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시는 광주대단지 시절부터 저소득층과 소형 공장 밀집지역이라는 특성 때문에 1970년대부터 외지의 대학생들이 들어와 활동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제일실업중고등학교와 대학생봉사단이 있다. 제일실업중고는 연세대 노정현 교수의 도시빈민 프로그램에 영향을 받아 1971년 연세대 신학과 4학년생인 최규성 씨가 시작한 야학에서 발전했다(동아일보 1993/03/01). 제일실업중고는 성남시 노동자들의 의식 발전에 일부 영향을 미치긴 했으나 이후 경기동부연합과의 조직적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한편 대학생봉사단은 성남 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야학 등 봉사활동을 한 것으로 일명 ‘대봉 그룹’이라 불렸다. 1970년 대 말과 1980년대 초 성남시에는 경원대와 신구전문대가 있었으나 거의 조직화되지 못했고 1979년에 설치 승인이 난 외대 용인캠퍼스도 1984년 가서야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성남에서 활동하는 대학생은 주로 서울 소재 대학의 학생들이었다(이해학 구술 2012/06/19). 대봉 그룹은 나중에 ‘한울’로 이름을 바꾸는데 이 역시 경기동부연합과는 관련이 없다.
언론에서 경기동부연합의 조직적 기원으로 본 터사랑청년회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 단체는 1984년 재탄생한 성남시대학생연합회(성대련)으로 볼 수 있는데 1980년부터 활동하고 있던 같은 이름의 성대련이 성남시 학우회연합(성우연)과 합쳐져 생겨난 단체이다. 성대련은 1987년 성남시 학우회연합(성학연)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90년 터사랑청년회가 되었다.
1980년의 성대련이 결성된 이유는 ‘5월 광주’였다. 성대련 초기부터 1982년 초 입대 직전까지 활동했던 서울대 79학번 이수열은 “1980년 5월 휴교령으로 서울의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이다가 자연스럽게 단체가 결성됐다. 지역 봉사활동을 하면서 세미나를 통해 사회의식을 키워나가는 게 목적이었다. 광주 문제는 주로 내부에서 논의되었으며 직접 홍보 활동에 나서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기억했다(이수열 구술 2013/03/19). “이전까지 YMCA 등 종교단체의 보호막을 활용해 활동했던 것에 비하면 성대련은 새로운 형태”였고, 뒤로 가면서 광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더욱 많은 학생들이 결합했다(박우형 구술 2012/11/03).
성남시는 학생들이 홍보에 나서기 전 매우 이른 시기부터 광주 학살의 여파가 일고 있었다. 1980년 6월 9일 서울의 신촌네거리에서 ‘광주시민항쟁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유서를 남기고 노동자 김종태가 분신했다. 1971년 전태일 이후 첫 번째 분신이었으며 5월 30일 서강대 학생 김의기의 투신에 이어 두 번째로 광주 학살에 항의한 자결이었다.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산업화에 의한 농촌에 대한 차별, 영남에 비해 호남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 무허가 판잣집에 거주하는 도시빈민에 대한 사회적 배제의 결과가 한 데로 모여진 것이 바로 광주대단지였다. 그리고 8․ 10 사건에 따른 또 한 번의 차별과 배제로 인해 탄생한 세대가 1980년 ‘5월 광주’를 만나면서 생겨난 조직이 성대련이다. 대학가에 퍼졌던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론을 감안하면 이후 성남시의 청년학생운동이 NL쪽으로 기우는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성대련이 결성된 1980년부터 1983년 하반기까지는 학생운동이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시기였다. 변혁운동의 전망을 모색하면서 반제민족주의혁명, 반파쇼민주주의혁명, 민중해방혁명, 북한과의 통일적 혁명이 강조되었고,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 의혹은 자연스럽게 반미 자주화 투쟁으로 이어졌다. 1980년 광주미문화원 방화부터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와 강원대 학생들의 성조기 소각 사건 등 일련의 반미자주화투쟁이 일어나 향후 자주화운동이 전면화, 대중화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조희연 2001, 246-250).
