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 1794~1848년 이중의 노예제 폐지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노예제 폐지는 이것이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났다는 데 그 특수성이 있다. 1차 폐지는 생도맹그(아이티)의 노예반란이 원인이 되어 1794년에 국민공회에서 결정되었으나, 1802년 나폴레옹 치하에서 복원되었다. 최종적으로 노예제 폐지가 확정된 것은 왕정이 몰락하고 제2공화국이 성립된 1848년이었다. 게다가 프랑스 사례는 구미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정신의 위대함 또는 소유자들의 소심한 계산이 아닌, 노예들 스스로가 조직한 반란과 이에 따른 새로운 반란에 대한 공포가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낸 주요 역사적 요인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1794년 1차 폐지에서 반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는 근대사에 나타난 최초의 위대한 노예제 폐지였고, 아이티 노예들이 무력으로 자신들의 해방을 선취하고 나라의 독립 선포를 준비했다는 사실의 직접적인 결과다.
반란의 결정적 역할은 영국 1833년 법과 관련해서도 전적으로 명확하다. 이 법은 1831년 크리스마스에 자메이카에서 일어난 대규모 노예반란 이후 두 해가 채 지나지 않아 채택되었다. 영국 언론에 담긴 이 반란의 피로 물든 반향이 영국 여론에 강렬한 인상을 심었고, 1832~1833년 논쟁에서 노예제 폐지론자들을 추동했으며, 자메이카나 바베이도스에서 언젠가 생도맹그와 같은 운명을 겪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재정적으로 후한 보상을 받아들이는 게 더 현명하리라고 소유자들을 설득하는 데 기여했다. 집단 처형으로 막을 내린 1831년 자메이카 반란 자체는 1815년에영국령 기아나에서 일어났던 반란과 1802년 과들루프섬의 대규모 반란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 과들루프 반란은 인구의 10%에 달하는 노예 약 1만명의 처형과 추방으로 막을 내렸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 당국은 섬의 인구를 늘리고 설탕 플랜테이션의 활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1810~1820년 사이에 잠정적으로 노예무역을 재개하게 되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프랑스령 노예제 섬들은 1789년 프랑스혁명 전야에 구미 세계 안에서 노예들이 최고로 집중되어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1780~1790년 무렵에, 앤틸리스제도와 인도양의 프랑스 플랜테이션에는 70만 명 정도의 노예가 모여 있었고(당시 프랑스 본토 인구 2800만명의 약 3%에 달할 정도였다), 반면 영국 속령들에는 대략 60만 명이,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에는 50만 명이 있었다. 프랑스령 앤틸리스제도에서, 노예들이 주로 집중되어 있던 곳은 마르티니크섬, 과들루프섬, 특히 생도맹그 이곳에서만 45만 명 이상의 노예가 집계되었다였다. 1804년에 독립을 선포하면서 오래전 아메리카인디오식 지명을 되살려 아이티로 개명한 생도맹그는 18세기 말 프랑스 식민지 중의 보배로, 주로 설탕 ·커피·면화 생산 덕에 식민지 중에서 가장 번창하고 가장 수익이 많이 나는 곳이었다. 생도맹그는 1626년부터 프랑스 식민지였는데 1492년에 콜럼버스가 정박했던 히스파니올라라는 큰 섬의 서쪽 지역이며, 동쪽 지역은 옆의 큰 섬 (노예제가 1886년까지 지속된) 쿠바와 마찬가지로 에스파냐 식민지였다(후일 도미니카공화국이 된다).
인도양의 프랑스령 노예제 섬 두 곳은 일드프랑스(18세기에 가장 중요한 곳인 이 섬은 1810년에 영국 군인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1814년에 나폴레옹의 패배로 모리셔스라는 이름의 영국 속령이 되었다)와 일부르봉이었다. 일부르봉은 1815년에도 여전히 프랑스령이었고 프랑스혁명기에 레위니옹으로 개명되었다. 전체를 보자면, 이 두 섬의 플랜테이션에는 1780~1790년 무렵에 거의 10만 명의 노예가 있었고, 프랑스령 앤틸리스 제도에는 60만 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그중 45만 명 이상이 생도맹그에 있었다.
