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무기로서의 기본소득 - John Clarke - 번역: 김찬휘(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올해 4월에 캐나다 온타리오 주정부는 기본소득에 대한 매우 제한적이고 약간은 미심쩍은 시도의 효과를 연구하게 될 파일럿 실험의 자세한 계획을 발표할 계획이다. 핀란드나 네덜란드의 유사한 실험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지급에 준하는 어떤 것도 계획되어 있지 않다. 그 대신 극빈자를 표본 추출하여 현존하는 소득 지원 제도보다는 관료주의적 단서조항이 적은, 아주 작은 수당을 지급할 것이다.
이 실험들이 정말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실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미치게 될 조치의 효과인데, 특히 “노동시장 참여”(속뜻은 ‘저임금 취업을 받아들일 의사’를 의미함)가 어느 정도로 향상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이건 기본소득제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기본소득제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것을 대규모로 도입할 때의 효과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실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생길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덜 간섭하면서 지급액을 늘리게 되면, 그들의 삶이 어느 정도 더 풍족해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진정한 이슈는 정치적 공동체 전역에 걸쳐서는 어떤 종류의 기본소득을 시행해야 할 것인지, 그러한 조치가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에 관해서이다.
기본소득제가 어떤 것이 될 것인지에 대해 아주 다양한 생각들이 있다. 자유시장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자신들만의 시각이 있다. 미국의 우익 정치학자 Charles Murray는 보잘 것 없는 액수의 보편적 지급을 지지하면서 이것으로 여타 사회보장지급(social provision)를 완전히 대체해야 한다고 격렬하게 강조한다. liberal에서 radical에 이르는 좌파 진보적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작은 규모의 재분배 모델로부터 근본적인 이행에 이르는 모델로 맞받아치고 있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강제하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박탈할 수 있을 정도의 보편적이고 충분한 지급을 꿈꾼다. 이 모든 계획들의 문제점은, 정말로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들이 이행될 수 있는 현실적 실제적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사회적 정책의 착수를 통하여 공정성과 사회적 정의를 도입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을 뿐이다.
삶을 개선하고 빈곤을 감소시킬 기본소득의 전망에 대해서 고려하기 이전에, 현존하는 소득지원 시스템을 형성해 온 여러 요소들을 점검해야 한다. 그 뿌리로 돌아가 영국 구빈법을 생각해 보면, 1500년대에 토지로부터 쫓겨나 새로 생겨난 노동 시장으로 강제 편입된 농민이 보인다. 과잉 공급된 노동력은 그 시대 고용주들의 이익에 부합하였지만, 실업자들을 완전히 방기한 결과 위험한 수준의 사회적 소요가 일어나게 되었다. 국가가 생각해 낸 해결책은,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게는 하지만 액수가 불충분해서 계속 저임금 노동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지급 시스템이었다. 현대의 복지/사회부조 시스템은 이런 접근법을 가지고 계속되어 왔으며, 보잘것없는 지급액과 수혜자의 삶에 대한 관료적 간섭이 특징이다.
신자유주의적 아젠다가 뿌리를 내리고 강화됨에 따라, 고용주들이 저임금을 추구하고 착취율을 높임에 따라, 복지 국가의 요소가 자리 잡고 있던 모든 나라에서 소득지원 시스템의 체계적인 질적 저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최악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려는 쟁탈전이 벌어지고, 저임금과 불안정 고용이 폭발하였다. 신자유주의의 건축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사태는 대단히 성공적이고 수익성 높은 전략이었다. 하지만 진보적인 기본소득의 주창자들은, 모든 것을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보이도록 하는 하나의 사회 정책을 채택하도록 정부를 설득하는 것만으로 이 모든 것들을 묻어버릴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권력자들이 무슨 이유로 수십 년간 거둬들이던 이익을 포기하고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소득을 제공하며 노동자의 구매력을 대량으로 증진시킨다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노동조합과 운동이 신자유주의 공세에 허약해진 상황에서, 어떻게 고용주와 국가를 강제하여 그러한 광범위한 양보를 하도록 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인지 그 방법을 묻지 않는다.
그러한 이슈를 거론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은 위에서 언급한 우익 판 기본소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다보스 포럼에 모인 착취자들과 그 조력자들이 기본소득 정책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이 엄청난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진보로 치장된 현관에 환영의 Welcome 매트가 깔려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전혀 다른 기본소득 브랜드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임금 부문으로 흘러들어오는 노동자의 흐름을 결코 방해하지 않으면서 미미한 액수를, 그것도 조금씩 적게 지급할 수 있다. 더구나 빈곤한 노동자에게까지 지급을 확대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고용주를 위한 임금 보조금이 되게 된다. 생활임금을 위한 투쟁은 이제 약화되었다. 가장 착취가 심한 고용주들도 자기에게 고용된 노동자들이 세수로부터 보조금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임금 인상의 압박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정부는 훨씬 낮아진 최저임금까지도 동결할 수 있고, 임금의 전반적 인하가 시작된다.
