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련의 홈페이지에서 찾은 것인데 이걸 보고 고오증 겜이디나는 생각도 드는 한편 퍼오는 바 이다.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임필수
1. 아프간 문제의 개요
1978년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이 주도한 ‘2월 혁명’과 1979년 10월 소련의 군사개입이 이루어진 후, 미국은 지역 동맹국 파키스탄과 함께 중앙아시아에서 반소전선을 담당할 전사들을 육성한다. 미국과 파키스탄은 2월 혁명으로 축출된 다우드 정권의 인사들이 아니라, 오히려 다우드 정권과 대립 관계에 있었으며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아프간 내부 이슬람 세력을 저항 세력의 주축으로 선택하였다. 미국-파키스탄의 중앙아시아 전략과 맞아떨어지고,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을 택한 것이었다. 미국과 파키스탄은 아프간-파키스탄 접경 지역인 페사와르에 이슬람 학교와 군사훈련 캠프의 건설을 지원하면서, 이슬람 전사를 육성하기 위한 토대를 창출하였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파키스탄 군사정보국(ISI, Inter-Service Institute)은 긴밀한 협조관계를 맺었고, 미국의 비밀지원의 창구역할을 했다. 미국이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감추면서 ISI를 간판으로 내세운 것은 이슬람 세력이 치루는 ‘지하드’의 궁극적인 목적이 소련을 붕괴하는 것이라는 점을 은폐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미국은 반소 저항전쟁을 수행할 7개 단위의 이슬람세력을 창출하였다. 이는 아프간 여러 지역에 퍼져 있는 집단들간의 부족 또는 종족적 차이, 종교적 차이 때문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슬람세력 각각을 분할, 통제하려는 전략적 의도 때문이었다. 미국은 각각의 세력들이 경쟁적인 관계에 놓여, 서로 의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지원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만들려고 했다. 달리 말해, 서로간에는 적대적이며 미국에게는 충성하는 분파들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점차 각 분파들은 전투에서 전과를 얻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만들고자 무자비한 전술에 의존하거나 심지어 내부의 무장 투쟁에 빠져들었다. 1989년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후, 미국과 파키스탄은 나지불라 정권을 대체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슬람 무장세력의 심각한 내분으로 인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무장세력은 각각 준정부 기구급의 체계와 재정, 군대를 갖춘 독립적 조직이었으며, 경쟁관계 속에서 형성된 원한과 상처는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각각의 조직들은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의 재정 및 군사 지원을 받고 있었고, 아프간 주변국 각각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대립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990년대 아프간 내전은 실상 국제전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 시기 동안 미국의 태도는 사투 과정에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진행경과를 주시하며 최종 승자가 나타나기를 관망하는 쪽에 가까웠다. 한편 1994년 부상한 탈레반 세력의 기원은 1980년대 반소전쟁의 지도 세력과는 다소 이질적이다. 탈레반은 무자헤딘의 내분과 부패를 바라보며 이슬람국가를 건설할 대체 세력이 되고자 하였다. 탈레반이 1996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미국은 합법 정부로 승인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고, 아프간 내전도 마무리될 기미가 완연해졌다. 1998년 클린턴 정부가 케냐와 탄자니아 미국대사관 폭파의 주모자 빈 라덴이 탈레반 정권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발표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한 후에도 약 2주일 동안 즉각적인 공격을 명령하지 않았고, 이 기간 동안 빈 라덴의 인도 문제를 두고 탈레반과 비밀협상을 벌였다. 이 사실은 미국이 탈레반 정권과 빈 라덴을 분리하여 처리하길 원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탈레반이 빈 라덴의 배후가 아니라는 점을 가리킨다. 미국은 그 사건이 사우디-시리아-이라크-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척결하고 중동 내부의 반미 블럭을 형성한다는 목적으로 뭉친 특정 동맹세력이 벌인 행동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동맹세력의 비밀군사조직의 지도자 격인 빈 라덴을 일차적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결국 붕괴시켰고, 비밀리에 또는 공공연하게 미국에 반기를 든 세력 및 국가를 상대로 확전을 모색하고 있다. 이 전쟁 과정에서 아프간은 또다시 민족적․국가적 통합력을 창출할 기회를 잃었고, 과거 내전 당사자들을 주축으로 다시 모인 임시정부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2. 미국 개입의 전사(前史)