생도맹그가 진정 노예들의 섬이었다는 사실을 또한 강조해야 한다. 노예의 비율이 1780년대 말에 생도맹그 총인구의 90%에 달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메스티소·물라토 · 유색인종 자유인을 포함한다면 심지어 95%다). 1780~1830년 기간에 영국령 앤틸리스제도와 프랑스령 앤틸리스제도의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수준이 확인된다. 자메이카 84%, 바베이도스 80%, 마르티니크 85%, 과들루프 86%, 이것은 대서양 노예제사회의 역사에서, 더 일반적으로는 노예제사회의 세계사에서 전혀 관찰된 적이 없는 가장 극단적인 수준이다(도표 6.1 참조). 비교하자면, 같은 시기에 미국 남부 또는 브라질에서는 노예들이 인구의 30%에서 50%를 나타내는데, 가용 자료들에 따르면 이는 고대 아테네 또는 로마와 유사한 비율이다. 영국령 앤틸리스제도의 섬들과 프랑스령 앤틸리스제도의 섬들은 18세기와 19세기 초에 노예가 인구의 거의 전부를 구성하는 사회들에 대한 가장 잘 실증된 역사적 사례를 보여준다.
노예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80% 또는 90%에 달했을 때는 기존의 억압기제가 얼마나 잔혹한가와 무관하게 반란의 위험이 매우 높아진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아이티 사례는 특별히 극단적이라서, 노예 수가 매우 빠른 리듬으로 증가했고, 다른 섬들의 노예 수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1700년 무렵, [아이티섬의 총인구는 대략 3만 명이고, 절반 조금 넘는 수가 노예들이다. 1750년대 초에 아이티에서는 노예 약 12만 명(총 인구의 77%), 백인 2만 5000명(19%), 메스티소와 유색인종 자유인 5000명(4%)으로 집계되었다. 1780년대 말, 이 식민지에는 노예 47만 명(총인구의 90%), 백인 2만 8000명(5%), 메스티소·물라토·유색인종 자유인 2만5000명(5%)이 있었다(도표 6.2 참조).
1789년 전야에 대략 4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매년 포르토프랭스와 카프프랑셰에 도착해서 사망한 노예들을 대체하고 노예 보유고를 늘렸으나, 노예 보유고는 극도로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이 체계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했을 무렵 가속도가 붙은 확대 국면에 있었다. 해방된 노예들은 1789~1790년 프랑스혁명 초기부터 투표권과 의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파리에서 이루어진 권리의 평등에 관한 위대한 선언을 생각했을 때 논리적인 것으로 보였으나, 해방된 노예들에게는 거부되었다. 북부 평원지대 부아카이망 숲에서 열린 집회 이후인 1791년 8월 노예들의 위대한 봉기가 섬의 산악지대에 수십 년 동안 피신해 있던 수천 명의 '마론.marons'(탈주) 노예가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프랑스에서 지원군을 파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농장주들이 본국으로 도망친 사이 봉기한 노예들은 빠르게 영토를 장악하고 플랜테이션들을 접수했다. 파리에서 파견된 새 판무관들은 1793년 8월에 노예해방을 법령으로 발포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이 결정은 1794년 2월 국민공회에 의해 식민지 전체로 확대되었고, (비록 실제로 반란에 의해 강제된 것이긴 하지만) 이 확대 적용된 노예제폐지법으로 인해 국민공회는 선행 체제들과 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 1804년 독립을 선포한 아이티는 예외였지만, 소유자들은 1802년 이후 나폴레옹으로부터 식민지 섬들 전체에서의 노예제 복원을 얻어냈다. 1825년에 이르러야 샤를 10세가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했고, 다른 영토들, 특히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레위니옹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는 건 1848년이었다.
아이티: 노예소유가 국채가 된 경우
아이티 사례가 상징적인 이유는 이것이 승리한 노예반란으로 이룬 근대 최초의 노예제 폐지이고 유럽 강국에 맞선 흑인들이 쟁취한 최초의 독립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이 사건이 어마어마한 국채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이 국채 탓에 이후 두 세기 동안 아이티의 발전은 크게 침체되었다.
