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을 포함한 동구권의 몰락은 소련 사회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에 여러모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단 소련형(型) 근대화의 종점이 궁극적으로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의 편입이라는 점과, 아직도 계층인지 이미 계급인지 1991년이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았던 소련의 관료층이 결국 자본가, 내지 관료 자본가로 변모된다는 점은 현실적으로 다 확인됐다. 사실상 관료자본주의 국가로의 변신에 해당되는 중국 등 동유럽 바깥의 소련형(型) 사회들의 ‘개혁개방’ 시기도 겹쳐져, 소련형(型) 사회란 장기 지속이 가능한 독자적인사회·경제적 형태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일부 사회들이 근대로의 전환의 특정단계에서 겪는 하나의 한시적인 변형(變形)이라는 생각은 많은 포스트-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공고화되기에 이르렀다. 포스트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자들 의 논쟁에 큰 영향을 끼친 외부적인 상황 중의 하나는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1920년생) 류의 세계체제론의 수입이었다. 우파 진영에서는 소련을 주로 전체주의로 규정한 냉전 시기의 이론이 1990년대 러시아에 대거 유입되는 반면, 좌파 진영의 경우에는 세계 체제의 변두리에 밀려난 러시아인들로서 그들과 구미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잘 설명할 수 있는 것같은 세계체제론이 자연스럽게 선호됐다. 세계체제론이 유입되면서 소련의 흥망은 반(半)주변부의 근대 전환기 시기의 하나의 사건으로 재개념화됐다 [이와같은, 다소 ‘제3세계론적인’ 세계체제론의 수용은 예컨대 Семенов(2003: 514-568)에서 돋보인다].

꼭 월러스틴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1991년 소련 몰락 이후의 러시아의 경제·기술·지정학 차원에서의 ‘주변화’를 매우 강조하는 것은 스탈린주의 지식인들이다. 그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현 모스크바 국립대 철학부 교수인 리차드 코솔라포브(Richard Kosolapov, 1930년생)이다. 과거(1979-1986년간)에 소련 공산당의 이론지인 ≪코뮤니스트≫지를 책임편집하는 등 수많은 요직들을 두루 거친 코솔라포브는, 오늘날에 와서는 소련을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가 아닌 과도기적 사회로 개념화한다. 단, 그는 스탈린 시대 때야말로 사회주의 이상에 가장 근접했다고 간주하고, 그 뒤로는 체제가 이완돼가면서 점차 각종 사회 모순들이 첨예화됐다고 분석한다. 이런 ‘서서한 퇴보’는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급속한 내파’, 즉, 몰락으로 질적으로 변환됐다는 것은 그의 분석이다. 이 몰락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다시 후진화되어 세계의 변두리로 말려났다고 그가 보고 있는데(Косолапов, 2014), 이와 같은 입장을 광의의 스탈린주의 진영은 대체로 공유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하는 부분은, ‘광의의 스탈린주의 진영’이 사실 상당히 다양한 사상가, 논객들을 통칭한다는 말이다. 코솔라포브 같은 경우에는 유물사관 등을 지금도 고수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지만, 소련 시절에 과학발전을 계획하고 쿠바에의 과학 원조를 관리했던, 오늘날 고인기를 유지하는 세르게이 카라-무르자(Sergei Kara-Murza, 1939년생)와 같은 경우에는 아예 대놓고 ‘서구 중심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부정한다. 카라-무르자는 일련의 저서에서 ‘소비에트 프로젝트’의 정수를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의 공업시대에의 재현”으로, 또 스탈린을 “독창적이며 전통에 기반하는, 종래의 마을, 공동체 정신에 입각한 매우 바람직한 대안적 근대화의 제창자”로 묘사한다(Кара-Мурза, 2008). 하지만 코솔라포브도 카라-무르자도 오늘날 가장 규모가 큰 스탈린주의적 야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KPRF)을 때때로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해도 정식 당원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방 공산당의 이론가들도 코솔라포브나 카라-무르자 같은 유명 관료, 학자 출신 논객들도 스탈린 시기를 ‘사회주의 이상’ 내지 ‘러시아 민족의 공동체적 이상’에 가장 근접한 시기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오늘날 상황을 ‘후진화’와 ‘주변화’로 규정하는 데에는 입을 모으고 있다.

