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의 본고장 유럽에서 1970년대는 위기의 시대로 꼽힙니다. 당시 위기의 징후들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일례로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령에서 삭제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베니스에서 한 유명한 강연에서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폭발했다’고 선언하죠. 알튀세르의 제자 에티엔 발리바르도 프랑스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강령 폐기를 중대한 위기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논박합니다. 1960년대 진보적 사회분위기의 확산과 함께 상승했던 마르크스주의의 권위는 이후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양상이 유럽과 약 1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나타납니다. 일단 한국이 세계자본주의 중심부로부터 떨어져 있기도 했고, 자본주의 압축 성장에 따른 후속 사회변화들이 뒤늦게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유럽에 68혁명이 있다면 한국에 그것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일 것입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은 민주적 헌정질서 회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사회주의적 전망에 따른 혁명적 변화를 최종 목표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황금기는 1980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순식간에 고사 수준에 이르렀다는 게 유럽과 다른 점이겠지요. 아마 세계 마르크스주의 운동사를 뒤져도 한국처럼 운동이 빠른 속도로 명멸한 사례는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국현대사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사건은 1950년의 한국전쟁과 1980년의 광주항쟁일 것입니다. 우선 한국전쟁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을 거치며 성장해왔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한 방에 일소해버렸습니다. 전쟁을 전후한 혼란한 정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죽거나 월북했습니다. 대표적인 인사가 경성고등상업학교(이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으로 흡수) 경제학 교수이자 마르크스의 ‘자본’ 일부를 한국인 최초로 번역했던 전석담이죠. 어떤 분야든 우선 연구자가 있어야 학문이 생명력을 가지는데, 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연구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르크스나 좌파와 관련된 것은 먼지 한 톨도 존재하기 어려운 사회적 진공 상태가 되어버리죠. 이 상황이 군사독재와 맞물리며 30년 넘게 지속됩니다. 물론 1960~70년대에도 인민혁명당으로 대표되는 혁명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박현채 같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도 재야에서 활동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편적인 사건들일 뿐, 하나의 역사적 흐름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주지하듯 인민혁명당은 군사정권에 의해 처참히 단죄되어 연속성을 이어가지 못했구요. 박현채도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보다는 민족경제론(이게 실제 정책대안으로 구체화된 게 1971년 대선 김대중 후보의 대중경제론이죠) 같은 현실적인 우회로를 통해 연구활동을 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바꾸어 버린 것이 1980년 광주항쟁입니다. 이를 계기로 마르크스주의가 기적적으로 부활합니다. 보통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니, 한국의 마르크스주의는 한번 대가 완전히 끊겼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막장 국가폭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광주의 경험은 한국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줍니다. 그런 사회적 충격파가 가해졌기 때문에 반대급부로서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즉 현대 한국의 대부분 진보사상이 그렇듯. 마르크스주의도 광주항쟁의 역사적 자장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부활 과정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 1982년의 한신대 경상학부입니다. 한신대는 원래 1970년대에도 반유신투쟁에 앞장섰을 만큼 진보적 학풍이 강했는데요. 1980년대 종합대학 개편을 준비하며 경상학부를 신설하는데, 기존 주류경제학이 아닌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바탕으로 학과를 세팅합니다. 이 때 김수행, 정운영, 박영호라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거목들이 한꺼번에 한신대에 부임하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 우리나라 제도권 교육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전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학문적 복권에는 해외 유학파들이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김수행(런던대학교), 정운영(루뱅대학교), 박영호(프랑크푸르트대학교) 모두 유럽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죠. 이 세 학자는 1960년대 서울대와 고려대의 학생운동 지하서클에서 활동하다가, 군사독재가 노골화되자 해외 유학을 가서 마르크스주의를 전공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한신대 경상학부는 이후에도 강남훈, 이영훈(뉴라이트와 반일종족주의의 그 이영훈 맞습니다), 윤소영, 양우진, 성낙선, 김성구 같은 소장파 교수들을 꾸준히 영입하면서 명실상부한 마르크스주의 연구거점으로 성장합니다.