프랑스가 결국 1825년에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하고 프랑스 군대를 동원한 침략 위협을 그만두기로 한 것은, 오로지 샤를 10세가 노예소유자들의 재산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에 1억 5000만 금본위프랑을 갚겠다는 약속을 아이티 정부로부터 얻어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자명한 군사적 우위, 사태가 타결되기 전 벌어진 프랑스 군대의 항구 봉쇄, 섬을 점령하겠다는 프랑스의 현실적인 위협 등으로 인해 포르토프랭스의 아이티 정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825년에 확정된 1억 5000만 금본위프랑이라는 액수가 나타내는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액수는 플랜테이션의 수익성과 대혁명 이전의 노예가격에 준한 오랜 협상 끝에 계산되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 국민소득의 약 2%에 해당하며 오늘날 2018년 프랑스 국민소득에 동일한 비율로 적용해보면 400억 유로 이상이다.22 아이티에서 '해방된 노예의 수가 1833년 영국 노예 전부의 절반 이하였다고 해서 이 액수를 1833년 법 이후 영국의 소유자들에게 지급된 배상 총액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액수를 당시 이 섬에서 사용가능했던 자원들과 비교하는 일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들은 1억 5000만 금본위프랑이 1825년 아이티 국민소득의 300% 이상, 달리 말해 3년 이상의 생산에 해당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게다가 이 협정에 따르면 금액 전부를 5년 내에 예금공탁금고 cpc(프랑스혁명기에 창설되어 지금까지 존재하는 공공은행기관)로 신속히 납입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조건은 예금공탁금고가 약탈당한 노예소유자들에게 배상액을 지급한다는 것(실제 행해졌다)과, 아이티 정부가 프랑스 민간은행들에게 융자를 받아 분할 상환한다는 것이었다(역시 실제 행해졌다). 걸려 있는 총액이 얼마나 많은가를 깨닫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그후 수십 년간 점철된 여러 곡절과 재협상에 따라 은행가들이 빼놓지 않고 추가한 비싼 수수료는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 시대에 전형적인 연리 5%의 융자를 얻은 아이티는 원금 상환은 시작도 못한 채로 채무이자를 갚기 위해서만도 매년 자체 생산의 15%에 상당하는금액을 무한정 되갚아야만 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확실히 프랑스인 소유자들 입장에서는 이 섬이 노예제시대에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오늘날 가용 추계가 시사하는바, 1750년과 1780년 사이 생도맹그 생산의 약 70%가 (섬 인구의 약 5%를 넘지 않는) 대농장주들과 프랑스인 소유자들의 이익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특유의 식민지 수탈에 관한 잘 실증되고 특별히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엄연한 주권국가를 대상으로 자체 생산의 15%를 이전 소유자들에게 무한정 계속 갚으라고 요구하기는 어려웠으며, 이 모든 것은 이 나라가 노예이기를 멈추고자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일은 섬의 경제가 혁명 상황에서의 대치, 항구 봉쇄 조치와 함께 설탕 생산 상당 부분이 쿠바로 이전된 사태로 인해 크게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쿠바에서는 노예제가 계속 실행되고 있었고, 상당수 아이티 대농장주들은 봉기 시점에 자기 노예들을 데리고 쿠바에 도피해 있었다. 아이티가 지역경제로 편입되는 일 역시, 아이티의 선례를 보며 노예반란이 일어날까 불안에 떨던 미국이 1864년까지 아이티를 국가로 인정하고 교섭하기를 거부했던 사실로 인해 난항을 겪었다.