신자유주의적 기본소득이 초과착취의 바퀴에 기름칠을 하고 있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아젠다의 또 하나의 핵심 요소인 민영화(사유화)가 용이해진다. 기본소득은 자유시장 옹호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왔듯이 다른 종류의 사회보장지급을 대신하여 지급되게 된다. 공공 의료, 공공 주택, 그 외의 많은 것들이 파괴되고, 기본소득은 그 수령자를 사회 인프라가 민영화된 잔해더미 속에서 쇼핑하는 “소비자들”로 변형시켜 버린다. 충분하고 다른 영역에서의 위축을 가져오지 않는 기본소득 모델을 종이 위에서 디자인하는 일은 당연히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작금의 경제/정치적 아젠다와 현재의 사회적 세력균형을 감안할 때 어느 쪽이 더 일어나기 쉬운가 하는 것이다.
다보스에 모인 사람들을 신뢰하고 “그 1%”가 사회정의의 취미에 맛들일 것이라 기대하는 것보다, 이미 얻은 것을 수호하고 공공서비스의 이용과 확장을 위해 싸우는 사회 운동/투쟁을 만들어 내는 것이 훨씬 훌륭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부가 긴축을 포기하는 사회정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보다, 모두에게 자격을 주며 충분히 지급하는, 그리고 더 이상 관료적 간섭과 도덕적 감시에 의존하지 않는 소득지원 시스템을 얻기 위해 압박하는 것이 훨씬 훌륭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기본소득은 사회보장지급의 상품화로 가는 그릇된 희망이며 경로이다. 그것은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 있지만 신자유주의 질서를 디자인하고 작동시킨 사람들이 정말로 좋아하는 종착지에 닿을 것이다.
- John Clarke는 오래된 반빈곤 운동가, 커뮤니티 조직자로서, 토론토의 ‘빈곤에 맞서는 온타리오 연대’(OCAP)의 주도적 성원이다.
올해 4월에 캐나다 온타리오 주정부는 기본소득에 대한 매우 제한적이고 약간은 미심쩍은 시도의 효과를 연구하게 될 파일럿 실험의 자세한 계획을 발표할 계획이다. 핀란드나 네덜란드의 유사한 실험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지급에 준하는 어떤 것도 계획되어 있지 않다. 그 대신 극빈자를 표본 추출하여 현존하는 소득 지원 제도보다는 관료주의적 단서조항이 적은, 아주 작은 수당을 지급할 것이다.
이 실험들이 정말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실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미치게 될 조치의 효과인데, 특히 “노동시장 참여”(속뜻은 ‘저임금 취업을 받아들일 의사’를 의미함)가 어느 정도로 향상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이건 기본소득제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기본소득제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것을 대규모로 도입할 때의 효과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실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생길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덜 간섭하면서 지급액을 늘리게 되면, 그들의 삶이 어느 정도 더 풍족해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진정한 이슈는 정치적 공동체 전역에 걸쳐서는 어떤 종류의 기본소득을 시행해야 할 것인지, 그러한 조치가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에 관해서이다.
기본소득제가 어떤 것이 될 것인지에 대해 아주 다양한 생각들이 있다. 자유시장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자신들만의 시각이 있다. 미국의 우익 정치학자 Charles Murray는 보잘 것 없는 액수의 보편적 지급을 지지하면서 이것으로 여타 사회보장지급(social provision)를 완전히 대체해야 한다고 격렬하게 강조한다. liberal에서 radical에 이르는 좌파 진보적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작은 규모의 재분배 모델로부터 근본적인 이행에 이르는 모델로 맞받아치고 있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강제하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박탈할 수 있을 정도의 보편적이고 충분한 지급을 꿈꾼다. 이 모든 계획들의 문제점은, 정말로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들이 이행될 수 있는 현실적 실제적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사회적 정책의 착수를 통하여 공정성과 사회적 정의를 도입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을 뿐이다.