한데 소련의 주류 ‘사회과학’은 꼭 코솔라포브와 같은 정통파 스탈린주의자만을 배태시킨 것도 아니다. 코솔라포브의 후배이며 현재로서는 같은 모스크바 국립대 경제학부의 경제이론 및 정치경제학과의 학과장으로서 봉직하고 있는 알렉산드르 부즈갈린(Alexander Buzgalin, 1954년생) 같은 경우에는, 카우츠키와 트로츠키, 그리고 크라우즈와 같은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네오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소련관(觀)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트로츠키나 크라우즈와 마찬가지로 1917년 10월 혁명을 ‘사회주의를 지향한 대중의 반란’으로 간주하지만, 카우츠키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러시아는 사회주의로의 진입을 위한 기본적인 토대가 마련돼 있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나아가서 그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고립을 당한 혁명 러시아가 ‘생존을 위해’ 추격형 공업화를 추구했다고 보고, 그 과정에서는 (트로츠키의 분석대로)보수화를 거듭한 지배 관료계층이 (크라우즈의 논리대로) 노동자 계층과 ‘사회적 타협’을 이루어야만 했다고 분석한다. 노동자들이 관료들의 정치적 지배를 인정해 주는 대가로 광범위한 사회적 권리와 혜택을 획득했으며, 소련은 고전적 자본주의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도 아닌, 중간적인 ‘변질된 과도기적 사회’로 남았다가 결국 계급형성 과정이 완료된 관료들에 의해 (반)주변부 자본주의로 편입됐다는 것이다(Бузгалин, Колганов, 2010). 이와 같은 개념화와 트로츠키식 ‘변질된 노동자 국가’론의 차이는, 부즈갈린이 소련이 이미 정치적으로 ‘노동자’와 전혀 무관한 관료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부분이다. 하지만 트로츠키나 크라우즈와 마찬가지로, 부즈갈린도 ― 적어도 압축형 근대화의 여러 방법들 중에서는 ― 소련식 근대화의 ‘상대적 진보성’을 인정한다.

코솔라포브나 카라-무르자 같은 경우에는 ―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 러시아의 바람직한 미래를 조금 덜 억압적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소련의 패턴을 따르는 ‘국유 경제’와 ‘공동체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 등으로 본다. 스탈린주의자들이 대부분이 다 그렇듯이 그들에게 ‘세계’보다 ‘우리나라’, 즉 러시아가 우선이지만, ‘세계’를 사고할 때에도 바람직한 미래를 대체로 ‘국가 /국유화된 생산 부문이 주도하는 경제 발전’으로 보려고 한다(Кара-Мурза, 2014). 이와 판이하게 탈(脫)스탈린주의적이며 ‘국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부즈갈린이나 그 주위의 지식인들은 소련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인정하되 그들의 미래상(像)을 소련의 경험과 꽤나 다른 방식으로 구축한다. 부즈갈린이 생각하는 탈자본주의적 미래란, 국유화된 경제라기보다는 탈(脫)경제화된, 즉 생산-소비 패러다임을 넘어 모든 구성원 각자의 창조성의 자유로운 발전과 직접적 참여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탈산업사회다(Buzgalin, 2009). 