아이티의 부채는 여러 차례 복잡한 재협상의 대상이 되었지만, 부채의 대부분은 상환되었다. 특히 아이티는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 초까지 평균적으로 매우 큰 무역수지 적자를 냈다. 1842년 지진 및 잇달아 일어난 포르토프랭스의 큰 화재로 인해 프랑스는 1843년부터 1849년까지 이자 지불유예에 동의했다. 하지만 상환은 곧이어 정상화되었고, 최근 연구들은 프랑스 채권자들이 1849년부터 1915년까지 아이티에서 시기에 따라 그리고 아이티의 정치 상황에 따라 큰 변동이 있긴 하지만 평균 연간 국민소득의 5%에 상당하는 금액을 수탈해왔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이티의 무역수지 적자는 국민소득의 10%에 달했다. 국민소득은 때로는 제로지점에 가까운 수준으로 심지어 어떤 때는 마이너스로 떨어졌는데, 여하간 이 기간의 평균은 약 5%였다. 이런 식으로 상당한 금액이 장기간에 걸체 평균직으로 상환되었다. 하지만 1825년 협정에 내포된 것보다는 적어서, 프랑스 은행들은 이 불량 무국에 대해 꾸준히 불만을 제기했다.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 은행들은 결국 자신의 나머지 채권을 미국에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1915년부터 1934년까지 아이티의 질서를 복원하고 자신의 금융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티를 점령했다. 1825년의 부채는 1950년대 초에 마침내 완전히 상환되고 공식적으로 소멸되었다. 1825년부터 1950년까지 한 세기가 넘는 동안, 프랑스가 아이티로 하여금 해방을 위해 치르게 한 대가는 이 섬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이 끝없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순환에 따라 때로는 격렬하게 비난하게 하고 때로는 체념하며 받아들이게 했던 배상액 문제에 의해 과도하게 규정되는 결과를 빚어냈다.24
이 사태가 근본적인 이유는 노예제 논리, 식민주의 논리, 소유주의 논리 사이의 연속성과 불평등 문제와 소유 문제에 직면한 프랑스혁명의 심층적인 애매모호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아이티 노예들은 혁명적 해방의 메시지를 가장 진지하게 다루었던 이들이고, 그래서 비싼 대가를 치렀다. 이 사건은 또한 노예제와 부채 사이의 영속적인 밀착을 떠오르게 한다. 고대 세계에서 채무노예제는 널리 실행되었다. 성경과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석비에는 부채의 축적과 이로 인한 노예화의 끝없는 순환의 흔적이 보이는데, 이 순환의 와중에는 사회 평화 복구를 위한 채권무효화와 노예해방의 국면들이 점철되어 있다.25 영어에서는 노예제와 부채 사이의 역사적 연결의 중요성이 'bondage(속박)'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는데, 이 단어는 농도 또는 노예가 지닌 조건 특유의 의존관계와 관련된다. 'bond'라는 단어는 13세기부터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금융적인 성질의 합법적인 연결을 가리키는 동시에 지주와 농민 사이의 의존적 연결을 가리킨다. 19세기에 확립된 법체계는 채무 감옥과 특히 부채의 세대 간양도를 종료시키는 동시에 마침내 노예제를 폐지한다. 그렇지만 세대를 건너 양도될 수 있는, 미래 세대에게 잠재적으로 무제한의 금융 부담을 지울 수 있는 부채 형태가 있다. 바로 국채다. 노예제 폐지 이후 1825년부터 1950년까지 아이티가 짊어진 빚이 바로 이것이며, 19세기와 20세기의 수많은 식민지 부채와 함께 21세기 초의 국채에서도 우리는 이에 대해 보게 될 것이다.26
1848년의 노예제 폐지: 배상, 징벌작업장, '지원자들'
이제 1848년의 노예제 폐지로 돌아가자. 1833년에 의결되어 1833년부터 1843년까지 실행된 영국 노예제폐지법에 이어, 노예제 폐지에 관한 논쟁이 프랑스 도처에서 벌어진다. 자메이카와 모리셔스의 노예들은 해방됐지만, 프랑스 식민지 특히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레위니옹에는 25만 명 이상의 노예가 남아 있었고, 이런 사실로 인해 새로운 반란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존재했다. 그렇지만 노예제 폐지 논쟁은 여전하게도 또다시 배상 문제에서 좌초한다. 소유자들과 그들의 지지자들로서는, 정당한 배상 없이 자신들의 소유권이 박탈당할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1825년에 '망명귀족을 위한 천만금 법의 재원을 대야 했던 국고와 납세자에게 전면적으로 배상 부담을 지운다.는 생각은 전혀 타당하지 않아 보였다. 누구보다도 이 조치의 주요 수혜자들일 노예들도 역시 분담해야 하지 않겠는가? 17세기 초부터 다양한 식민지에서 인구조사나 행정조사부터 시작해, 노예와 그들의 주인에 관한 다수의 통계자료를 펴낸 것으로 잘 알려진 모로 드 조네스Alexandre Moreaucle Jonnes는 확신에 찬 노예제 폐지론자인데, 그는 1842년에 노예들이 보수없는 특별 노동을 일정 기간에 실행함으로써 배상액 전체를 상환하는 방안을 주장한다. 게다가 그는 이것이 노예들에게 노동의 의미를 가르쳐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28 혹자들은 이런 상환 방식으로는 이행기간이결국은 예속조건을 영구적인 채무 상태로 변환시키는 것에 그치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프랑스혁명 당시 오래 묵은 부역이 임대료로 전환되었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말이다.