1979년, 미국 중앙정보국(CIA) 역사상 가장 거대한 비밀작전으로 꼽히는 아프간 이슬람 세력에 대한 군사지원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1978년 4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이 다우드 정권을 타도하고자 일으킨 쿠데타에 대한 지지세력의 취약성과 연쇄적인 무장 충돌이 뿌린 세력간의 원한은 미국이 비밀작전을 수립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 먼저 1960~70년대 아프간의 정치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자. 19세기 영국과 러시아가 경쟁적으로 벌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야 했던 아프간에 1919년 두라니 왕조의 전통을 잇는 새로운 왕국이 수립된다. 역사적으로 아프간 지역을 지배했던 파쉬툰족 중에서 두라니족과 길자이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왕국이었다. (이들 모두 선지자 모하메드의 동료들을 기원으로 삼는다.) 1933년에 왕위에 오른 모하메드 자이르 샤는 1964년에 이르러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을 단행한다. 1960~70년대 제3세계 광범위한 지역에서 빈곤하며 무능력한 기존 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커져갈 시점에서 아프간 왕정이 취한 대응이었다. 정치체계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는 방안으로 정치정당을 허용하고 상하양원제 의회를 창설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자이르 샤 국왕은 헌법 초안을 마련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산재한 부족장들을 모아 부족평의회(loya jirga)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왕이 추진한 개혁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왕권을 안정화하는게 중심이었다. 의회는 단지 자문 기구일 뿐이었고, 정당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한 파쉬툰인들이 상하원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선거구를 확정하였다. 또한 PDPA와 같이 체제 비판적인 정당을 불법화하였다. 국왕이 주도한 점진적인 개혁에 즈음하여, 아프간 수도의 카불대학교에 운집한 지식인 그룹들도 뚜렷한 정치이념을 내걸며 각각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65년 맑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PDPA가 창립되었고, 1966년에는 모택동의 ‘신민주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이후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세례를 받게 될 ‘진보청년기구’(PYO)가 결성되었다. 1967년 PDPA는 파르참(깃발)과 할크(인민) 두 분파로 분리되었고, 1977년 재결합할 때까지 각자의 길을 걷는다. (두 당파 모두 파쉬툰족이 지배적이었으나, 파르참은 대부분 도시를 기반으로 하며 페르시아어를 사용한 반면 할크는 주로 농촌 출신에 파쉬툰어를 사용하였다. 할크는 파르참에 비해 보다 급진적인 사회 개혁 및 농업 개혁을 옹호했다.) 또한 초기의 PYO는 카불 지역에서 PDPA에 비해 규모가 다소 큰 편이었지만, 투쟁노선을 둘러싼 논쟁을 거쳐, 4월혁명 이후 ‘수정주의’-‘사회제국주의’(소련-아프간공산당정권)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무장세력들과의 이중의 전선 속에서 급속히 쇠락하여, 현재에는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초기 활동에 관한 자료는, 그 후신 조직인 ‘아프가니스탄 해방기구’(ALO)의 영문 홈페이지(www.a-l-o.org)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PDPA가 감행한 ‘2월혁명’(혹은 군사쿠데타?)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본 글의 주제가 아니다. 아직 필자로서는 아프간의 역사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민족민주혁명’이었는지, 아니면 소련 ‘사회제국주의’의 군사-모험주의적 시도의 발로였는지 냉정히 판단할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한편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무능한 지배엘리트와 서양의 영향력을 강력히 거부하는 이슬람 조직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20년대 이집트의 ‘이크완 알 무슬림’(무슬림 형제단) 이후 정형화된 명칭이었던 ‘이크완’(형제)이라고 자칭했던 이들 역시 PDPA와 같이 대부분 카불대학교의 학생, 교원이었다. '자미아티 이슬라미'(이슬람협회)라는 조직이 최초로 결성되었는데, 카불대학의 여러 교수들도 참여하였다. 1960년대 떠오른 맑스주의 세력과 이슬람 세력은 곧 강한 대립양상에 처하는데, 이는 무장충돌로까지 번졌다. 1976~77년 자미아티 이슬라미에서 ‘히즈비 이슬라미‘(이슬람당)가 분리된다. 이를 주도한 굴부딘 헤크마티야르는 1960년대 카불대학교의 공과대학 학생이었다. 당시 그는 머리에 베일을 쓰지 않은 소녀의 얼굴에 산을 뿌린 행동으로 악명을 얻었으며, 1972년에는 PYO의 활동가를 살인한 혐의로 투옥된다. 그는 1973년 다우드가 권력을 장악한 후 석방되어 파키스탄으로 도피하여 파키스탄 군정보국(ISI)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수니파 파쉬툰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히즈비 이슬라미는 1980년대 이루어진 CIA와 ISI의 군사지원의 알짜 몫을 챙긴다. 하지만 입헌군주제의 도입이라는 부분적인 정치개혁으로 아프간인의 고달픈 삶이 변화지는 않았다. 1971~72년 식량위기와 경제적 난국은 정치적 불만의 대중적 표출로 드러났다. 농민들 가운데 식량폭동이 일어났고, 노동쟁의와 학생들의 수업거부도 터져 나왔다. 