하지만 부즈갈린 등은 마르크스의 본래 이상인 ‘자유의 왕국’과 가까운 희망적인 ‘먼 미래’ 담론을 제시하는 동시에, 현실적 차원에서는 주로 신케인스주의적 ‘국가의 지원에 의한 첨단기술 부문 발전’이나 ‘복지 국가의 확대’ 등을 주장하면서, 좌파는 ‘세계 체제 중심부의 헤게모니적 자본’과 최근 갈등관계에 들어간 러시아의 반주변부적 자본과 국가에 힘을 보태주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Бузгалин,2018). 부즈갈린에 따르면 좌파는 국제 갈등의 경우 핵심부 자본에 일부분 맞서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주변부 자본과 국가와는 반미(反美)의 대의명분 차원에서 비판적 지지를 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의 반주변부적 국가 관료자본주의 에 대한 비판적 지지 성명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체제론의 러시아 좌파에 대한 영향은 거의 지배적이다. 세계체제론을 포스트-소비에트 지식 공간에서 전파하는 데 앞장선 네오 내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 중의 한 사람은 게오르기 데를루갼(Georgi M. Derluguian, 1961년생)이다. 부즈갈린도 일부의 논저를 영어로 작성·발표하지만, 구소련에서 1990년에 박사학위를 수여하고 나서도 그 뒤에 도미해 뉴욕주립대에서 월리스틴으로부터 다시 한 번 박사 학위를 받은, 그리고 오늘날 아부다비에 있는 뉴욕대학의 분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데를루갼이야말로 현재 러시아 ‘진보 지성인’ 중에서는 러·영 이중언어 구사자다. 그는 동시에 영어권과 러어권(그리고 아르메니아어권)의 지식공간에서 사회사 전공자와 대중적 지식인으로서 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부즈갈린이 네오마르크스주의자’라면 데를루갼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 부즈갈린이 ― 트로츠키의 전통대로 ― 1917년 10월 혁명을 ‘사회주의 지향적인 혁명’으로 보고 이 부분을 강조하지만, 데를루갼이 강조하는 것은 러시아의 추격형 근대화의 굴곡진 여정이다. 그에 의하면 러시아의 로마노프 제국은 청나라나 무갈 제국, 오스만 제국과 마찬가지로 유라시아의 하나의 ‘총기(銃器)제국’이었지만, 이들과 달리 18세기 초반 이후 위로부터의 군사 본위의 근대화를 통해 반(半)식민화 내지 식민화, 약체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같은 후발적 근대화의 주자이었던 일본으로부터 1905년에 전쟁 패배의 쓴잔을 안고 마시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또 하나의 후발 근대 국가인 독일과의 군사적 경쟁에서 사실상 거의 패배한 후로는, ‘비(非)정통적 근대화 노선’, 즉 과거 제국의 내파와 재편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군사적 패배와 열강에 의한 식민화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래서 스탈린 시대에는 소련이 하나의 거대한 기업체’처럼 재편되어 세계체제와 적당한 ‘거리두기’ 속에서 ‘초과 중상주의적’(hyper-mercantilist) 방식으로 근대적으로 결집된 ‘국민’(인민)과 ‘합리적인 관료제’를 만들어 냈다(Дерлугьян, 2017). 데를루갼은 두나옙스카야 등처럼 소련을 사실상 ‘국가 자본주의 사회’로 파악하긴 하지만, 정통파(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두나옙스카야와 달리 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려 하지 않고 오히려 ― 코솔라포브나 카라-무르자와 그리 다르지 않게 ― 스탈린 시대의 ‘근대화’에서는 암(暗)보다 명(明)을 더 많이 발견한다. 세계체제론자인 그가 보기에는 소련의 발전모델이 일차적으로 세계체제 주변부의 독자적, 독립적 발전의 하나의 밑그림으로서 크게 기여한 것이다.