토크빌은 1843년에 다음 방안을 제안할 때 자신이 완벽한 조합을 찾았노라고 믿었다. 배상액의 절반은 국채 형태로 소유자들에게 지불되고(그에 따라 늘어나는 국채는 전체 납세자가 갚고) 나머지 절반은 노예들에 의해 지불되는 방안인데, 노예는 소유자에게 배상액의 나머지 차액을 돌려주기 위해 10년간 국가에 낮은 노임으로 고용된다. 이 해법은 “모든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는데, 소유자 자신들이 10년 뒤에는 해방된 노예의 “노동력가격 상승을 감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납세자와 노예와 소유자가 공정한 방식으로 배상을 분담하게 될 것이다. 드브로이 총리가 주재한 하원 위원회는 별 차이가 없는 해법에 도달할 것이었다. 실로 결국은 소유자들의 성채 안에서 펼쳐졌던 이 논쟁에서(1830년과 1848년 사이에 성인남성의 2%를 넘지 않는 수가 하원의원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0.3%의 부자들 중에서 자신들의 대표자를 선출해야 한다), 그 누구도 여러 세기에 걸쳐 무보수노동을 해온 노예들이야말로 배상을 받아야 하는 당사자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된다면 노예들은 이제 자신을 위해 노동할 수 있는, 예전에 노예로 일했던 작은 땅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확립된 농지개혁으로 아일랜드 농민들에게 일어나게 될 일처럼(최소한 독립 시점까지는 귀족들에게 막대한 공적 배상을 해주었지만) 말이다. 30
여하간, 논의들은 1840년대 중반에 중단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소유자들이 노예해방을 거부하고 여차하면 자신들의 사병으로 이에 맞서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1848년에 7월 왕정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선포된 후에야 쉴셰르victor Schoelcher 하원 위원회가 노예제폐지법에 관한 논의를 재개했다. 영국의 1833년 법보다 조금 덜 후한 배상액을 책정했지만, 비용 분담은 최종적으로는 토크빌이 구상한 것과 유사해진다. 소유자들은 이전에 검토된 금액(이미 아주 큰 액수)의 절반 정도를 기본으로 한 배상액을 받는다. 소유자들에 대한 배상 외에도, 1848년 4월 27일에 공표된 노예제폐지법령에는 “부랑과 구걸을 금하고 식민지에 징벌작업장을 개설하는 조항도 들어 있다. 이는 대농장주들에게 저렴한 노동력을 보장해주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노예들에 대한 그 어떤 배상이나 이들의 토지소유 가능성도 고려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셰르식 노예해방에는 소유자들에 대한 배상에 더해 준강제노동제가 덧붙여진 것이다. 이 제도덕에 대농장주들은 자신의 실제적인 동맹세력인 국가 공권력의 통제 아래 왕년의 노예들을 감시할 수 있게 된다. 레위니옹에서는 총독이 제도의 적용 방식에 대해 즉시 명확히 한다. 요컨대 이전의 노예는 플랜테이션 일꾼으로든 가정부로든 장기계약을 맺어야 하며, 이를 어길 때는 부랑 혐의로 체포되어 파리에서 제정된 법의 조문에 따라 징벌작업장으로 보내질 것이다.32
이 시대의 상황을 잘 이해하려면, 사실상 고용주와 소유자에게 복무하는 국가가 노동에 엄격한 규율을 부과하고 임금을 최소로 유지하기 위해 이런 유형의 법을 제정하는 일이 흔했으며 노예제 폐지 이후 식민지에 이 법이 단지 새롭게 도입되었다는 점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특히 해방노예들 중 많은 수가 이전 주인을 위해 계속 노동하는 걸 거부했는데, 이들을 대체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당국은 더 먼 곳에서 노동력을 데려올 수 있는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나갔다. 