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까지만 해도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최악의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시베리아에서는 콜차크가, 캅카스에서는 데니킨과 두토프가, 크림에서는 브랑겔이, 발트 연안에서는 유데니치가, 모스크바 인근에서는 크라스노프가 밀고 오고 있었습니다. 서방 국가들은 체코 군단의 무사귀환이라는 "인도적" 명분을 내걸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멸망시키기 위해 백군에 대대적인 물자지원을 시작하며 중요 항구도시들에 1개 연대-여단 병력을 파견하여 백군의 해양 보급로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1919년이 지나며 소비에트는 최악의 위기를 벗어나 승기를 잡기 시작했고, 결국 1922년에 내전의 종결을 선언했습니다.
이 승리에는 여러 요인이 있는데 백군의 패인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심점이 없던 백군
내전 지도를 보면 알지만 백군 세력들은 각자 연결이 되지 않고 각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그 때문에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연합작전이 불가능하고 각자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백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던 인물도 없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레닌의 정부라는 확연한 구심점이 있던 반면, 백군에는 그들의 맹주나 대표가 없었습니다. 구심점이 될 수 있던 차르는 진작에 소비에트가 처리했고, 차르의 동생 미하일 대공 같은 황족은 진작 망명했습니다. 이 때문에 백군 세력들은 시간이 갈 수록 서로 연계가 안되는 지방군벌이 되어버렸고, 적백내전은 결국 중앙정부가 지방군벌을 제압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2. 철도와 도로망
러시아의 철도와 도로망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있는 형태라서, 붉은 군대가 한쪽에 병력을 집중한 뒤 그 병력을 다시 재배치하는데 매우 용이했습니다. 조미니가 봤다면 내선작전의 전형이라고 좋아했겠죠. 이 교통상의 문제 또한 백군세력이 서로 연계하는데 큰 제약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3. 비전이 없음
백군이 당대 러시아 민중에게 줄 수 있는 비전은 볼셰비키를 무찌르고 차르가 돌아와서 질서가 회복되면 다 잘될 거다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원래 보수적 색채가 강한 농민층에게는 그런대로 먹혔지만, 최초의 노동자 정권을 세운 노동자들에게는 절대 먹히지 않을 헛소리였습니다.
데니킨은 자기 구역 일대의 유대인이 공산주의의 배후라고 학살을 저지르는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소비에트는 비록 강압적인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사용해 농민층을 심하게 압박해 식량을 징발했지만, 그래도 모두가 평등하고 일하는 자가 대우받는 세상이라는 비전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4. 반민족적(?) 행위
백군 세력은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이탈리아의 물자 및 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볼셰비키에 가담하지 않은 러시아 민족주의 감성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그래도 소비에트 러시아는 러시아 민족의 정부인데, 백군은 외국 열강의 지원을 받고 있다 보니 백군이 이기면 나라의 여러 이권이 모두 외국에 넘어갈 거라는 판단이 가능했던 겁니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를 비롯한 구세대 인물 중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인물들은 그러다 보니 백군을 좋지 않게 생각했고, 이 때문에 붉은 군대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5. 혁신에서 뒤떨어짐
비록 백군 장교단이 정규 사관학교 교육을 받은 장교들로 처음에는 강한 전문성을 가졌다지만, 백군의 전문성이 사관학교에서 배운 수준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 반면, 붉은 군대가 개혁파 장교들을 흡수하고 병사들이 자체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하며 직접 전술혁신을 이루며 훨씬 유연한 방법을 구사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건데 기병대 운영에서 백군 기병대는 기병을 전통적인 기마돌격을 통한 충격효과를 중시했지만, 붉은 기병대는 기동력을 통해 기병대를 분산해 전개하고 화력을 일점에 집중시키는 전술을 채택했습니다. 백군은 붉은 기병대가 비겁한 놈들이라며 평원에서 돌격전으로 붙자고 화를 냈지만 씨알도 안먹혔습니다.
6. 소극적인 서방 국가들
서방 국가들은 체코 군단의 구출을 명목으로 내전에 개입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멸망을 목표로 삼았지만, 실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대군을 파병할 힘이 없었고, 미국은 전쟁 이후 고립주의가 대두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물자지원이야 계속 했지만 병력파견은 오데사에 프랑스 1개 연대와 영국 1개 연대, 블라디보스토크에 미국 1개 연대와 캐나다 1개 연대, 아르항겔스크에 영국 1개 여단 등 정도로 파견했습니다. 시베리아에 욕심이 있던 일본만 야전군급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당연히 이 정도 개입으로는 소비에트를 멸망시키기도, 그리고 백군올 존속시키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체코 군단이 소비에트와의 협정으로 체코 귀환을 성사시키며 명분 개입도 없어지며 철군을 시작했습니다.
https://m.dcinside.com/board/war/599469
https://m.cafe.naver.com/historyarchive/13564
오류1. 크라스노프 기반지는 모스크바 인근이 아님 모스크바 인근 프스코프에서는 걍 자기 근무지가 거기여서 거기서 바로 공격했다가 석방받아서 기반지인 돈 지방으로 내려갔음 오류2. 황제 동생 미하일은 니콜라이보다 먼저 사형당했음 오류3. 백군의 대표자가 아예 없었던건 아니고 콜차크 쿠데타 이후로 명목상으로는 콜차크가 모든 백군의 통솔권을 지녔음
그래도 큰 틀을 바꿀 지적은 아닌 듯 오류3도 레닌정부보다는 덜 강한 구심점이라는 점도 바뀌지 않고
ㅇㅇ 큰틀은 동일함 다만 내가 역스퍼거라서 지적하고 싶었음
차르 본인은 글타치고 차르 애새끼들까지 재판도 없이 빠른 모가지 컷 한게 볼때마다 맘에 걸림
기병 혁신이 가능했던 것도 새로운 기병교리가 백군 기병대 주축이었던 귀족 위주 근위대에겐 보급되지 않아서라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