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혁명은 실패했고 레닌과 트로츠키 등 볼셰비키 당원들은 잡혀서 총살당했으며 당조직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케렌스키와 입헌민주당은 권력을 공고히 했고 더 이상 혁명의 가능성은 없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된건지 엄청나게 현명해진 케렌스키는 맨셰비키나 사회혁명당(원래 케렌스키의 당) 같은 야당들과의 타협 및 보수세력을 달래기 위해 니콜라이 2세를 다시 복원시켰다. 하지만 물론 차르는 종래의 신성불가침적 권위를 발휘할 수는 없었고 결국 케렌스키의 입헌 정부를 지지하고 입헌군주로서의 역할만 하게 되었다. 정부는 비밀경찰 오흐라나로 러시아 각지의 볼셰비키 세포조직들을 무자비하는 동시에 어느 정도의 토지개혁, 스톨리핀이 이전에 시행했던 것보다 조금 더 나간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을 조금 개선해 주었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에 참여하였고 연합국 내에서 폴란드와 발트 3국의 독립을 완강히 반대하였지만 독일과의 완충지대에 대한 다른 연합 국가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폴란드의 독립은 받아들였다. 


러시아의 경우와 달리 1918년 11월 혁명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승리로 끝났다. 혁명을 쟁취한 스파르타쿠스단은 독일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혁명을 막으려 한 루덴도로프는 분노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고, 빌헬름 2세와 카이저 일가는 비밀리에 처형당했으며, 자유군단은 스파르타쿠스단에게 박살났으며 구스타프 노스케는 길거리로 끌려나와 두들겨 맞았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이 독일의 권력을 잡았고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 같은 수정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고 사실상 가택연금되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나라는 피폐해졌고 더 이상 전쟁수행을 할 수 없게된 독일인민공화국은 베르사유 조약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연합군 또한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했다.) 한편 힌덴부르크 등을 비롯한 융커 장교단은 인민공화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반혁명군을 구성해 각지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켜 공화국에 대항했다. 인민공화국 정부는 처음에는 융커 장교단의 군사적 능력에 위기에 봉착했으나 아직 어느 쪽도 가담하지 않은 장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며 인민군의 전투력을 개선하고 보수적인 농민들을 상대로도 강력한 선전활동을 펼치며 점차 승리를 거두어갔다 그리고 독일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장교단은 결국 기반을 잃고 파멸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독립한 폴란드의 피우수드스키는 독일이 약화되고 러시아도 힘을 쓸 여력이 없는 틈을 타 프로이센은 본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일부에 불과했다며 독일인민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독일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이건 도리어 독일의 민족감정을 자극함에 따라 반혁명군의 몇몇 주요 장성들까지 인민공화국의 편에 서는 등 인민공화국의 단결을 불러오면서 되려 폴란드가 바르샤바까지 몰리게 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하지만 독일과의 완충지대를 잃게 될 것을 우려하였고 또 신생 폴란드를 상대로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러시아 제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였고 독일을 통해 공산주의가 확산될 것을 우려한 프랑스와 영국 또한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있다며 압력을 가했다. 독일은 어디까지나 자위적 수준의 조치라고 항변했지만 결국 조약에 따라 인정된 국경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불안한 1920년대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독일 혁명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들을 선동하고 곳곳에서 파업투쟁과 태업투쟁을 조장했으며 영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건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 뒤에 독일인민공화국이 있다고 적극 비난하고 나섰으며 그때마다 인민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실제 그들은 미래의 세계혁명을 기약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활동을 계속해서 지원하고 있던건 사실이었다. 한편 폴란드의 침공에 공화국에 가담하긴 했지만 결국 융커 계급으로 공화국에 대한 반감을 숨기고 있던 인민군 총참모장 한스 폰 젝트는 10만명으로 제한된 인민군을 최대한 정예화시키려 하였고 독일공산당 지도부도 딱히 방법이 없었기에 젝트의 견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젝트는 비밀리에 인민군을 자신의 사병으로 만들어 공화국을 전복시키고 황실을 복원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한편 1924년 뮌헨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맥주홀에서 자기를 따르는 민족사회주의 당원들을 이끌고 반공화국 폭동을 일으키다가 진압당해 반공화국 모의 혐의로 총살당하였다. 이후 민족사회주의는 독일에서 철저히 분쇄되었다. 


