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에 대한 볼셰비키 정부의 즉각적인 반응은 반란을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반혁명 음모의 일부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백군에서 사회혁명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반혁명 세력들은 반란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시도했으며 "원조"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객들이 통제하는 러시아 적십자 채널을 통해 제공된 인도적 지원을 제외하고 혁명위원회는 반혁명세력의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혁명위원회는 자신들이 전제정부의 복귀 또는 제헌의회-1918년 초에 혁명의 적들에 의해서 소집된 적이 있다-의 복귀가 아니라 관료적 지배로부터 해방된 소비에트의 재선출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의 성벽은 소비에트이지 제헌의회가 아니다. 크론슈타트에서 권력은 수병과 적군병사, 혁명적 노동자들의 손에 있다. 모스크바 라디오가 기만적으로 주장하듯이 권력은 코즐로프스키가 이끄는 백군의 수중에 있지 않다."라고 크론슈타트 『이즈베스치야』는 선언했다.
해군과 육군 병사의 계급구성뿐만 아니라 반란자들의 강령과 이데올로기에도 소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상 이 반란은 볼셰비키가 1917년 혁명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자들이 그들의 경멸감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의 존재가 운동 그 자체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해서 극도로 완고한 태도로 대응했다. 볼셰비키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토론이나 타협의 가능성은 빠르게 사라졌다. 요새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하는 동안, 반란을 분쇄하기 위해서 파견된 적군 부내들은 항상 사기가 바닥을 때렸다. 몇몇 부대들은 반란자들에게 동조했다. 군대의 충성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걸출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그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리던 10차 당 대회에서 급파되었다. 동시에, 체카의 소총부대들이 어떠한 사기저하도 퍼져나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병사들의 뒤에서 그들을 겨누었다. 요새가 완전히 함락되었을 때, 체카는 약식재판을 실시하여 처형하거나 빠르게 사형을 언도하는 방식을 일부 반란자들을 학살했다. 다른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진압은 체계적이었고 무자비했다.
이 사건 당시에 백군이 볼셰비키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크론슈타트 반란을 이용할 위험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때문에 볼셰비키 권력 내부의 가장 비판적인 분파들조차도 반란을 분쇄하는데 협력하게 되었다.
https://ko.internationalism.org/inter123/lessons_of_kronstadt
백군이 그들을 도울려했다고 그들이 백군의 일부가 된다면 독일 제국주의의 도움을 받은 레닌은 어째서 제국주의자가 아닌 것인가?
'몇몇 부대들은 반란자들에게 동조했다' 실제로는 반란군 측으로 넘어간 것은 561 연대의 1개 대대뿐이였다. 이 대대는 브랑겔, 데니킨, 마흐노(!)군 포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236 연대와 237 연대에서 공격을 거부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들은 얼음 위로 올라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고 부족한 음식과 옷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이들의 요구는 자기들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였다. 정치적 의견이 제시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일부 부대가 그렇다고해서 전체가 호도된다면 볼셰비키의 군대들은 라트비아 소총사단을 제외하고 얼마나 충성스러웠을까?
수도 근처에서 무기들도 쑈하는데 세상 어떤 정부가 아이고 어셔옵셔 하면서 문을 열어줄까?
어서옵셔 하고 문 열어야한다고 말한적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