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때부터 공산권의 북한지원은 정부적차원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모금과 기부또한 나름 있었긴 했는데 심지어는 전쟁고아들을 민간적차원에 입양하려는 시도도 있었음

다만 입양시도는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공산권 전역에 정부적 차원으로 북한의 유학생들과 전쟁고아들을 거둬들였고 헝가리, 동독, 불가리아, 폴란드, 소련, 중국 각국 지원하에 교육을 받았고 해외로 퍼져나가게 되었음

그중에서 하나가 헝가리인데 이 부분은 이걸 자세히 조사한 주한헝가리 대사이던 초머 모세가 유명함(이것에 대해 정리한 책도 있으니 찾아서 보는걸 추천함)

언어적장벽에 대해선 동양 언어학자를 초빙해서 러시아어와 일본어를 통해 그나마 나아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헝가리-한국어 사전(웽조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었고 나름대로 잘 굴러가긴 했는데 여기서 전환점이자 마지막이 된게 헝가리 혁명이였음

사실 55년경부터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시도하는 북한 대학생도 있었지만 이는 헝가리 노동자당과 북한 각각의 내부의 정치적 불안으로도 이어져있는게 큼

오죽했으면 1956년 초엔 헝가리 외무부부부장이 정치교육과 상호간의 존중이 필요하다고 역설할 정도였을까 ㅇㅇ


아무튼 학생시위로 시작된 혁명은 금세 헝가리 전역에 퍼져나갔고 이중에서 북한 유학생 상당수들이 혁명에 가담했었는데 이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문학작품과 여러 목격자들의 있었다고 전해짐

어떤 유학생은 시민군들한테 수류탄과 박격포 사용방법까지도 알려준적도 있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진압군이 못오게 위장전술 펼친적도 있었는 등 여러 방법으로 혁명에 가담했었음

뭐 그렇다고해서 전부가 가담한건 아니고 오히려 우려를 펴하거나 감시원이였던 일부 몇몇도 있었지만



"철강금속공업 전문학교에서 공부하는 북한 학생들이 헝가리 혁명에 합류한 일은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북한 학생들에게 우리의 문제라며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혁명에 가담해 우리와 함께 투쟁했습니다. 북한 유학생 40명은 우리를 도와주겠다며 총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한 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 민주화 이후 소지주당 출신 의원 라뉘 졸트의 증언(혁명 당시엔 노동자협회 비서로 활동하였음)

"바리케이트를 지키는 혁명가들과 소련 탱크가 충돌하기 전까지 우리 모두는 전장을 오가는 북한 학생들을 대단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전까지는 우리는 동양인들이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군이 되었다."
- 헝가리 시인 메제이 커털린의 증언

"혁명 시 북한 학생들은 어떤 일을 했는가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1956년 자유의 산에서 뛰어내려 온 북한 학생들은 젊은 혁명가들과 서로 열정적으로 포옹하였고 전쟁경험에서 터득한 좋은 아이디어도 헝가리 혁명가들에게 전수해 주었다."
- 당시 헝가리어 헝가리 문학교사였던 네메쉬 너지 아그네의 증언

"밤 11시에서 12시가 되자 내 기숙사 방에는 무기가 제법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무기들은 체펠 섬에서 받은 것들이었습니다. 부다페스트 남부 공업지대인 체펠 섬에서는 무기보관창고들이 있었습니다. 혁명사들이 트럭 한 대를 체펠 섬에 보내자 현지인들은 모든 무기를 그들에게 내주었습니다. 부다페스트로 옮겨진 무기들을 내 방에 보관하게 된 이유는 룸메이트가 혁명 주동자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혁명가들과 학생들은 무기를 지급받기 위해 내 방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기를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문 앞에 서서 따발총의 안전한 사용방버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탄창에는 51개~52개 정도의 총알이 들어있었습니다. 나는 탄창을 갈아 끼우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 당시 북한 유학생이였던 정기홍의 증언(초머 모세와의 인터뷰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실패했고 북한에서는 다른 파벌들이 무자비하게 숙청되고 있었음

이에 북한정부에선 이들에 대해 전원 소환조치를 내렸는데 학생들과 교수, 학교장들은 헝가리에 남아 학업을 이어나가길을 원했음

안타깝게도 여러 청원과 면제요청들은 무시되었고 일부 대학생 25명, 전문학교 학생 89명만 학업을 마칠때까지 체류하던것을 허용하였음(나머지 715명은 강제소환)


북한에 간 이들은 단체생활을 지시받았으며 정치교육을 받았는데 헝가리 소식이나 대사관을 통한 연락이 사실상 차단되었음

그리고 그들은 북한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쉽질 않았고 심지어는 국제결혼또한 하나 둘 씩 강제로 끊어지는 판국이였음

그렇다고 외교관들의 활동또한 좋은건 또 아니였고 출입제한구역이 늘어나고 촬영제한, 잡지와 택배 배송 차단 등 하나 둘 씩 폐쇄되어가고 있었음

결국엔 냉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헝가리와 북한과의 관계가 사실상 극소수의 교류로 축소되고야 말았음 ㅇㅇ


다만 헝가리 혁명이 끝나가는 혼란 틈 타 중립국으로 도주한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미국인 언론인이던 베리 파버는 2006년 2월의 라디오 방송에서 4명의 유학생들이 오스트리아를 거쳐서 외부로 탈출하였고 유고슬라비아를 간 유학생 1명이 있었다고 회고했었음

그중에서 정기홍은 오스트리아를 거쳐서 덴마크를 거쳐서 1957년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현재는 프랑스로 정착하였음 림정동또한 오스트리아를 거쳐서 서독으로 정착하였고

이들에 대해 한국정부의 요청이 있었지만 그들은 거절하였고 걍 가끔 몇번 정도만 한국을 방문하였다고 전해짐

이렇게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2010년때 되서야 초머 모세의 노력덕분에 그나마 다시 꺼내지게된걸 보면 여러모로 안타깝다라는 생각이 듬

에휴...




"처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이 대단히 발전한 나라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중국도 필요없고 일본도 필요 없습니다. 나는 평양 지도부의 결정들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는 일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나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습니다. 평양의 지도세력은 김정일때와 똑같거나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습니다."

- 림정동이 초머 모세와의 인터뷰중 나오는 회고 중 일부 발췌하였음을 밝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