1982년까지 학생운동권 내 선도 투쟁에 그쳤던 반미자주화 투쟁은 1983년 12월 학원자율화조치 이후 점차 대중적인 기반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하는데 이즈음 성대련도 질적 변화를 겪는다. 당시 각 대학에는 지역 학우회(또는 향우회)들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는데, 서울 소재 여러 대학의 성남시학우회들이 모여 연합체육대회를 하는 과정에서 1984년 성남시학우회연합(성우연)이 결성됐다. 정권 차원에서 대학생들의 야학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던 때인데 이 과정에서 성대련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1984년 성우연은 성대련과 통합하는데 명칭은 성대련을 그대로 사용했다. 1984년의 성대련과 이전의 성대련은 조직화의 정도와 대표성 측면에서 크게 달랐다. 1980년 만들어진 성대련이 단순히 성남 출신 대학생들로만 구성되었다면 1984년의 성대련은 각 대학 학우회의 대표성을 확보한 조직이었다. 즉 각 대학 학우회를 통해 성남시 출신 대학 생들이 조직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조직의 성격이 달라진 만큼 활동도 크게 달라졌다. 이전까지 학술문화활동에 치중했다면 이때부터는 가두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각 대학의 학우회가 모였기 때문에 상당한 인원 동원이 가능한 구조였다(박우형 구술 2012/11/03).
1984년부터 현재의 경기동부연합 관련 인맥이 재탄생한 성대련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회장은 서울대 성남시학우회 회장으로 있던 박우형(서울대 83학번)이었는데 1985년 4월 12일 상대원시장 앞 연합시위를 주동한 책임으로 수배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성대련을 이끌어나갔다
한편 이 시기 성남에서는 김종태, 한희철에 이은 또 한 명의 ‘열사’가 탄생했다. 1985년 9월 17일 경원대 2년생 송광영이 교내 집회 중 옥내에서 미리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여 운동장으로 뛰어나오며 “학원안정법 반대”와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친 뒤 분신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257-262). 1986년 4월 대학생 분신으로 주목 받았던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의 분신보다 앞선 일이었다.
성대련이 성남시학우회연합(성학연)으로 전화한 1987년 6월의 성남시는 어느 도시보다 뜨거웠다. 그때까지 성남시에는 8․ 10 사건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1973년 설립된 주민교회와, 가톨릭계의 노동자쉼터 ‘만남의 집’(소피아 수녀, 1978년 설립), 산자교회(김해성 목사, 1986년 설립) 등이 운동권의 피난처이자 산실 역할을 하고 있었고 세 개의 공단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과 성대련 중심의 학생운동, 빈민운동이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성남시의 6월항쟁은 성남지역 민주사회발전연구회(1985년 창립)가 확대 개편해 1987년 3월 결성된 성남민주화연합을 중심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성남지역본부가 결성되고, 여기에 전대협 산하 용성총련 학생들이 결합하여 진행되었다. 당시 성남시 시위를 주도한 주요 대학 총 학생회장은 허성욱(외대 용인캠퍼스), 김태년(경희대 수원국제캠퍼스), 이승호(경원대) 등이었다. 6월항쟁 첫 날인 6월 10일 시민대회에는 3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참여했고, 17일부터 20일까지의 격렬한 시위에 이어, 26일 평화대행진에도 1만여 시민들이 참여했다. 한편 이 시기에 성대련을 중심으로 성남의 경원대, 신구대와 1980년대 초․ 중반 용인 지역에 자리를 잡은 외대와 경희대를 포함하는 캠퍼스 연락체계가 만들어졌다. 서울 소재 대학의 학우회를 기반으로 한 지역학생조직이 지역 연고 캠퍼스를 단위로 하는 학생운동으로 바뀌게 되는 것인데 6월항쟁을 거치면서 확고히 자리잡는다(성남6월항쟁2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2007, 18-33).
성대련은 6월항쟁 기간 주로 국본에 결합해 활동했으며, 박우형은 정책팀 쪽의 고문을 맡았다(박우형 구술 2012/11/03). 1985년 박우형을 포함한 임원진이 구속되거나 수배되는 사태를 맞아 일시 약화되었다가 1987년 6월 26일 학우회 연합의 성격을 강화해 성남시학우회연합(성학연)으로 개칭하여 경원대에서 발족식을 가졌다. 이때부터 학우회 단위에서 개별 동아리로 활동 단위가 옮겨지게 되는데 1989년에는 성남 지역의 직장인, 즉 대학 안 간 청년들까지 포괄하면서 1989년 터사랑청년학우회 로 바뀌었고, 1990년 현재의 이름인 터사랑청년회(이하 터사랑)로 개칭 했다(이상훈 구술 2012/07/06).