프랑스는 '지원자와 계약을 맺는 형태로 인도인들을 레위니옹과 모리셔스로 데려왔고, 영국은 '계약노동자 indentured worker' 형태로 데려왔다. 인도인 노동자들에게 '지원'이란 장기간에 걸쳐, 예컨대 10년간 자신들이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해준 고용주들에게 자기 임금의 대부분을 지불함으로써 그 항해비용을 상환하는 것이었다. 노동 실적이 불충분한 경우 또는 심지어 규율을 어기는 경우, 상환 의무는 10년 더 혹은 그 이상 연장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보존된 일부 사법 문서들이 보여주는바, 특히 모리셔스와 레위니옹에서 사법체계가 고용주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심각하게 편향되어 있어서 작쥐와 전횡의 형태들로 이이있다. 이는 순수한 의미의 가혹한 노예제와 확실히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없이 거리가 빈 것도 아니다. 또한 가용 자료들은 고용주들과 재판관들이 어떤 식으로 이른바 노동의 규율체제로의 전환을 협상하는지보이준다. 소유자들은 노예제하에서 만연했던 제발을 줄이는 데 짐차 동의하게 되지만, 단 여기에는 사법당국이 소유자들에 협력해 동일한 효과를 낳는 금융제재를 강제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33
노동자와 일반적으로 빈민)에게 매우 불리한 이런 유형의 사법체계는 유럽 노동시장 안에도 매우 널리 퍼져 있었다. 1885년에 스웨덴은 일자리를 얻지 못해 생계를 유지할 만한 재산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강제노동의무를 지우고 이를 위반하는 자들은 구금에 처하는 법을 여전히 시행하고 있었다.34 이런 유형의 입법은 19세기 유럽 전역에서,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확인되는데, 스웨덴에서는 특별히 강고하게 예외적으로 오랫동안 실행된다. 이는 19세기 말 스웨덴왕국에서 지배적이었던 과도한 소유주의에 관해 우리가 보았던 바와 일관된 것이다.35 이러한 사법체계는 19세기말 20세기 초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특히 스웨덴에서 노조를 결성할 권리, 파업권, 단체협상권 등이 확립되면서 근원적으로 전환될 채비를 갖추게 된다. 노예제가 오랫동안 시행됐던 섬들을 포함한 식민지들에서는 이행이 훨씬 오래 걸렸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부역과 강제노동의 완벽하게 합법적인 형태들이 20세기 프랑스 식민제국에서, 특히 전간기에, 그리고 거의 탈식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도 여전히 유효했음을 볼 것이다.
강제노동, 소유주의 신성화, 그리고 배상 문제
이러한 사건들에서 여러 교훈이 도출된다. 우선, 강제노동과 자유노동의 중간 형태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며, 시행되던 규칙들과 법체계의 세부항목(그러나 사소하지 않은 것)을 상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는 21세기 초의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임금과 노동조건에 관한 매우 취약한 권리를 가진 페르시아만 석유왕국의 노동자들, 그리고 유럽과 여타 세계의 (불법체류) 노동자들에게도 해당한다. 물론 이는 노동권 일반에도 해당한다. 다음으로, 이 논의들은 19세기에 지배적이었던 사적소유준신성화체제의 힘을 입증한다. 또다른 투쟁들과 사건들의 궤적은 틀림없이 다른 결말들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맺어진 결말들은 소유주의 도식의 권능을 보여준다.