서방 국가들은 눈엣가시같던 독일을 압박하기 위해 폴란드를 조종, 폴란드가 독일에 대해 더욱 호전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1923년에 폴란드군이 단치히 회랑으로 고립된 쾨니히스베르크를 일시적이지만 멋대로 점령해 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독일 전체가 폴란드의 이러한 행동에 분노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견디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부당한 요구를 참더라도 꾸준히 힘을 키우고, 또 마르크스주의 국가는 아니었지만 역시 폴란드의 위협을 받고 있게 된 체코슬로바키아나 오스트리아 등과 유대관계를 구축하고, 비밀리에 중유럽 및 동유럽 국가들의 당세포 조직들을 지원하며, 또 오스트리아 등과 비밀리에 군사교류와 협정 등을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한편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를 폴란드에 주긴 했지만 어쨌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반란 정도를 제외하고는 큰 안정을 찾은 입헌 러시아 제국은 딱히 현상황에서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산업은 1차대전 이전으로 복원되었지만 그 이상의 발전은 크게 없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 수준은 전전 수준에서 크게 나아지지도 않았다. 스톨리핀 개혁 이전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지주는 농민을 착취했고 공장주는 노동자를 착취했다. 다시 사회민주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꾼 맨셰비키는 사회혁명당과 함께 이러한 실태를 의회에서 계속 문제시삼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공론화시키고 법안을 제출했지만 의회의 다수 세력을 차지한 입헌민주당은 보수 세력의 튼튼한 뒷받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미온적으로만 조치했다. 그러자 사회민주노동당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상대로 적극적인 캠페인을 펼치고 사회혁명당과 야권연대를 하여 1923년의 총선거에서 입헌민주당의 자리를 위협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농촌에서의 차르 숭배는 아직도 강력하였고 러시아 정교는 제정분리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노골적으로 입헌민주당에 투표할 것을 농민들에게 종용하였다. 그 때문에 케렌스키는 몇년 간 더 집권할 길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자신이 러시아의 공산화를 막고 안정시켰다고 스스로에게 도취된 케렌스키는 독재자를 꿈꾸었으며 또한 자신이 아직도 신성불가침의 존재라고 밑고 있던 차르는 현 상황에 엄청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둘은 결국 야합하였으며 여기에 각종 기득권 세력이 몰려들어 친위 쿠데타를 종용했다. 결국 케렌스키는 1928년 총선 직전에 사회민주노동당이 독일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 반역을 꾀했다는 대규모 조작 사태를 일으켜 사회민주노동당의 당수 마트로프를 비롯한 간부들을 체포하였다. 정부는 사회민주노동당을 불법정당으로 규정짓진 않았지만 사회민주노동당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의회에서 힘을 잃어버렸다.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이에 분노하며 곳곳에서 투쟁을 벌이려 했으나 이미 비밀리에 투쟁 기도를 파악하고 있던 비밀경찰이 사전에 투쟁을 와해시켜 버렸고, 차르를 숭배하는 농민들은 사회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았다. 급기야 과격한 성향의 전 사회민주노동당원이 의회가 있는 타우리드 궁에 방화사건을 일으키자 이는 더 큰 탄압의 구실이 되었다. 마침내 사회민주노동당을 불법정당으로 규정한다는 차르의 선언이 내려졌으며 그에 따라 사회민주노동당은 피로 분쇄되었다. 사회혁명당 또한 이 피바람에 말려들어 당 내 좌파 의원 몇이 체포되고 당 자체가 우경화되었다. 결국 사회민주노동당의 공석은 입헌민주당과 그 어용 정장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사회혁명당은 관제야당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다시 총리가 된 케렌스키는 1929년의 헌법개정으로 입헌군주국의 틀 내에서 차르에게 상당한 권한을 돌려주었고(차르는 그것도 불만족스러웠지만 권력은 케렌스키가 잡고 있었다) 귀족제도가 부활했으며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착취할 권리를 법적으로 완전히 보장받았다. 독일인민공화국은 러시아의 비극에 이를 갈았지만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때 1929년의 경제 대공황이 유럽을 덥쳤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폴란드를 막론하고 모두가 어마어마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체제인 독일인민공화국은 대공황의 영향 없이 유일하게 경제성장을 유지하는 국가가 되었고 이는 전 유럽의 지배세력에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인민공화국은 이를 좋은 체제선전 및 반자본주의 선전 소재로 삼아 이전에 비교적 안정을 찾았던 전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의 투쟁 활동을 다시 끓어오르게 했다. 언론통제 속에서도 독일인민공화국의 상황이 러시아에도 알려지자 아직 명맥을 잇던 사회민주노동당 세포조직들은 다시 혁명을 꿈꾸며 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케렌스키는 이러한 위기 상황일수록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러시아 민중을 심리적으로 휘어잡았고 또 어느 정도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를 제한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분노를 달래는 동시에 공황을 틈탄 반정부 조직들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제거했다. 급기야 케렌스키는 1933년에 의회의 동의와 차르의 승인으로 종신 총리대신이 되어 러시아의 완전한 독재자가 된 것이었다. 


