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해방을 위해 각각 조선의용군과 소련군에 들어가서 북한으로 들어왔으나, 결국은 김일성에 의해 자신들의 터전인 중국과 소련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이후 그곳에서의 삶마저도 정말 파란만장했던 두 사람의 일생을 보니, 여러 생각이 드는 부분이 꽤 있었음.
이를 보면 20세기 역사가 얼마나 큰 격동기였고, 이를 몸소 겪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수많은 굴곡을 거치게 되었는지 정말 실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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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1916~2001)
이를 보면 20세기 역사가 얼마나 큰 격동기였고, 이를 몸소 겪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수많은 굴곡을 거치게 되었는지 정말 실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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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1916~2001)
(출처 - 경향신문, 나무위키 등)
원산 총파업 당시 원산 제2 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김학철은 "원산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배의 일본 노동자들이 일제히 기적을 울리며 조선 노동자들의 시위를 응원했다. 무장경찰들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서 당황한 반면 파업 노동자들은 난데없는 '뱃고동 응원'에 크게 고무되었다"라고 회고했다. 이런 '희한한' 광경을 목격한 탓에 그는 훗날 일본군과 교전 중 총상을 입어 한쪽 다리를 잘라내고도 "일본은 미워하되 일본인을 미워하진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인민이 굶어 죽는데 웬 우상숭배냐"는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 '20세기의 신화'로 필화 사건을 겪으며 10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의 굴곡진 삶은 '영웅 만들기', '파시즘적 분위기'에 질색이었던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가 평생 흠모한 인물이 팽덕회(펑더화이), 노신(루쉰)이었던 것에도 잘 드러난다.
중국 공산당 입당 후 당 권력을 쥔 자들의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다 보아왔고 그 자신 또한 수많은 고초와 억울함을 당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념은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다.
말년에 쓴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에서 그는 "베토벤의 작품이 후대의 서투른 지휘나 연주자의 잘못으로 불협화음을 빚어냈다고 해서 베토벤의 위대함이 의심 받아서는 안된다. 실패는 모두 위대한 당을 1인 독재의 도구로 전락시킨 데서 빚어진 것"이라고 썼다.
유머러스하면서도, 큰 원칙에서 꼬장꼬장했던 김학철은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 장개석(장제스) 교장의 초상이 새긴 영수상(領袖像)을 달고 다니면서 어쩐지 개운치 않았다고 한다.
"일찍이 이런 심상찮은 경험을 쌓았기에 훗날 중국 대륙을 들끓게 했던 '문화대혁명'의 그 무서운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코웃음칠 수 있었다. 초상 휘장을 철칙으로 꼭 더덕더덕 달고 다니는 바람이 휘몰아쳐서 모두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충성 경쟁을 벌이며 떠들어대고 미쳐 날뛸 때 나는 냉정히 이에 대처할 수 있었다."
"... 앞으로 먼 장래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고. 안될 수가 없지.
(PD : 사회주의인 중국이나 북한도... (불평등이 심각한데))
그동안에 잘못해서 그런 거야. 시행 착오야. 시행 착오를 해서. 개인 숭배를 하고 이러니까 되겠어? 이번에 20세기에 공산주의자들이 뼈아픈 대가를 치렀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대가를 치렀어?
이제 다음 세대에 가면 다시는 그런 형태가 나오지 않아. 첫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이 없어져야 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1당 독재고 1당 독재는 1인 독재야. 이건 20세기의 뼈아픈 경험이야. 그러나 다수당제 가운데서 공산당이 잘해서 정권을 쥐면 쥐는 거고, 놓치면 놓치는 거고, 이러면서 의회 투쟁, 국회에서 투쟁해 나가야지. 뭐 죽이고 하는 거는... (안 돼)."
- SBS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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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진 (1918~2013)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인민이 굶어 죽는데 웬 우상숭배냐"는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 '20세기의 신화'로 필화 사건을 겪으며 10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의 굴곡진 삶은 '영웅 만들기', '파시즘적 분위기'에 질색이었던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가 평생 흠모한 인물이 팽덕회(펑더화이), 노신(루쉰)이었던 것에도 잘 드러난다.
중국 공산당 입당 후 당 권력을 쥔 자들의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다 보아왔고 그 자신 또한 수많은 고초와 억울함을 당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념은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다.
말년에 쓴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에서 그는 "베토벤의 작품이 후대의 서투른 지휘나 연주자의 잘못으로 불협화음을 빚어냈다고 해서 베토벤의 위대함이 의심 받아서는 안된다. 실패는 모두 위대한 당을 1인 독재의 도구로 전락시킨 데서 빚어진 것"이라고 썼다.