역사 속 위대한 노예제 폐지론자로 남아 있는 쉴셰르는, 배상에 대해 난처해하면서도 노예제가 법적 틀 안에 있는 이상 다른 방식으로 폐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역시 노예제 폐지론자인 낭만주의 시인 라마르틴은 동일한 논조를 하원 단상에서 강력하게 표명했다. “노예들을 빼앗긴 식민지 정착민들의 적법한 소유분에 대해서 이들 정착민들에게 배상”이 절대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배상해주지 않고 박탈하는건 혁명일 뿐이다. 입법자들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바꾸고 전환하지, 파괴하지 않는다. 기원이 어떠하든 입법자들은 기성 권리들을 존중한다.” 36 사태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양한 기성 소유권들 중 일부를 선택적으로 없애야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가 (노예가 아니라) 소유자가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라마르틴의] 확신의 근거다. 이러한 사건들이 근본적인 것은, 21세기 초에 재등장한 (특히 그 총액과 기간이 어떠하든지 간에 국채의 전면적 상환, 또는 그 규모와 기원이 어떠하든 간에 민간인 억만장자들의 재산이 절대적이며 공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정당성과 관련되는) 소유의 준신성화 형식들을 조망할 수 있게 해주고, 현대 세계에서 종족적 인종적 불평등이 지속되는 문제와 복잡하지만 피할 수는 없는 배상 문제를 새롭게 해명해주기 때문이다.
1904년 아이티 독립 100주년 기념식에,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공식 사절단 파견을 거부했다. 실제로 프랑스 정부는 부족하다고 평가했던 — 1825년 국채의 상환 속도에 매우 불만스러워했고, 그러니 이처럼 불량한 채무자에게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는 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당시 확장일로에 있던 식민제국이 국채를 통한 압박 전략에 빈번히 의거했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2004년, 매우 달라진 정치적 상황에서 아이티 독립 2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프랑스 제5공화국 정부는 불참이라는 같은 결론에 도달했으나 그 이유는 전과 달랐다. 프랑스 대통령이 기념식 참석을 거부했던 것은 아이티 대통령 아리스티드가 이 기회를 통해 앤틸리스제도의 작은 공화국이 100년 넘게 지불했던 (아리스티드가 200주년 바로 전해인 2003년에 추산하기를 200억 달러에 상당하는) 가증스러운 국채를 프랑스에게 되돌려달라고 공식 석상에서 주장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이 두려움에는 근거가 없지 않다), 프랑스 정부는 이 이야기가 언급되는 걸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마다했다. 프랑스 대통령이 2010년의 지진과 장기간의 복구 작업이 이뤄진 뒤인 2015년에 아이티를 방문했을 때도 같은 입장을 되풀이했다. 물론 프랑스는 아이티에 '도덕적인' 부채를 지고 있지만, 프랑스 국가가 지불해야 할 국채 또는 화폐 배상의 이러저러한 형태에 관한 일체의 논의를 허용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짓는 방식과 아이티에 대한 프랑스의 배상이 취할 정확한 형태에 관한 것은 내 소관이 아니다(세대 간 배상보다 훨씬 더 야심찬 초민족적 정의의 실현 형태 또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재론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종류의 배상들은 옹호하면서도, 아이티 자료를 다시 열어보길 꺼리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논지의 극단적인 약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 모든 것이 너무 오래된 일이라는 주장은 유지되기 어렵다. 아이티는 1825년에서 1950년까지, 다시 말해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와 미국의 채권자들에게 국채를 상환해왔다. 오늘날 20세기 전반기에 펼치졌던 볼수와 불공정 때문에 계속해서 발생했던 수많은 배상과정들이 존재한다. 특히 2차대전 기간에 나치당국과 (프랑스의 비시 정권을 필두로 한) 동맹 정권들에 의해되풀이된 유대인 재산에 대한 약탈을 생각해보자. 그 약탈에 대한 정당한 사후적 반환 절차는 아직 진행중이다. 또한 2차대전 직후 동유럽의 다양한 공산주의 정권하에 발생했던 몰수들로 인해 지금도 여전히 지불되고 있는 배상을 거론할 수 있겠다. 또는 2차대전 기간에 억류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2만 달러를 지급한 미국의 1988년 법을 거론할 수 있겠다. 1825년에서 1950년까지 집행된 국채 지불은 잘 기록되어 있고 이에 대해 그 누구의 이의제기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이티가 더이상 노예로 지내지 않으려고 프랑스에 지불해야 했던 국채에 관한 일체의 논의를 거부함으로써 어떤 범죄는 다른 범죄보다 저지를 만하다는 인상을 심어줄 위험을 불가피하게 감수하게 된다.