한편 독일인민공화국이 혼란에 빠질 때 자신의 정예군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던 젝트는 되려 공화국이 안정되고 또 대공황 속에서 우뚝 서자 더 이상 쿠데타를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젝트는 마침내 1931년에 영국과 프랑스의 비밀 지원 아래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고 공화국군이 공화국에 반기를 들 날이 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하필 쿠데타 명령이 어긋나는 바람에 포츠담 주둔군이 너무 일찍 반란을 일으켜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젝트를 신뢰하지 못했던 정보기관은 비밀리에 젝트를 상대로 내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젝트가 본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젝트와 그 핵심 측근들이 체포되었다. 인민재판부는 젝트에게 국가반역죄로 총살을 선고했다. 그리고 이건 폴란드의 침공으로 일단 공화국과 타협했던 구세력에 대한 무시무시한 숙청의 발단이 되었다. 당은 더 이상 국가에 존재했던 구세력들을 용인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그에 따라 젝트와 연관이 있던 수많은 장교들과 공화국에 협력한 이전의 '부르주아 전문가'들이 체포되고, 총살당하고, 강제노동에 처해지고, 운이 좋으면 면직되었다. 군국주의의 온상이라고 여겨진 프로이센 전쟁대학은 문을 닫고 말았다. 다행이 이러한 과정이 지나치다는 당 내의 비판 여론에 따라 공식적인 '대숙청'은 1933년에 끝나면서 공화국에 철저한 충성을 보여준 몇몇 구시대의 인물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당은 젝트가 초래한 위기에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있다는 확증을 하고 결국 이제 군비 확장을 더 늦출 수가 없다고 판단, 마침내 베르사유 조약의 일방적 파기를 선언하고 대대적인 군비 확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에 경악하였으나 그들은 당시 최대한 독일과의 충돌을 피하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였다. 인민공화국은 프랑스의 대응을 시험해 보려고 라인안트를 점령하였으나 결국 아무 일도 없게 되자 거침없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인민공화국의 비밀스러운 공작과 대공황으로 인한 엄청난 경제적 타격으로 분노한 오스트리아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 1937년에 총궐기하였고 결국 총선에서 오스트리아 공산당이 원내 제1당이 되면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193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또한 공산당이 집권하게 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도 번지게 되었다. 헝가리의 호르티와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조차도 공산주의 운동의 힘을 더 이상 무력으로 억제할 수만 없을 정도가 되어 결국 그들과 일정 수준의 타협을 하고 독일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혁명은 더 이상 확대되지 못했는데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 군사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또한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난 공산당의 봉기에 무력으로 개입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는 원래 오스트리아에도 개입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걸로 원래 서로를 열심히 비난해 대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는 이전보다 더 큰 금이 갔다. 한편 이탈리아을 큰 안보적 위협으로 보던 오스트리아의 신정부는 마침내 독일과의 군사동맹을 요청하게 되고 이에 체코슬로바키아도 같이 가면서 마침내 독일-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의 삼각동맹이 체결되었다. 심지어 파시스트 국가인 헝가리와 루마니아, 왕정국가인 불가리아조차도 국내의 여론 때문에 이 동맹에 가입하진 않더라도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다. (헝가리는 우호적이기까지 했다.)


