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 - 벨라루스의 역사, 허승철 저, 2015


소련이 붕괴된 후 3년의 기간 동안 벨라루스의 상황을 정치학자 기본은 '고요한 무정부 상태'로 불렀다. 공산당이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소련식 정치 문화가 지속되고, 새로 결성된 아마추어적인 군소정당들은 정치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상태를 '고요함'으로 본다면, '무정부 상태'는 경제를 지배했다. 소련 내 다른 공화국들과의 교역에 의존하고 있던 벨라루스는 소련 붕괴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붕괴되는 소련 경제체제의 원심력적 와해를 과감한 개혁 조치로 극복하려는 노력 대신, 소련식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극히 비효과적인 노력이 지속되었다. 간단한 대비로 발트 3국이 고통스런 체제 전환 노력을 지속한 데 반해, 벨라루스는 1994년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체제 전환 노력을 중단했다. 1994년 발트 3국은 GNP의 50~55%를 사적 부문에서 생산한 데 반해, 벨라루스는 GNP의 15%만이 사적 부문에서 생산되었다. 이 시기에 발트 3국은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경계점을 넘어선 대신, 벨라루스는 역으로 회기하여 2005년에는 사적 부문이 생산한 GNP가 8%로 줄어들었다.

이 당시의 주요 정당으로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그리고 시민전선이 있었는데, 그 중 벨라루스 극성 민족주의 성향인 시민전선은 루카셴코 대통령에 가장 크게 반발한 야당이었다. 그러나 시민전선은 무리한 벨라루스어의 공용어 지정, 신자유주의적 공약으로 인해 급속도로 민심을 잃어갔다. 특히 언어 문제는 러시아인 뿐만 아니라 이미 실생활에서 벨라루스어가 아닌 러시아어를 쓰고 있던 대다수의 벨라루스인들에게도 민감한 문제였고, 급진적으로 벨라루스어가 러시아어를 대신할 것을 제안한 시민전선은 지지율을 잃어갔다. 결정적으로 1995년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는 국민투표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됨으로서 직격탄을 맞았으며, 1997~1999년 사이에 주요 야당의 지도자들이 실종, 사망, 자살, 망명, 투옥되었고, 대통령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반하는 판결을 내렸던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전원 사퇴하고 서유럽,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3국 등지로 망명하면서 루카셴코는 절대권력을 얻게 되었으며, 러시아-벨라루스 연합이 체결된 1996년 이후로부터 루카셴코는 러시아 내정에 대해서도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1999년 연합의 정식 창설은 루카셴코가 사실상 러시아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으며, 루카셴코는 '러시아의 구원자'를 자처하며 2000년 대선 출마를 시사하였다.

당시 루카셴코의 동유럽에서의 영향력은 러시아를 능가했는데, 벨라루스는 나토를 비난하며 코소보 전쟁에 개입했고, 밀로셰비치를 '세르비아 민족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며 신유고연방을 러시아-벨라루스 연합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루카셴코는 매 임기마다 자신을 재포장했다. 루카셴코는 1994년에는 범슬라브 민족주의자로 자신을 내세웠고, 옐친 정권이 쇠락하는 기간에는 러시아의 구원자 역할을 자임했다. 2001년 이후에는 자신의 활동분야를 만들어 나갔고, 2004년 이후에는 '색깔 혁명'(조지아의 장미 혁명, 키르기스스탄의 튤립 혁명,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에 대한 방어자 역할을 자임했다. 2006년 이후에는 최소한의 경제 자유를 실험해 보았고, 러시아가 경제 원조를 줄이자 다방향 외교를 시험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에는 분쟁 조정자를 자임하고 나섰다. 루카셴코는 기회주의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생존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정치가이다. 그가 옐친과 지리놉스크로부터 인기주의 전략을 많이 배운 것은 아이러니이다. 생존에 강한 모든 정치가가 그러하듯이 그는 카멜레온적인 자기 변신 능력을 가졌다. 어떤 이들은 그의 상황에 대처하는 유연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인민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루카셴코가 집권 이후 지지율 기반을 잃지 않고 정권 연장에 성공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전제적 구원자'로서 자신을 내세우는 능력과 많은 관련이 있다. 그는 자신을 벨라루스 국가와 인민의 아버지로 내세운다. '아버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역할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먼저 그는 자신이 내세운 '평등적 벨라루스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약속한 비공식적 사회계약을 달성했다고 자임한다. 공식 자료에 의하면 1996년 503달러였던 평균 임금은 2010년 4.9배 늘어났고, 2010년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는 13,685달러가 되었다.(2020년 기준 20,820달러) 복지, 교육, 보건에 대한 지출은 GDP의 11~12%을 유지하고 있다. 두 번째 역할은 생활용품을 곰급하는 능력이다. 2004년에 내세운 '편안하고 안락한 가정'이라는 슬로건은 많은 주민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부패는 분명히 있지만, 우크라이나나 러시아에 만연한 길거리 범죄나 마피아에 의한 혼란은 없다. 민스크의 거리는 깨끗하고 겨울이면 쌓인 눈이 바로 청소된다. 2010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루카셴코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이 국가에 이롭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44%였고, 권력집중에 반대하는 비율은 38.5%였다. 세 번째는 자신이 정한 코스로 국가건설을 해나가는 능력이다. 독립 초기 시민전선이 내세운 민족적 정체성은 큰 공감을 얻지 못했다. 루카셴코가 내세운 국가 정체성은 '혼성곡'과 같다. 그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소비에트 벨라루스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특히 2차대전에서의 영광된 승리의 신화를 강조한다. 레쉬첸코는 '1990년대에 시민전선이 잘못 내세운 민족주의를 루카셴코가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