6월항쟁 이후 대중운동이 발전하면서 전국적으로 대중적인 청년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활동가 조직에서 대중단체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1988년 9월 나라사랑청년회를 필두로 부산, 광주, 대전 등에서 청년단체들이 결성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청년단체들의 연대가 모색되었다. 성남에서는 1988년 1월 성남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성학연이 터사랑청년학우회로 명칭을 바꾸기 1년 전의 일이 다. 터사랑이 지역 출신 청년들의 모임이라면 성남청년회는 두 가지 흐름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하나는 평화민주당 외곽 조직인 평화민주통일 연구회(평민연) 쪽이고 다른 하나는 터사랑과 같은 지역 청년들의 결합이었는데 이 때문에 성남청년회는 터사랑에 비해 민주당 정서가 강했다. 터사랑은 수정구를, 성남청년회는 중원구를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그밖의 청년단체로는 이해학 목사의 주민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성남EYC가 있었다(정형주 구술 2013/02/27).
광주대단지 기억을 공유하는 성남 출신들의 모임이 성대련과 이후 터사랑 및 성남청년회였다면 6월항쟁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억을 계승시키면서 청년회 조직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6월항쟁을 전후해 성남시 인근 대학의 학생들은 재학시에는 노학연대투쟁에 참여하면서 성남시와 관계를 맺었다가 졸업 후에는 성남공단으로 취업하거나 청년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태년과 정형주를 들 수 있다. 김태년은 터사랑청년회에 결합했으며, 임수경 평양방북 건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나온 정형주도 “노동현장으로 가려던 당초 계획을 접고” 1989년 중순 성남청년회로 결합했다. 김태년은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탈퇴했다. 이와 함께 성학연 인맥을 통해서도 학생들이 유입 되었는데 4․ 11 총선에서 정형주 대신 중원구에 출마해 당선된 김미희 국회의원이 대표적이다. 서울대 84학번인 김미희는 졸업 후 터사랑청년회에 결합해 활동했다. 언론보도에는 용성총련을 경기동부연합의 뿌리로 지목했지만 용성총련을 비롯해 외지 학생들이 성남시를 발판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기존에 이미 활동하고 있던 청년회에 결합하면서부터였던 것이다.
1988년 대학 재학 시절 야학 활동차 성남에 왔던 김미희는 1992년 졸업 후 성남에 정착하였다. 정형주가 성남의 ‘서민성’에 이끌렸다면 김미희는 ‘운동성’에 매력을 느꼈다. 대단지 사건을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집단적으로 항거 … 도시의 운명 자체를 시민들이 바꿔낸 것”이라고 평가하는 김미희는 광주대단지 초기 이주해온 ‘진짜’ 성남 사람인 백승우 (통합진보당 사무부총장)를 만나 결혼했다.
1991년 성남시의 청년단체들은 성남청년단체연합을 결성했다. 전국연합 산하 성남연합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청년 부문으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1991년 출범한 전국연합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합법정당 논쟁’으로 이부영을 비롯한 일부 간부진이 사퇴하고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으로 조직역량이 약화되자, 침체되었던 재야운동세력들이 다시 모여 1991년 출범한 단체이다. 해방 이후 최대의 연합조직이라 할 수 있는 전국연합은 이전의 민통련이나 전민련과는 달리 대중조직이 주도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이창언 2011, 24).
