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 설명 : 반혁명분자를 소탕하는 우크라이나인
0. 베른슈타인은 언급하였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발달과 완성은 그 비판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 무엇이든 증명할 수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 그러나 그들의 문하의 임무는 (비판적 검증과 보완)작업을 하는 데 있지, 그 결코 그 시조의 말을 영구히 되풀이하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1. 노정협은 동유럽 문제와 같이 전혀 무지한 분야에서도 엥겔스의 발언을 무분별하게 인용하는 교조주의적 오류를 범했다. 엥겔스는 후스 전쟁이 일어날 정도로 유럽에서 이질적이었던 보헤미아(현재의 체코)에도 '역사를 가지지 못한 민족'이라고 단정지을 정도로 슬라브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2. 러시아인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동슬라브쪽의 역사는 모스크바와 키예프쪽의 역사가 사실상 '평행한 기원'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한다. 소위 말하는 키예프 루스는 친족과의 혈연으로 이어진 매우 느슨한 체제였음으로 역사적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여기에 '타타르의 멍에'가 이어지면서 둘은 새롭게 출발해야만 했다. 이후 우크라이나인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거쳐 폴란드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러시아쪽은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국가를 형성하였다. 당연히 이 둘간에는 정교회 신앙을 제외하고는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았고, 신앙적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옮겨간것도 키예프의 파괴에 있지 그 역사적 원인에 둔 것이 아니었다.
3. 폴란드인들은 카톨릭 신앙과 농노제를 확신시키고자 하였고 이에 반발한 우크라이나의 카자크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이 유명한 대홍수이고 이 과정에서 고도의 자치를 허용한다는 조건으로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러시아인들은 약속을 파기하고 우크라이나 민족 문화를 말살하고 카자크인들을 노역에 내몰아 수천명을 사망하게 만드는 등 그들을 피억압민족의 일부로 대할 뿐이었다.
4.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불만은 러시아 혁명으로 대폭팔하였다. 2월 혁명이 발발한 직후 우크라이나 민족의식을 지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대의원이 소집된 우크라이나 라다가 소집되었고 이들은 모스크바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연방공화국으로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사실상의 승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공개적인 승인을 함으로서 억압적인 반봉건적 질서는 소멸될 듯이 보였다.
5. 그러나 10월 25일 집권한 볼셰비키는 이러한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결의를 모두 무시하고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우크라이나에 있던 여러 상이한 집단들. 즉 키예프의 사회민주주의적 라다, 독일의 후원을 받던 권위주의적 카자크들, 동남부의 아나키스트,기타 독립적인 무장세력들이 모두 원하지 않던 바였다. 그러나 독일군과의 전투, 반혁명세력과의 내전, 복잡한 국제정세로 인해 이들은 볼셰비키에게 패퇴하는 결말을 맞고 말았다.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이는 당연히 우크라이나 출신 볼셰비키들을 대상으로 한 형식적인 정부에 불과했다.
6. 초기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신경제정책의 폐지와 더불어 다시 우크라이나 민족문화와 경제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어는 다시 억압받았고 부농들은 계급의 적이라는 명목으로 대량이주나 사실상의 살해에 직면해야했다. 이후 벌어진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한 사실은 유명한 일이다.
7. 이러한 수백년간의 역사를 비추어볼때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투표에서 유권자의 84.18%인 3,189만명이 투표에 참가해 92.3%의 지지라는 결과가 나온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련과 그 후신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계층들이 이러한 민족문제를 부가적인 차원으로 돌리고 책임을 서방이나 우크라이나의 지배층에게 돌리는 시각이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리보프 자택에서 검거
'리비우'
전문 읽어보면 러시아도 민족감정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못지않다고 까는데 간과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 서방한테만 책임을 전가하는 건 아님. - dc App
"문제의 본질은 우크라이나 내의 계급대립이 주된 것이며, 이러한 계급대립이 민족대립으로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다. 즉,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계급 분파가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만으로는 지배력을 장악할 수 없고, 우크라이나가 자본주의화 되면서 나타나는 빈곤이나 실업, 불평등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각자가 미제국주의와 나토를 위시한 서방과 러시아의 힘을 빌려서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을 통치하려는 것이다." 문제의 주 책임을 서방한테 돌리고 러시아는 '서방과 같다'는 논리로 깐다고 해석되는데.