물론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이 과정이 원활하지만은 않았습니다. 1985년 한신대의 학내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김수행, 정운영 두 교수가 임용 3년 만에 해직되는데요. 이후 정운영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저널리즘으로 옮겼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하며 1980~90년대 논설위원으로 활동합니다. 진보경제논객으로서 정운영의 명망은 이때 얻어졌고, 우리가 아는 100분토론 사회자로서의 인지도도 그 연장선에 있죠. 그렇지만 연구자인 본인 입장에서는 그만큼 아카데미즘과의 거리도 멀어졌으니, 어찌 보면 불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정운영과 달리 김수행에게는 한신대 해직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교수를 초빙하자는 서울대 대학원생들의 투쟁으로, 1988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임용됐거든요. 33명의 학부 교수 중에 마르크스 전공자는 김수행 1명뿐이었지만 영향력은 작지 않았습니다. 학생운동의 최전선이었던 서울대에서 수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공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전공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당시 김수행 교수의 수업은 대형 강의실에서조차 자리가 모자랐다는 일화도 유명하지요. 그 결과 서울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는 비주류 경제학자, 진보성향 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습니다. 요컨대 김수행이라는 한 명의 학자로 인해, 국내 최고 학부 안에도 마르크스 학파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부활은 곧 1980년대 후반의 전성기로 이어집니다. 각 대학에서는 마르크스 전공자들이 늘어나고, 운동권에서는 각종 정파들이 사회성격논쟁을 전개하며 마르크스주의의 권위가 확립됩니다. 당시 관심을 모은 사회성격논쟁의 쟁점 중 하나는 ‘누가 더 마르크스주의의 원리에 충실한 변혁이론을 제시하는가?’이기도 했으니까요. 이렇다 보니 1980년대 후반쯤 되면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있어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구분이 무의미해집니다. 예컨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다가 대학원에서 마르크스를 전공하고 제도권의 진보 학자가 되는 커리어 패스가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연구자들의 양적 규모가 늘어나면서 질적인 변화들도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연구의 스펙트럼이 확장됐습니다. 이는 1세대 학자들에게 마르크스를 전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면, 후속 세대에게는 마르크스를 어떤 영역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의 정수인 경제학에서 윤소영(알튀세르-발리바르주의), 정성진(트로츠키주의), 김기원(한국경제사), 김성구(공황론) 같은 다양한 주제의 연구자들이 활발히 연구성과를 내기 시작했구요. 정치학과 사회학 등의 인접 학문에서도 새로운 방법론을 시도하는 연구자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손호철(국가론), 강내희(문화연구), 신광영(계급론), 이수훈(세계체계론) 등이 대표적 예죠. 연구자의 증가와 연구 스펙트럼의 확장은 자연스럽게 진보학계 커뮤니티의 형성으로 이어집니다. 이 시기 경제학의 한국사회경제학회, 사회학의 산업사회학회(이후 비판사회학회로 개명), 정치학의 한국정치연구회는 좁은 의미의 마르크스주의부터 넓은 의미의 비판적 사회과학 전공자들을 망라하는 학술운동단체로서 출범했습니다. 즉 마르크스주의가 개별 연구자를 넘어, 학계와 사회에 집단적 영향력을 미치는 크고 작은 싱크탱크로 조직화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거죠.
