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민족주의 떡밥 터질 때면 온갖 겉핥기식 헛소리밖에 없는 게 아쉽습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가 항상 진흙탕으로 끝나는 건 민족이 뭔지 민족주의가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란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일단 제가 아는 만큼은 여기다 정리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세줄요약
0.민족/국민은 네이션, 민족주의/국가주의는 내셔널리즘이라 쓴다.

1.네이션(민족)은 사회적 구성물이다. 즉 역사적으로 변하는 개념.
2.내셔널리즘은 네이션을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보는 사상이다.
3.내셔널리즘은 '국가'를 통한 독립된 주권을 원한다.



0. 용어 정리와 그 이유

일단 용어 정리 먼저 하고 가겠습니다.

민족/국민=네이션(nation)
민족주의/국가주의=내셔널리즘(nationalism)
민족/국민 정체성=내셔널리티(nationality)

왜 쉬운 말 안 쓰고 어려운 말 쓰냐? 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요새 사회학계에서는 다들 이렇게 씁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내셔널리즘을 '민족주의'라고 번역할 수 있나요? 우리가 통상적으로 '다민족국가(multiethnic state)'라고 부르는 미국, 호주, 인도 등의 내셔널리즘은 민족주의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충성심을 느끼는 공동체를 '미국 민족'이라 부를 수도 없고요.

그래서 요샌 '국가주의'란 용어도 자주 쓰지만, 한계가 있죠.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등등의 내셔널리즘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지역들은 민족주의 도래 이전까지 단 한 번도 통일된 민족국가를 이뤄본 적이 없죠. 그런데 19세기 독일 지역 수십 개 소국에서 유행한 내셔널리즘을 '국가주의'라 할 수 있나요? 독일제국이 세워지기 이전의 독일인들을 '독일 국민'이라 할 수도 없지요.

그런 이유로, 의미의 왜곡을 최소화하기 위해 원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게 학계의 추세입니다.



1.내셔널리즘이란 무엇인가?


그럼 네이션(민족)이란 뭐죠? 정체가 뭘까요? 거기에 대한 대답은 '아무도 모른다'입니다. 왜냐하면 네이션의 개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왔기 때문이죠. 아타튀르크는 터키어를 쓰고 터키식이름을 갖고 터키인이라 스스로를 생각한다면 모두 터키인이라 했습니다. 현대 미국에서는 심지어 영어를 쓰지 않더라도 미국 시민권자라면 모두 미국인이라 하고요.(이게 틀렸다는 대안우파들도 있지만) 한국에서 민족은 훨씬 협소한 의미를 가지죠. 혈통적 요소가 민족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는 민족이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재구성되어온 개념, 즉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셔널리즘에 대해 묻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 사상이 근대에 이르러 형성되었고, 또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내셔널리즘의 내용이란 대략 이렇습니다.

"네이션은 통일되어야 하며, 독립적이어야 하며, 정치적 주권을 획득해야 한다."

즉, 내셔널리즘이란 네이션을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여기고, 그 운명공동체가 하나의 정치적인 주권을 획득해야 한다는 사상인 거죠! 그 주권을 획득하는 사상이란 '국민국가/민족국가(national state)'인 거고요!

'한민족은 하나의 운명공동체이기에, 마땅히 하나의 독립국가를 가져야 한다.' 이 명제는 20세기의 한국 정치를 지배했습니다. "해방" 이전의 독립운동가들이든, 북진통일을 주장한 이승만이든, 평화통일을 주장한 '진보인사'들이든, NL로 불리는 자주파든 말이죠. 이들은 모두 위의 명제에 기반하여 자신들의 사상적 정당성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독립된 민족국가를 가져야 하죠? 만약 일본이 조선인들을 동등하게 대하고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보장한다면 독립할 필요가 있나요? '우리'의 기준은 뭐죠? 육지와 오랫동안 단절된 역사를 갖고 있고, 또한 육지로부터 탄압과 수탈을 당해왔던 제주도는 왜 독립된 민족국가를 가져선 안 되죠? 왜, 주권을 가진 국민국가는 민족단위로 성립돼야 하죠? 네이션의 개념은 너무나 모호하며, 왜 하필 추상적인 개념인 '네이션'이 독립과 주권을 얻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셔널리즘이 제기하는 문제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민족, '네이션'이란 개념 그 자체입니다. '한민족'이란 뭐지? 이 개념은 언제 생긴 거지? 왜 우린 한민족을 위해 목숨과 충성을 바쳐야 하는 거지? 이게 뭐길래?





여기부턴 다른 글로 이어갑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네이션(민족)의 기준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다음 글에서 거기에 대해 답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