2000년대 초부터 프랑스에서는 1825년 예금공탁금고가 아이티로부터 받아 이전 노예소유자들에게 지급한 배상과, 1848년 법을 통해 지급된 배상에 관련해 전국에 걸친 투명성 조사를 시행하기 위해 여러 단체들이 동원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배상과 관련해 아주 최근에 있었던 조사와는 정반대로, 이 두 배상 모두 심층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문제가 되는 프랑스의 문서고는 영국의 의회 문서고에 비해 보존이 잘되어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문제들을 규명하려는 시도를 막지는 못한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저지할 이유도 되지 못한다. 프랑스 국가가 아이티에 막대한 재정 배상의 책임을 지는 것과 노예제도에 관한 교육사업이나 박물관 건립사업에 재원을 조달하는 일(프랑스에는 노예제 박물관이라 불릴 만한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노예제덕에 번영을 누린 보르도와 낭트 같은 항구도시에도 없다). 이 재원은 아이티에 지급해야 될 배상에 비하면 그 액수는 하찮은 것일 테지만 교육적인 차원에서는 적잖이 중요한 일이다. 2001년 5월 10일, “노예무역과 노예제를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는"법이 (식민지였던 기아나에서 당선된) 크리스티안 토비라의 발의로 프랑스 의회에서 채택되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와 여당은 배상 원칙을 확정하고 아이티 문제를 규명하려는 위원회 설치에 관한 5조 조항을 삭제하느라 애썼다(결국 위원회는 설치되지 못했다). 40 아이티에 대한 재정 배상 문제 외에, 회피하기 어려워 보이는 또다른 대규모의 배상 문제가 존재하는데 이 역시 토비라가 제안했다. 레위니옹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기아나에서의 농지개혁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 농지개혁은 토지와 금융 자산이 여전히 1848년 배상의 수혜자들인 대농장주 가문 백인들의 전유물인 상황에서 노예의 후손들에게 토지를 소유할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2015년에 법무부 장관이던 토비라가 아이티 국채 문제와 해외 데파르트망département diourre-ner 농지개혁의 중요성을 프랑스 대통령에게 환기시키고자 했으나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수십 년간 미국의 지도자들로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고 여겨왔던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한 배상 문제를 놓고 판단해보자면, 2000년대 초가 되어서야 유대인 재산 약탈에 관한 위원회가 설치되었던 프랑스 경우를 놓고 판단해보자면, 이러한 논의들이 장차 성공적으로 여론을 조성하고 뜻밖의 배상 형식에 도달하는 것도 전적으로 가능하다. 1930년대 위기 당시 (특히 캘리포니아에서) 펼쳐졌던 외국인 박해 탓에 추방된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노예들이었던 오래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지만 일본계 미국인들은 마침내 소송에서 이겼다. 이 사례는 배상을 받는 사람들과 그 지지자들의 사법적 금융적 정치적 자원만큼이나 배상하는 사람들의 인종적 문화적 편견이 일정하게 작동한다는 것도 알려준다.41
대충 이게 내가읽은 파트에서 프랑스 노예제도 다룬 부분임 글고 vflat존나 편하네
근데 앱으로 옮긴거라 조금 이해 안되는 부분은 거르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