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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코뮌의 봉기는 다분히 민중적, 노동자적 관점을 보이며, 79년 이후로 일어나던 여러 시민 봉기의 집대성과 같은 쾌거였다. 5월 광주로 인해 피상적인 관념, 혹은 학술적 연구로 머물던 변혁적 사상은 사회에 곪아있던 모순의 고름과 함께 터져나가며 80년대를 열었다. 양심적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의 지지로 일어나는 학살을 지켜보았다. 이들은  곧 단순히 외세와 소위 '자유진영'의 지지로 민주화를 이루자는 공상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민족 해방을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70년대 전태일 열사가 밝힌 불빛을 아름아름 지켜나가던 노동운동은, 5월 항쟁과 일련의 운동을 기점으로 단순한 권익 보호와 경제주의적 주장을 넘어선 노동자 정치권력이 가능하며, 앞으로의 노동운동이 나아가야할 길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렇듯 역사에 빛날 저항을 이끈 광주 코뮌또한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일어난 봉기였다. 5월 항쟁이 사회주의적 변혁을 지향하지 '않은'것을 넘어 부정한것은 이미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봉기의 핵심 지도부는 '공산당'에 대한 반대를 확실히 하였으며, 심지어 시위 초기에는 좌파적 선동구를 주장하던 학생들을 자진 체포해 경찰에 넘기기도 하였다.
봉기 이후 코뮌의 형성에서도 노동자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노조, 혹은 노동자 개개인들은 지도부에서 소수에 불과하였다. 특히 봉기 초중반에 주도적인 교전을 벌였던 광주 시내의 방직 노조의 여성 노동자들은 코뮌의 지도역에서 배제되있었다. 전남대를 위시로한 코뮌의 여러 청년 지도자들이 사회주의적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과 광산, 방직 노동자들의 연계는 적었고 이들이 파편적으로 무기 회수를 거부하고 항쟁을 이어나갈때 진보적 민주세력들은 자진하여 무기를 회수해 파시스트들에게 넘겼다. 종교인,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광주 평의회의 지도부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것처럼 '스스로 정치적 자살을 택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 행동이 그들에게 물리적 죽음을 초래했음도 말할 것 없다.

무장을 포기한 시민들의 항쟁은 곧 전남, 전북을 따라 광역화되던 봉기의 고립을 초래했으며. 이후 군사파쇼들이 효과적으로 대중에게 이 봉기를 악의적으로 선동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물론 생존한 양심적 종교인, 지식인들 대부분이 후에 발흥하는 민족해방과 사회주의적 운동에 참가하였던것은 고평가해야하며, 당시의 정보통제와 세뇌적 반공교육으로 인해 사회주의 사상 자체를 접할 기회가 없었음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바이며 그들이 접하지 못했음 자체를 비판할수 없다.

그러나 과거의 봉기가 가진 한계점을 확인하는것으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 이러한 한계점 지적을 통해 변혁세력이 어떻게 전진하고 실천해야할지의 고민을 던저주는것이 우리 운동가들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