그러나 리즈시절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1990년대로 들어서면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연구는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위축됩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맞물려 있습니다. 먼저 외부 요인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했던 국가들의 몰락을 꼽아야 합니다. 즉 소련의 해체와 이에 따른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 체제 전환이죠. 한때 세계의 절반을 점유했던 공산주의 국가들의 위기는 동북아시아라는 특수한 지정학적 지점에 위치한 한국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당시 한국은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막 끝나고 민주화 이행기에 들어선 시점이었습니다. 따라서 외부의 이러한 변화는 향후 한국의 민주화 이행이 상당히 보수적인 기조 위에서 진행되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물론 많은 진보인사들이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 그들의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본래 가르침에서 벗어난 국가-관료지배의 변형태에 불과하며, 우리의 마르크스주의는 그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그저 동굴 속의 외침일 뿐이었구요. 이 시기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진보의 대응에 관해서 참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한 집단은 별로 없었습니다. 정리하면 결국 ‘혁명이냐 개량이냐?’라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도 쉰 떡밥에 가까운 전통적 구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와 연관된 내부 요인으로서, 더 이상 혁명적 민주화 운동이 정당성을 얻지 못하게 됐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앞서 설명했듯 마르크스주의 부활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광주항쟁이었습니다. 전두환과 5공이라는 무지막지한 권력집단과 싸우려면 그만큼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호출된 게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변혁이론이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사생결단의 혁명적 성격을 띠었고, 그만큼 강력한 대중적 저항을 조직할 수 있었기에 1987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운동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혁명적 민주화 운동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은 누적되어 갔고, 결정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되면서 체제 전복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6월항쟁 이후 최대 규모 반체제투쟁이었던 1991년의 5월투쟁이 대중의 냉대 속에서 소멸해버린 것이 이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듯 정치권에서는 3당합당과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이 있었고, 이로써 민주화의 보수적 이행이라는 대세는 거스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국면에서 자본주의의 혁명적 지양을 최종 목표로 설정하는 마르크스주의를 견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이탈했습니다. 아예 주류학문으로 전공을 바꾸는 경우도 많았고, 어떻게든 진보의 가치를 지키려는 연구자들도 마르크스가 아닌 다른 학문들을 수용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는 근대성 자체가 문제라는 포스트구조주의 철학, 자본주의 시장의 한계는 인정하나 그것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제도주의 경제학, 사회의 변혁보다는 생활이슈 개선에 집중하자는 시민사회론 등이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할 이론으로 각광받았습니다. 이는 좋게 말하면 진보의 다원화와 새로운 시대정신의 모색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지리멸렬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부활했던 한국의 마르크스주의는, 결국 유럽의 68혁명과 일본의 전공투처럼 이후 밀어닥친 보수화 물결 속에 조용히 침잠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모든 게 시대와 환경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이끈 주체들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와 현실세계의 접점 부재, 대중운동과의 연계 상실이 뼈아픈 부분입니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르크스의 테제처럼, 현실을 바꿔내지 못하는 마르크스주의는 근본적으로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1980년대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수많은 논쟁을 벌였지만, 그 결과가 실제로 대중들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는 의문으로 남습니다. 또 운동권에서조차 NL이 다수파를 석권한 사례에서 보듯,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강력함과는 별개로 실제 대중운동과의 연계는 그리 탄탄하지 못했습니다. 요컨대 논쟁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대중동원에서는 졌던 게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죠. 1970년대의 진보경제학자였던 박현채는 누가 봐도 뚜렷한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는 상당히 유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인 동시에 현실론자였고,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고 그보다 한 걸음 더 앞서나가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습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민족경제론을 주창하고, 이를 1971년 김대중 후보의 대선공약으로 다시 다듬는 작업을 한 것이 대표적 예죠.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최근 장하준이 각광을 받는 이유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제도주의라는 생소한 경제이론을 펼치지만, 대중이 기억하는 역사와 현재 처한 현실에 근거해서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학자로서 이론에 충실하되, 그것을 복잡한 현실세계로 주입시켜 어떻게 변화를 추동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이른바 개량주의는 아닐 것입니다. 무려 한 세대 만에 기적적으로 부활한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연구도 현실 및 대중과의 접점을 이어가지 못해 지속되지 못했고, 이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부활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다하다 엠팍글 퍼오는 ㅅㄲ가 있네
엠팍은 무슨 ㅆㅂ 홍팍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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