소련의 ‘정통’ 사회과학 교육을 받고 나서 일종의 서구풍(風)의 네오마르크스주의자가 된 부즈갈린이나 미국에서 또 하나의 박사과정을 마친 데를류갼과 달리 현재 러시아 좌파 이론가로 보리스 카갈리츠키(Boris Kagarlitsky, 1958년생, 그의 책 중에는 국역된 서적들도 있다)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카갈리츠키(2012)는 소련의 ‘정통파’ 마르크스-레닌주의도 미국의 세계체제론도 ‘적통’(嫡統)으로 이어받지 않았다. 그는 1980년대 초반의 모스크바에서 일각의 지식청년들과 함께 신좌파적 지하 서클을 꾸렸다가 발각돼 소련 감옥의 맛을 봤고, 그 뒤로는 사면·복권되어 영문과 러문 등으로 활발한 이론과 역사연구, 정치평론 활동을 해왔다. 그는 1980년대 말 이후부터 세계체제론의 세례를 강하게 받고, 나아가서는 러시아 역사의 전(全) 과정을 ‘자원 공급자이자 서구 제품 및 기술의 시장’이라는 관점에서 기술한 <주변부적 제국>이란 저서로 이름을 얻기도 했다(Kagarlitsky, 2008). 이와 같은 이론적 바탕이 있기에 카갈리츠키의 러시아혁명 내지 소련론(論)은 부즈갈린과 데를루갼 견해들의 일종의 ‘절충판’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 여전히 급진 좌파를 표방하는 카갈리츠키는, 부즈갈린과 마찬가지로 ― 트로츠키 등의 전통대로 ― 10월 혁명의 사회주의 지향적 성격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 데를루갼과 마찬가지로 ― 1920년대 후반 이후부터의 스탈린 체제의 수립과 공고화를 (‘관료들의 테르미도르 반동’을 강조한 트로츠키와 달리) 주로 세계체제 속에서의 러시아의 압축적인 자립적 근대화의 논리로 해석한다. 즉, 일본과 독일로부터의 (준)패배로 인해 세계체제 핵심부로부터의 자본·기술에 의존하는 추격형 근대화 노선이 파탄 나고 열강의 위협이 심화되자 스탈린 체제하에서 러시아는 여태까지 실험해보지 못한 자립적 근대화 노선을 선택해 엄청난 기술적·사회적 약진(공업화, 도시화, 교육수준 향상, 포괄적 복지 국가 건설 등)을 했고 다른 제3세계 나라와 인민들에게 본보기가 됐다는 이야기다. 카갈리츠키에 따르면 세계체제의 핵심부와 거리를 두고 이루어진 이 자립적 근대화 과정에서 관료 지배하의 소련은 비시장적 사회이었던 만큼 공장 단위에서 전통 마을 공동체를 재현하고 더 이상 노동시장에서 상호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자들에게 좋은 노동·생활 조건을 만들어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Кагарлицкий, 2000: 17-23). 카갈리츠키는 급속한 도시화 속에서의 소련 사회에서 “기존의 계급들이 이미 해체되고 새로운 계급들이 아직도 형성 과정 중에 있었”고, ‘계급들이 해체된 도시화 중의 대중 사회’를 관리했던 관료층도 “형성 중의, 아직도 계급이 되지 못한 계층”이며, 관료들의 계급 형성이 바로 소련의 몰락과 서방식 자본주의 도입을 결과시켰다고 분석한다. 이 부분에서는 그의 해석은 부즈갈린과 대동소이하다.

부즈갈린이나 카갈리츠키보다 더 상세한 ‘소련론(論)’을 제시한 마르크스주의 계통 사상가는 알렉산드르 타라소프(Alexander Tarasov, 1958년생)이다. 그는 카갈리츠키와 마찬가지로 소련 시대에 좌파적 입장에 서서 집권 정당인 공산당을 비판하고, 나아가서 급진 좌파적 지하 조직의 건설을 시도했다가 정신 병원 강제 입원 등 탄압을 감수해야 했다. 그의 소련관(觀)을 피력한 그의 논문은 국역된 바 있어(타라소프, 2013), 그 주요 요점만 여기에서 다시 소개하겠다. 부즈갈린이나 크라우즈, 카갈리츠키 ― 내지 그 전의 트로츠키 ― 와 마찬가지로, 타라소프는 소련식 사회-경제적 형태를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양태’로 파악한다. 단, 트로츠키나 부즈갈린이 소련의 ‘과도기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타라소프는 ‘초(超)국가주의’(super-étatisme, 파시즘 시대 일본제국의 ‘초국가주의’, 즉 극단적인 파쇼적 내서널리즘과는 다른 개념)라고 파악한 소련식 사회·경제적 양태를 ‘산업사회라는 생산양식의 하나의 독자적인 양태’라고 간주한다. 그에 따르면 일단 공업화된 산업사회인 이상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은 바로 국가가 경제의 거의 전체를 흡수하고 나아가서 사회 전반을 흡수하려 하는, 이와 같은 ‘초국가주의’다. 