삶을 개선하고 빈곤을 감소시킬 기본소득의 전망에 대해서 고려하기 이전에, 현존하는 소득지원 시스템을 형성해 온 여러 요소들을 점검해야 한다. 그 뿌리로 돌아가 영국 구빈법을 생각해 보면, 1500년대에 토지로부터 쫓겨나 새로 생겨난 노동 시장으로 강제 편입된 농민이 보인다. 과잉 공급된 노동력은 그 시대 고용주들의 이익에 부합하였지만, 실업자들을 완전히 방기한 결과 위험한 수준의 사회적 소요가 일어나게 되었다. 국가가 생각해 낸 해결책은,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게는 하지만 액수가 불충분해서 계속 저임금 노동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지급 시스템이었다. 현대의 복지/사회부조 시스템은 이런 접근법을 가지고 계속되어 왔으며, 보잘것없는 지급액과 수혜자의 삶에 대한 관료적 간섭이 특징이다.
신자유주의적 아젠다가 뿌리를 내리고 강화됨에 따라, 고용주들이 저임금을 추구하고 착취율을 높임에 따라, 복지 국가의 요소가 자리 잡고 있던 모든 나라에서 소득지원 시스템의 체계적인 질적 저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최악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려는 쟁탈전이 벌어지고, 저임금과 불안정 고용이 폭발하였다. 신자유주의의 건축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사태는 대단히 성공적이고 수익성 높은 전략이었다. 하지만 진보적인 기본소득의 주창자들은, 모든 것을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보이도록 하는 하나의 사회 정책을 채택하도록 정부를 설득하는 것만으로 이 모든 것들을 묻어버릴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권력자들이 무슨 이유로 수십 년간 거둬들이던 이익을 포기하고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소득을 제공하며 노동자의 구매력을 대량으로 증진시킨다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노동조합과 운동이 신자유주의 공세에 허약해진 상황에서, 어떻게 고용주와 국가를 강제하여 그러한 광범위한 양보를 하도록 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인지 그 방법을 묻지 않는다.
그러한 이슈를 거론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은 위에서 언급한 우익 판 기본소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다보스 포럼에 모인 착취자들과 그 조력자들이 기본소득 정책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이 엄청난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진보로 치장된 현관에 환영의 Welcome 매트가 깔려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전혀 다른 기본소득 브랜드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임금 부문으로 흘러들어오는 노동자의 흐름을 결코 방해하지 않으면서 미미한 액수를, 그것도 조금씩 적게 지급할 수 있다. 더구나 빈곤한 노동자에게까지 지급을 확대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고용주를 위한 임금 보조금이 되게 된다. 생활임금을 위한 투쟁은 이제 약화되었다. 가장 착취가 심한 고용주들도 자기에게 고용된 노동자들이 세수로부터 보조금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임금 인상의 압박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정부는 훨씬 낮아진 최저임금까지도 동결할 수 있고, 임금의 전반적 인하가 시작된다.
신자유주의적 기본소득이 초과착취의 바퀴에 기름칠을 하고 있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아젠다의 또 하나의 핵심 요소인 민영화(사유화)가 용이해진다. 기본소득은 자유시장 옹호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왔듯이 다른 종류의 사회보장지급을 대신하여 지급되게 된다. 공공 의료, 공공 주택, 그 외의 많은 것들이 파괴되고, 기본소득은 그 수령자를 사회 인프라가 민영화된 잔해더미 속에서 쇼핑하는 “소비자들”로 변형시켜 버린다. 충분하고 다른 영역에서의 위축을 가져오지 않는 기본소득 모델을 종이 위에서 디자인하는 일은 당연히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작금의 경제/정치적 아젠다와 현재의 사회적 세력균형을 감안할 때 어느 쪽이 더 일어나기 쉬운가 하는 것이다.
다보스에 모인 사람들을 신뢰하고 “그 1%”가 사회정의의 취미에 맛들일 것이라 기대하는 것보다, 이미 얻은 것을 수호하고 공공서비스의 이용과 확장을 위해 싸우는 사회 운동/투쟁을 만들어 내는 것이 훨씬 훌륭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부가 긴축을 포기하는 사회정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보다, 모두에게 자격을 주며 충분히 지급하는, 그리고 더 이상 관료적 간섭과 도덕적 감시에 의존하지 않는 소득지원 시스템을 얻기 위해 압박하는 것이 훨씬 훌륭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기본소득은 사회보장지급의 상품화로 가는 그릇된 희망이며 경로이다. 그것은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 있지만 신자유주의 질서를 디자인하고 작동시킨 사람들이 정말로 좋아하는 종착지에 닿을 것이다.
- John Clarke는 오래된 반빈곤 운동가, 커뮤니티 조직자로서, 토론토의 ‘빈곤에 맞서는 온타리오 연대’(OCAP)의 주도적 성원이다.
와 이렇게보니 ㄹㅇ 끔찍하네..... 사실 기업입장에선 지 돈 안쓰고 월급주는 셈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