전국연합은 1994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범민련) 문제로 극심한 내분을 겪게 되는데 일명 ‘새통체’ 논쟁으로도 불린다. 1993년 출범한 문민정부가 화해․ 협력을 통한 점진적 통일로 나아가는 대북정책을 표방하는 가운데 문익환 의장은 범민련의 해체와 ‘새로운 통일운동단체’ 결성을 제안했다. 1993년 12월 북한의 공개적인 반대 후 한총련을 중심으로 하는 범민련 사수론과 민족회의 우호론이 맞서게 되지만, 새통체 건 설은 1994년 7월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족회의)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당시 성남연합은 새통체 지지는 아니었지만 통일운동의 대중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민족회의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전국연합의 직접적 분화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세력화에 대한 입장차에서 왔다. 1997년 6월 14일 전국연합 임시대의원 대회에서는 ‘우리’ 후보 방침을 결정하였으나 전국연합의 또 다른 자주계열(한총련 주류, 범민련 노선을 지지하는 지역연합, 전선강화론의 입장에 선 자주파)은 민주대연합에 입각한 대선 방침을 고수하면서 대의원 대회 방침을 거부하고 비판적 지지론으로 선회했다. 정치세력화에 반대한 지역연합은 광주전남연합, 서울연합, 대구경북, 인천연합 등이다. 성남연합은 노동운동 기반이 강한 울산연합과 함께 정당운동에 가장 빨리 결합했고 이것은 나중에 민노당에도 가장 먼저 착근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이후 범민련 초기 주도자인 문익환, 이창복, 조성우 등은 전국연합을 이탈해 정치권으로 이동 했고, 민청협의 후신으로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며 전국연합 내 담론을 선도했던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는 대선 패배 후 이탈하여 한국 청년연합회(KYC)를 설립했다. 전국연합 내 상층 지도부는 정치권으로, 하층은 시민운동으로 가면서 변혁운동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 (홍진표 ․ 이광백 ․ 신주현 2010, 21-24; 이창언 2011, 41; 정영태 2012, 60-77).
이 시기 전국연합 중앙의 균열과 맥을 같이 해 성남연합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1992년 총선 때 성남연합은 민주당 후보인 이윤수와 조성준을 각각 수정구와 중원구의 범민주단일후보로 지원하여 당선에 기여했다. 1993년에는 이상락을 성남시의원 보궐선거에 시민단체 독자후보로 지원해 당선됐다. 그런데 1995년부터는 성남연합 내 입장이 갈리기 시작했다. 이상락 성남시의원이 당선 1년 만에 제명당하고 1995년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데 대해 민주당 입당과 무소속을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이 일로 김태년과 다수 회원들이 터사랑에서 탈퇴했고, 빈민 부문, 종교(기독교) 부문도 성남연합에서 탈퇴했다. 터사랑과 성남청년회에서 탈퇴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성남청년광장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러다가 KYC에 결합하여 성남KYC를 설립했다(이상훈 구술 2012/07/06). 전국연합이 “민족해방운동 계열의 반제통일전선 건설 투쟁의 산물이자 추동엔진(이 창언 2011, 6)”이라고 할 수 있었던 만큼 민주당 선호의 시민운동 세력이 떨어져나간 이후부터 성남연합은 NL계에서도 좀 더 급진적인 경향의 인물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문민정부의 등장은 통일운동권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성남시 청년 회의 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운동가 중심의 활동을 대중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터사랑을 시작으로, 성남청년회, 그리고 1993년에 생겨난 분당 청년회에서 청년학교를 개설했다. 기존에 동아리 중심으로 운영하던 분과들을 대중 프로그램으로 전환하여 문학교실, 영화교실, 풍물교실, 노래교실, 역사교실, 등산교실 등을 운영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1996 년에는 세 단체에서 별개로 운영하던 것을 하나로 합쳐 성남청년대학을 설립했다. 성남청년대학은 2009년 4월 해체될 때까지 방과후 무료공부방인 푸른학교(1998년 개설)와 함께 민노당 성남시당, 즉 경기동부연합의 가장 큰 조직 기반이 되었다(이상훈 구술 2012/07/06). 비례대표 사태 당시 통진당 대변인이었던 우위영(1993년 터사랑 가입)은 “청년학교와 성남청년대학을 통해 한 해 수백에서 천 명이 넘은 사람들을 만난 것이 조직 자산이 되어 이후 민노당 창당과 원내진출의 기반이 되었다(민중의 소리 2010/02/19)”고 평가했다.