물론 이 ‘초국가주의’는, 국가가 사멸하는 ‘사회주의’와 엄연히 다르며, 사회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란 ‘초국가주의’가 지향하는 산업화와 정반대로 바로 탈(脫)산업, 탈(脫)경제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동화를 바탕으로 다수의 인구를 생산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시대에 이르러서야 ‘탈(脫)산업사회’라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 20세기 초반의 러시아에서는 이론적으로라도 그런 가능성이 전무했으며, 따라서 트로츠키가 예리하게 지적한 혁명의 보수화(‘테르미도르의 반동’)는 사실상 불가피했다. 산업화라는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의 해결에 전력(全力)을 집중시킨 스탈린 정권은 실제로 진보적이라기보다는 반(反)혁명적이었지만, 그래도 개별적 자본의 이익추구를 대체한 전지전능한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소련 정권의 착취적 성격을 상대적으로 둔화시키기도 했다. [...] 2) 특히 전후 복구 이후의 시기(1950년대 이후)에는 정치적 고려 차원에서 전부 다 사실상의 ‘국가 공무원’이 된 노동계급의 노동 조건을 비교적 더 양호하게 만들 수 있었다. 같은 논리 차원에서 제3세계에서의 하위(junior) 파트너(예컨대 북한 등)3)에 대해서도 ― 비록 불평등한 종속관계라 하더라도 ― 직접적 경제적 이용 내지 착취보다 정치·군사적 지원에 더 중점을 둘 수 있었다. 4) 한마디로 소련은 본질(산업사회의 한 양태)이라기보다는 그 체제의 일부 특질(개별적 기업의 이익 극대화의 부재) 내지 상황 차원에서 제한된 진보적 역할을 때때로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타라소프와 논쟁을 벌인 또 한 명의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유리 세메노프(1929년생)는 보슬렌스키처럼 소련을 일종의 ‘공업사회판 아시아적 생산 양식’의 사회로 파악해 소련 관료층을 ‘지배계급’으로 보지만(Семенов, 2003: 514-568), 타라소프는 계급이라기보다는 계층이라고 여긴다. 관료들이 잉여가치를 수탈했지만 수탈한 잉여가치를 개인적으로 이용해 이익을 추구할 수 없었고 정치적 고려 차원에서 확대 재생산 과정을 ‘관리’했을뿐이기 때문이다. 부즈갈린이나 카갈리츠키처럼 타라소프도 관료층이 계급으로 전화한 시점을 소련 몰락 전후로 본다.

크게 봐서 신좌파 풍(風)의 비(非)스탈린주의적인 포스트-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소련론’(論)은 두 가지 큰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부즈갈린-카갈리츠키-타라소프로 대표되는 첫 흐름은, 크라우즈와 마찬가지로 소련을 미완의내지 과도기적 사회로 파악하고, 소련을 지배했던 관료층을 아직도 즉자적 내지 대자적 계급이 되지 못한, 즉 위계질서의 상층부에서 군림을 한다 해도 아직도 소유권에 기반을 두어 잉여가치를 개별적으로 수취하지는 못하는 계층으로 보고 있다. 이 계층이 명실상부한 착취계급으로 진일보해 발전되는 것이 바로 소련 몰락 전후라는 것은 이 흐름을 대표하는 이념가들의 지론(持論)이다. 동시에 그들은, 아직도 착취계급이 되지 못한 관료계층이 세계체제의 바깥에서 이루어진 추격형 초고속 근대화 과정에서 노동자계층에 대대적인 양보를 해야 했으며, 또 비(非)시장적인 근대화인 만큼 그런 양보들을 하기가 쉬웠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지 않지만, 세계체제론자이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데를루갼이나 세메노프 같은 흐름에 속하는 사상가들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사회(‘하나의 커다란 기업’: 데를루갼)나 ‘공업 시대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사회’(세메노프)로 보고 그 지배층을 명실상부한 지배계급, 즉 공공부문 생산수단의 집단 소유주이자 잉여가치 수취자, 투자와 재생산의 관리자로 파악한다. 어떻게 보면 소련이 (아직도) ‘변질된 노동자국가’라고 여겼던 트로츠키와 이미 국가자본주의 사회라고 간주했던 두나옙스카야 사이의 의견 차이가, 포스트-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차원에서 재현된다고 볼 수 있다.

- 박노자, 「소련 몰락 이후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경제적 형태에 관한 포스트-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의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