이의 일이 더욱 유익하다\'며 거절하였다. 하지만 2월 혁명 직후 러시아이 모습은 그의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특히,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의 깃발 뒤에 사상을 악용하는 애송이 혁명가들을 목격한 이후 그는 의구심을 지녔다.

마침내 10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자유로운 주와 민족들간의 긴밀한 연방을 주장한 레닌과 소비에트의 이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낡은 체제와 싸우기 위한 일당독재가 새 사회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혁명 이후 노년인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혁명과 이상을 위해 레닌과 면담을 하고 저서를 집필하는데 그의 마지막 힘을 쏟아부었다.

1921년, 79세의 나이로 크로포트킨은 세상을 떠난다. 그의 장례식이 있는 당일,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최대의, 그리고 최후의 집회가 일어났다.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탄압당해 대부분은 시베리아로 유배되었거나 외국으로 도피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