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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교문 앞에서 전경과 대치중인 녹두대원들.








아무튼 이들의 위력은 어마어마해서



8-90년대(남대협-남총련 시기) 호남에는 오월대(전남대 사수대), 녹두대(조선대 사수대)를 전담마크하는 전문 중대가 있을정도였다. 오월대와 녹두대가
서울에 집회를 하러 간다는 첩보를 입수하면, 해당 전담마크 중대가 이들을 뒤따라갔다.

당시에는 학생시위대가 전경과 맞서다 교내로 후퇴하면 더이상 쫓아가지 않는게 불문율이었는데, 광주전남쪽 중대들은 그 불문율을 깨고 학생들을 토끼몰이식으로 학교로 몰아넣은다음 강경하게 진압하는 방식을 선호했다고한다.



아래는 당시 녹두대원의 증언이다.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의 길이는 보통 120cm이 넘습니다. 반면 97년 전까지 진압중대가 보유하고 있던 진압봉의 길이는 105cm이었습니다. 같이 진압봉과 쇠파이프를 휘둘었을 경우 어떻게 될까요?  더구나 진압봉의 재질은 플라스틱 입니다. 제대로 맞으면 진압봉은 그냥 휘어버리고 맙니다.

방패 역시 무적은 아닙니다. 쇠파이프를 측면으로 몇대만 맞으면 방패가 찢어지거나 심한 경우 박살이 납니다. 쇠파이프는 결코 약한 무기가 아닙니다. 근접전에 있어 최고의 무기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위협을 주지 못하거나 상대방이 그 무기에 익숙해져 있다면 그 무기의 효능 역시 상당히 반감합니다. 바로 최류탄의 얘기입니다. 학생들은 결코 최류탄은 두려워 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탄으로 인해 방독면을 쓴 진압중대원들만이 시야가 좁아지는 등 문제점이 발생하지요.




반면 화염병의 경우 직격으로 맞을 경우는 물론이고 그냥 땅바닥에 떨어져 불이 붙어 있어도 굉장한 위협이 됩니다. 불길이 진압복으로 옮겨 붙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화염병을 방패로 막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셨지요? 진압중대에 배속받고 가장 먼저 듣는 얘기 중 하나는 화염병을 방패로 막지 말라는 겁니다. 방패에 맞아 화염병이 깨지면 바로 뒤에 있는 대원들 얼굴쪽으로 불길이 번지기 때문입니다.







남총련 사수대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사건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조선대 공성전 또 다른 하나는 열차 정지 사건.










1) 조선대 공성전

남총련이 조선대에서 집결하여 광주미문화원을 점거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및 여러 지역에서 중대를 차출해서 지원부대를 보내게된다. 아무튼 지원을 나온 경기도 및 여타 지역의 전의경들은, 그동안 자대 지역의 학생시위를 잘 막아낸 나름 역전의 용사(지배계급 입장에서)였기에, 의기양양하게 전투에 참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남총련 사수대는 급이 다른 빨갱이라는 것을. 처음 시위대와의 대치에서 다른지역에서 지원나온 일선 부대들은 처음 접한 남총련 시위대 그리고 사수대에게 처참하게 무너지고만다. 다행스러운건 시위대의 침투는 저지했다는 것이다.

1차 침투가 실패하자 남총련과 녹두대는 2차 침투를 준비한다. 이에 전남측 중대는 녹두대 전담마크 부대인 82부대와 사복중대를 지원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결전을 준비한다. 이들은 경기도 및 타 일선 중대가 경악할정도의 일당백 기량을 보여주게된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1037부대의 전경 110명중 30명이 뼈나 이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실려갈 정도였다고하니, 시위의 격렬함은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라 사료된다.

이런 격렬한 투쟁에서 호남 전의경들은 강경 진압을 채택한다.
원래 시위 현장에서는 최루탄을 하늘 위에 쏘는 것이 불문율이다. 최루탄에 맞아 사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남 방순대는 그 불문율을 깨고 정면에 최루탄을 투하했다. 당시에도 서울에서 그런 진압 방식을 택했다면 일간지에 ‘폭력 경찰’로 도배되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전투력이 서총련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력했던 남총련에 대응하기 위해 경찰은 이런 과격한 방식을 이용한 것이다. 경찰은 그리곤 조대 정문 앞까지 토끼몰이식으로 학생들을 구겨넣기에 성공, 곧이어 타지역 일선중대에선 추가 진압을 망설이고 있는데, 호남 소재 방순대는 우렁찬 구호를 외치며 조대 안으로 돌격한다.(물론 들어간 방순대 전경들은 사수대 매복조에 걸려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후퇴한다.)

결국 그날의 끈질긴 전투는 전의경들의 승리로 겨우겨우 끝나고만다.



아래는 당시 전투에 참가한 경기도 지역 전의경의 증언이다.



당시에는 만화 <드래곤볼>이 인기였습니다.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내용 중 “전투력”이란 말이 나오자나요.

‘베지터는 전투력이 ○○○야’ 등등.  그래서 울중대에는 “남총련은 전투력이 만땅이야”라는 말이 유행했었고, 그때는 남총련의 전투력은 만땅이었죠. 그들은 중대개념, 소대개념까지 있었고, 방학 때 체계적인 훈련도 했던 걸로 압니다. 지금은 한총련이나 남총련의 폭력적인 성향이 많이 수그러져 있긴 합니다만, 오히려 노동계 쪽이 더 무섭죠.

이 아저씨들은 힘이 장난이 아니랍니다. 영농후계자분들도 그렇죠
.











2) 1994년 열차 정지 사건

94년 17일 자정이 가까운 무렵 남총련 소속 대학생 4백여명이 목포발 서울행 열차를 송정역에서 강제 정차시킨 다음 이 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상경 목적은 우루과이라운드 국회비준 거부 시위 참여. 일부 학생은 경찰과 대치해 성동격서방식으로 경찰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작전하듯 열차를 강제정차시켜 서울로 떠났다.











이 두 사건만 봐도 남총련 사수대의 위력을 체감할 수 있다. 남총련 사수대는 호남이 아닌 서울 소재 캠퍼스의 투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홍익대, 한양대, 연세대 등지에서 남총련 사수대는 용기있게 전경과 맞섰다. 많은 학생들이 이들에게 신세를 졌다.





오늘날의 시선에서는 이런 강경한 시위 방식에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남총련 사수대원들의 기개덕분에 90년대 한총련은 여러 투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십만의 조국해방군 남총련의 앞길을 그누가 막아서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