공고화된 조직을 기반으로 1996년부터는 소위 경기동부연합의 ‘전설’을 만들기 시작했다. 북한에 수재가 났을 때 당시 성남연합에서 가장 먼저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전개했다. 회원 50여 명이 북한에 쌀보내기운동을 전개, 3개월 동안 무려 1만 5천 가구를 방문해 5천5백 가구로부터 220가마의 쌀을 모았다(민중의소리 2003/11/12). 제도권에서 방기하고 있는 통일에의 꿈을 향한 그들만의 방식이자 의지의 표출이었다. 이듬해인 1997년에는 북녘동포돕기 범국민운동이 벌어졌는데 이즈음 성남연합은 용인․ 광주․ 하남․ 이천․ 여주를 포괄하여 경기동부연합으로 전환했다. 당시 성금 출연자 전체 명단이 한겨레 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총 5회에 걸친 전국연합 게재분 중 3회가 경기동부연합 명단이었고 총 597명이 이름을 올렸다. (한겨레신문 1997/05/06; 05/07; 07/29; 07/30; 07/31;10/01). 1998년 IMF 이후에는 실업자대책위원회15)를 구성해 쌀모으기 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호별 방문을 통해 실태조사를 하고 운영비를 마련했다. 경기동부연합의 이 같은 노력은 향후 선거에서 높은 득표율의 기반이 되었다.
경기동부연합의 전설적 활동은 공동체적 생활에 의해 밑받침되었다. “합숙하면서 새벽에 함께 기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또한 개인 소유가 없었다. 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오면 공동체에 내놓았다(최홍재 인터뷰, 송홍근 2012, 42).” 생활을 위해서는 신문배달, 우유배달, 세차를 주로 했다. 밤늦게까지 퇴근하고 온 회원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새벽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정형주 구술 2013/02/27).
“6명~7명 정도의 핵심간부들은 상근활동을 했기 때문에 새벽에 신문 배달이나 우유배달을 해 생계비와 활동비를 충당했습니다. 대충 하루 일과는 새벽 3시~4시 사이에 시작되었고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마무리 될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1년에 절반은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을 자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습니다(우위영 인터뷰, 민중의소리 2010/02/19).”
자주․ 민주․ 통일 운동을 함께하는 실천가의 삶에 사적 욕망은 허용 될 수 없었다. 경기동부연합은 운동 기풍(氣風)이 굉장히 강해 마치 묵가(墨家) 집단과도 같았다(최홍재 인터뷰, 송홍근 2012, 43). PD에 비해 NL이 집단문화가 강하고 규율도 엄격하지만 경기동부연합은 다른 지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거의 군대를 방불케 하는 집단성과 일체감은 광주 민중항쟁의 기억으로 단련된 남총련(전남총학생회연합)에 견줄 만했다. 경기동부연합은 개인의 삶을 철저하게 배제한 공동체적 삶 속에서 자주․ 민주․ 통일의 꿈과 함께 그들이 공유하는 기억의 내용과 시간을 더욱 강화시켜 나간 것이다.
한편 1989년부터 범민족대회 개최 등으로 통일운동이 무르익어가고 전국연합의 결성으로 NL계가 총결집한 1990년 초․ 중반은 많은 학생 열사가 탄생하는 시기였다. 1991년 명지대 강경대 학생 타살 이후의 분신 정국은 13명의 분신자를 포함해 모두 25명의 열사를 낳았다. 이 중 성남 관련 인물은 4명으로 경원대생 천세용이 분신했고, 유서대필사건과 관련된 김기설도 성남민청련 활동 중 분신했다. 그리고 외대 용인의 남현진이 군에서 의문사했고 노동자 윤용하가 분신했다. 1992년부터는 학생운동 관련 대학생 자살자 수가 1995년 1명, 1996년 5명, 1997년 1명으로, 7명 중 4명이 용성총련 소속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자살자 수를 지역 내 운동 분위기와 곧장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다만 “투쟁의 빈도가 높은 것과 상관있을 수도 있(정형주 구술 2013/02/27)”고, 열악한 환경에서 비롯된 심리적 열패감이 극단적 수단을 택하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추모제 등 기억의 의례는 집단의 일체감과 유대를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뒤르켐의 말처럼 “한 장소에 모인다는 사실 자체”에서 ‘집합적 열광’이 연출되며, 슬픔 속에서의 소통은 공동체의 사회적 생명력을 높이기 때문이다(김종엽 1998, 297-301). 성남시에서는 1980년 김종태의 분신을 시작으로 모두 17명이 자결하거나 의문사했다. 매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추모제는 경기동부연합의 집단성과 일체감을 더욱 강화시켰을 것이다.
- 민족의 자주 민주 통일로 힘차게 진군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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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리 글인거같은데 임미리는 기본적으로 경기동부를 안좋게 보므로 적당히 걸러들어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