일견 틀린 말이 없다고 생각함. 소련으로부터 독립에 압도적으로 찬성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그 이후 찾아온 경제적 어려움을 보면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비록 부패했을지라도 90년대-00년대 중반 사이로 한동안 맹위를 떨쳤는지 설명이 안됨. 크라우츠크 시기에 진행된 사유화랑 자본주의화로 벨라루스에 비해 삶의 질이 현저히 악화됐고, 이후 출현한 올리가르히 세력은 지역갈등을 통해 계급전선을 교란시키기에 바빠서. - dc App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45981?no=245981
본문에서 지적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수치도 비록 “성공에 도취된”감이 적잖지 않더라도, 그렇게 신뢰가 갈 만한 내용이라고 여겨지지 않음. 부농을 대상으로 한 계급적 쟁투였고 전염병이라는 변수도 존재했기에 의도적으로 일으킨 대학살이라 보기엔 어폐가 있지 않을까 생각됨. - dc App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소련이 의도적으로 일으켰다고 발언한 적 없음. 게다가 소련은 외부에 이러한 행태가 들어나는걸 꺼려하는듯 이를 해결할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다는건 부정하지 못함.
https://en.wikipedia.org/wiki/Gareth_Jones_(journalist)
여기에서 보이듯 최소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방치했다는 비난은 벗어나기 힘듬
소련에 대한 비판이야 있을 수 있는데 인식의 근거가 보수적 역사학자들의 담론이라면 글쎄 - dc App
보수적 역사학자를 추종하는것도 문제지만 역사학자조차 아닌 사람들을 추종한다면 글쎄. 우크라이나는 정부 차원에서 소련의 조직적 학살범죄라고 규정하는 판국인데.
“젬스꼬프(Zemskov)같은 학자가 문서고를 토대로 진행한 연구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9000쪽에 달하는 그의 연구보고서가 1990년 나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반(反)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사람이나 살인, 강간 등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보내지는 노동수용소는 53개, 규율이 느슨했던 노동이주지는 425개가 있었다. 여기에 토지가 몰수된 부농이 보내진 개방 특별지역이 있었다. 이곳 전부를 합해서 약 200만 명이 수용되었다. 정치범의 수는 콘퀘스트의 주장과 달리 45만 4000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37~1939년 사이에 죽은 인원도 300만 명이 아니라 16만명이었다.” 주제가 다르긴 한데 여하간. - dc App
200만명이 강제이송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충분히 문제가 된다고 보는데.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난징대학살이 중공이 말하는대로 '난징 시내에서 30만명이 죽었다'는 헛수작이지만 그렇다고 난징대학살 자체를 다르게 볼 근거는 못된다고 봄.
충분히 다르게 볼 근거가 있다고 봄. 소련 정부가 굴라그 수감자들의 후생에 아예 신경쓰지 않은 것도 아니요, 실제적으로도 사망률도 국제적 기준에 부응한 의료기술의 발전에 따라 줄어들었으니. 부농의 이주에 대해서는 신경제정책의 파멸적 결과라고 여겨짐. - dc App
피츠패트릭이 말하듯 대숙청(1930s)이 당내 기회주의적 인자들과 군벌, 부패한 지역 당관료 등을 걸러내기 위한 취지로 실시되었다는 점을 볼때 난징대학살과 동격으로 비교하기엔 어폐가 있고, 수년간 “죽은 인원”이 16만이라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아예 이해하지 못할, 가늠하지 못할 그런 수치는 아니라고 봄. - dc App
우크라이나가 정부 차원에서 소련의 “조직적 학살범죄”라 규정한 건 반데라에 우호적인 볼로디미르 뱌트로비치같은 인자들이 포로셴코 정부 시절에 국가기억원장같은 중요 요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료됨. 일찍이 유셴코 정부 시절에도 요직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함. - dc App
우크라이나 인에게 소련 공산당이란 경험은 러시아 제국에서의 경험이랑 다르지 않다 생각함. 소련이 고립되었다는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우크라이나에게 러시아는 언제나 압제자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