유머러스하면서도, 큰 원칙에서 꼬장꼬장했던 김학철은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 장개석(장제스) 교장의 초상이 새긴 영수상(領袖像)을 달고 다니면서 어쩐지 개운치 않았다고 한다.
"일찍이 이런 심상찮은 경험을 쌓았기에 훗날 중국 대륙을 들끓게 했던 '문화대혁명'의 그 무서운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코웃음칠 수 있었다. 초상 휘장을 철칙으로 꼭 더덕더덕 달고 다니는 바람이 휘몰아쳐서 모두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충성 경쟁을 벌이며 떠들어대고 미쳐 날뛸 때 나는 냉정히 이에 대처할 수 있었다."
"... 앞으로 먼 장래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고. 안될 수가 없지.
(PD : 사회주의인 중국이나 북한도... (불평등이 심각한데))
그동안에 잘못해서 그런 거야. 시행 착오야. 시행 착오를 해서. 개인 숭배를 하고 이러니까 되겠어? 이번에 20세기에 공산주의자들이 뼈아픈 대가를 치렀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대가를 치렀어?
이제 다음 세대에 가면 다시는 그런 형태가 나오지 않아. 첫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이 없어져야 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1당 독재고 1당 독재는 1인 독재야. 이건 20세기의 뼈아픈 경험이야. 그러나 다수당제 가운데서 공산당이 잘해서 정권을 쥐면 쥐는 거고, 놓치면 놓치는 거고, 이러면서 의회 투쟁, 국회에서 투쟁해 나가야지. 뭐 죽이고 하는 거는... (안 돼)."
- SBS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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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진 (1918~2013)
(출처 - 월간조선(여기만큼 자세한 인터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인용했는데 양해해주시면 감사))
이들(고려인)은 가난하고 고된 현실 속에서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사회주의 이상향'과 '해방된 조선'에 대한 꿈에...
1937년은 그 꿈이 박살난 해였다. 그해 8월부터 소련 NKVD(내무인민위원부·KGB의 전신)는 연해주 조선인 인텔리들을 무차별 체포, 처형하기 시작했다.(대숙청) 한 달 뒤에 시작될 강제이주의 사전 포석이었다. 소련작가동맹의 유일한 조선인 문학가이면서 소련 국적 취득을 한사코 거부했던 소설가 조명희도, 어린 정상진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워줬던 아버지 정치문도 체포돼 총살당했다. 조선인 인텔리 2800여 명이 재판 없이 처형됐다.
이들(고려인)은 가난하고 고된 현실 속에서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사회주의 이상향'과 '해방된 조선'에 대한 꿈에...
1937년은 그 꿈이 박살난 해였다. 그해 8월부터 소련 NKVD(내무인민위원부·KGB의 전신)는 연해주 조선인 인텔리들을 무차별 체포, 처형하기 시작했다.(대숙청) 한 달 뒤에 시작될 강제이주의 사전 포석이었다. 소련작가동맹의 유일한 조선인 문학가이면서 소련 국적 취득을 한사코 거부했던 소설가 조명희도, 어린 정상진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워줬던 아버지 정치문도 체포돼 총살당했다. 조선인 인텔리 2800여 명이 재판 없이 처형됐다.
그가 아버지의 처형 사실을 확인한 것은 1955년 북한에 있을 때였다. 부친의 묘소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NKVD가 처형자들을 한꺼번에 묻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정상진은 아버지의 처형과 강제이주를 겪으면서, 공산주의에 대해 품었던 열정이 식었다.
"아버지가 처형되기 전까지 저는 공산주의를 무한히 믿었습니다. 하지만 강제이주와 학살을 보면서 '이런 건 공산주의라고 할 수 없다. 소련은 언젠가 망할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 인텔리들을 총살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 꿈도 총살해 버린 것입니다.
레닌은 소련 내 소수민족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민족 간 화합을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스탈린은 민족들을 이간시키고, 탄압하고, 학살했습니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련은 1991년에 망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소수민족 강제이주를 감행했던 1937년에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1991년 '레닌기치'는 '고려일보'로 제호를 바꾸었다. 그는 '레닌기치'라는 제호로 신문이 나오는 마지막 호인 1990년 12월19일자 '레닌기치'에 "'레닌기치' 독자들과의 작별"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소련 제국이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려인 강제이주 때 이미 '소련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저는 소련 연방의 붕괴까지는 원치 않았습니다. 소련이 자유롭고 민주화된 나라가 되고 그 나라에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카자흐스탄이 독립된 후 카자흐인들이 어깨를 펴고 다니는 것을 보니, '역시 독립이란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선생님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그는 지긋이 눈을 감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긋이 눈을 감더니 이렇게 말했다.
"역시 청진 전투였습니다. 그때를 제외하면, 나는 남을 위해 내세울 만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타락하기 마련이다
김학철 저 사람의 말이 가슴에 와닿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