한편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가 일어나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독일은 스페인 공화국을 반동세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며 국제적인 의용병의 조직을 주도, 대대적인 지원병을 파견했다. 영국은 지브롤터를 지키는 것 외에는 딱히 스페인을 고수해야 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통해 스페인에서 공산주의의 집권만은 막으려 했다. 그러나 국제 의용군의 지원이 더 컸고 그 결과 프랑코의 세력은 힘을 잃고 말았다. 프랑코는 영국령 지브롤터로 도망쳐 영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스페인은 독일의 또 다른 우군이 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동맹 체제가 결국 1차대전 동맹국의 부활이며 또 이탈리아와 독일의 완충지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가 완전히 독일의 동맹국이 된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충돌을 불러온다며 1938년 뮌헨에서 회담을 열어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확고했고 이탈리아 또한 타협할 생각이 없어서 결국 회의는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국내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또 대외적 상황이 독일에게 좋게 돌아가는 걸 우려한 폴란드는 이 상황에 내부를 결속하고 또 이전에 차지하지 못한 프로이센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준비했다. 이 행동은 영국과 프랑스와의 비밀 협정 하에서 이루어졌다. 단치히 항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고문들과 무기들이 비밀리에 수송되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놀랍게도 러시아 제국이 독일인민공화국 및 오스트리아 공화국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폴란드를 눈엣가시이자 언젠가는 다시 차지해야 할 땅으로 여기던 케렌스키는 독일과의 완충지대를 포기하고서라도 폴란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폴란드의 계속되는 군비증강 상황과 또 상대적으로 낙후된 러시아군의 상황으로는 폴란드를 단독으로 접수하기가 힘들었기에 독일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독일 공산당은 이 속셈을 눈치챘지만 폴란드의 위협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결국 사악한 제정 체제와 협정을 채결하였다. 


마침내 1939년 9월 1일, 폴란드군의 동프로이센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폴란드가 프로이센 일대를 점령했어도 독일군은 공간을 내주며 시간을 벌었으며 그 동안 러시아의 대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고 있었다. 폴란드는 서쪽, 남쪽, 동쪽에서 동시에 적을 상대하게 되자 경악했다. 결국 러시아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폴란드군은 독일 영토에서 섬멸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폴란드는 다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어 독립을 잃게 되었다. 한편 폴란드와의 동맹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했으나 국경선에서의 기묘한 전쟁만 계속되었다. 그때 숙청에서 살아남은 구세력의 인물이지만 공화국에 충성하여 목숨을 건진 에리히 만슈타인(더 이상 귀족의 상징 '폰'은 쓸 수 없었다) 장군이 아르덴 숲을 돌파하여 베네룩스를 통해 진격할 영불연합군을 포위섬멸한다는 작전계획을 입안, 큰 찬사 끝에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독일-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군의 선제공격이 5월 10일에 개시되자 영불연합군은 삽시간에 허를 찔렸고 그와 동시에 오랫동안 계획한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프랑스를 뒤흔들었다. 파리는 일명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의용군의 손에 들어왔고 이들이 만든 신정부는 독일과의 평화협상을 타진했다. 덩게르크에선 정지명령 같은 건 없었고 결국 20만에 달하는 영불 및 이탈리아 연합군은 포로가 되어 무장해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5월 말에 각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파리에서 인터내셔널 총회를 열고 같이 파리 코뮌 봉기 기념식을 하는 상황이 오게 되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이 사태에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영국과의 군사동맹을 파기하는 것까지 고려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은 지브롤터를 공격, 영국 해군의 지중해 거점을 없애버렸다. 


졸지에 영국은 지중해에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반공 대열에서 이탈해 독일 편에 서거나 중립을 선언하는 걸 막을 수 없었으며 또한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지원도 힘들어지게 되었다. 결국 강력한 해군력에 힘입어 지브롤터를 탈환함에 따라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와 연계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이미 유럽의 대부분이 공산주의 국가나 비동맹 국가 외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의 해군력은 막강했고 왕립공군은 계속해서 독일의 산업단지를 폭격할 수 있었다. 공산국가들은 이 공격을 없앨 큰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편 케렌스키는 엉뚱한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케렌스키는 공산주의 군대의 대부분이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고 또한 동부 국경에는 최소한의 전력만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가 이때 독일을 공격해서 국제 공산주의를 무너트리고 기독교 세계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구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는 비밀리에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때 공산국가들은 영국의 폭격을 견디면서도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어서 큰 방심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1년 6월 22일, 은밀하게 국경에 집결한 러시아의 대군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기 시작했는데...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