이처럼 대중들의 불만이 점증하는 가운데, 자이르 샤 국왕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왕족들을 견제하려는 조치를 구상하였다. 즉 새로운 법을 통해 왕족이 의회나 내각에서 활동하는 것을 금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에 맞서, 국왕의 사촌이자 1953~63년 수상이었던 다우드는 1973년 무혈혁명을 통해 국왕의 축출로 화답했다. 그는 이제 아프간이 군주제가 아닌 공화국이며 자신이 대통령이라고 선포하였다. 이때 다우드가 연합한 세력이 바로 바브락 카말이 이끄는 PDPA의 파르참 세력이었고, 이들은 새로운 공화국 정부의 초기 요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우드가 파르참 세력에게 취한 태도는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는 일단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파르참 세력과 소련을 멀리하고, 이란의 샤 왕국에 접근하였다. 다우드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여 경제원조를 간청하고, 이란을 본딴 비밀경찰의 창설을 계획했다. 또한 이슬람 조직들은 다우드 정부의 압력을 받았고, 최고 지도자들은 파키스탄으로 망명하였다. 다우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에 가장 민감한 외교분쟁 소재인 ‘파쉬투니스탄‘(Pashtunistan) 즉 파쉬툰 영토 문제를 내걸면서 파키스탄과 갈등을 빚는다. 파쉬툰족은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18세기 후반 이후로 아프가니스탄의 전통적인 지배자였으며, 파쉬툰족이 사는 모든 지역은 아프가니스탄 왕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파쉬툰 영토의 동부 지역이 영국 지배하의 인도에 합병되었고, 그 후에는 파키스탄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다우드는 ’민족자결권‘ 또는 ’실지회복‘을 외치면서 이 문제를 자신의 외교정책의 전면에 부각하였고, 따라서 파키스탄과 계속적인 불화를 겪게 된다. 파키스탄 역시 같은 이유로 다우드 반대세력이자 파쉬투니스탄 문제를 고집하지 않는 이슬람 지도자들과 손을 잡는다. 또한 1950년대 후반 소련이 다우드의 파쉬투니스탄 정책을 지지한 것은, 다우드가 소련에 접근한 배경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 문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이처럼 아프간의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점증하는 가운데, 1977년 다우드는 부족평의회를 소집하여 일당체계에 기반한 새로운 헌법을 선포하였다. 1978년 4월 PDPA의 파르참과 할크는 재통합하였고, 이른바 ‘2월 혁명’(Saur Revolution, 음력 2월혁명)을 일으킨다. 아프간 인민민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고, 할크의 누르 모하메드 타라키가 대통령 겸 수상을, 파르참의 카말이 부수상을 맡았다. 그러나 군사 쿠데타가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았고, 소련을 제외하고 내부의 지지세력은 확고하지 않았다. 할크가 권력 상층을 장악한 후, 새로운 정권이 추진한 급진적인 농업개혁(토지개혁)에 반발도 컸다. PDPA는 이전의 지배계급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고(쿠데타 과정에서 다우드와 그의 일족이 모두 죽었다), 정치가, 종교지도자 뿐만 아니라 학생, 선생을 비롯한 이슬람 지식인을 체포하였고, 쉬아파 하자라족과의 대규모 충돌도 발생했다. 또한 PDPA 내부의 갈등도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할크파가 권력의 상층부를 장악하면서 카말과 파르참파의 인사들이 추방되거나 투옥되었다. 할크파 내부의 노선 갈등 속에서, 타라키 대통령이 소련의 묵인 속에서 권력 이인자였던 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려던 계획이 틀어져 오히려 자신이 목숨을 잃는 사건도 발생한다. 아민은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아프간의 무력충돌 과정에서 자체 군사력이 해체되면서 위기에 처한다. 1979년 10월 24일 소련 공수부대가 카불에 진입하였고, 10월 27일 소련의 탱크와 함께 카불로 귀환한 카말은 “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선포한다. 그리고 같은 날 아민이 암살을 당한다. 소련이 가시적인 군사개입을 감행하면서, 아프간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활기를 띠었다. 파키스탄과 미국이 파키스탄 영내의 접경지역인 페사와르에 자리잡은 이슬람 조직 및 이슬람정당에 대한 지원을 점차 확대했기 때문이다. 카터 정권하의 미국이 초기에 행한 지원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1981년 레이건 정권 이후 급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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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디씨에 강의녹음파일 어케 올리냐? - dc App
하얀색 화면에 파일붙이고 영상만든거 유튜브에 올리는게 편하지 않을까요 - 민족의 자주 민주 통일로 힘차게 진군하여라
시도해보겠습니다 - dc App
http://a-l-o.maoism.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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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ALO의 홈피이다. - dc App
뭔가 저거보니까 “이슬람 전사의 탄생”리뷰하고 싶어진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