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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동자들이 1866년에 도입한 보통선거권을 이용한 덕분에 당은 모든 세계 앞에서 이론이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놀랄만한 성장을 기록했다. 사회민주당이 획득한 표는 1871년에 102,000표, 1874년에 352,000표 1877년에 493,000표 등이었다. 그러자 정부당국자들은 이 발전에 자극되어 사회주의자탄압법(1878년 의회를 제외한 모든 장소에서의 사회민주주의적 선전, 언론, 정치활동을 금지한 법률. 1890년 기간 연장이 기각됨으로서 폐지되었다.)의 형태로 대응하였다. 이 때문에 당은 점점 위축되었으며 1881년에 획득한 표는 312,000표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극복되었으며, 그리고 이제 당은 사회주의자탄압법의 압력 하에서 선전물이 없어도, 결사 및 집회의 권리가 없어도 더욱 더 급속한 신장을 기록하였다. 당은 선거에서 1884년에 550,000표, 1887년에 763,000표 1890년에는 1,427,000표를 얻은 것이다. 이로 인해 국가의 여러 기구가 마비되다시피 했다. 사회주의자탄압법은 소멸되었고 사회주의자들의 득표수는 1,787,000표로 증가하여 전체 투표자의 ¼을 기록하였다. 정부와 지배 계급은 그들의 모든 수단을 소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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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조건이 실질적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옛 스타일의 반란, 1848년까지 도처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렀던 바리케이드를 갖춘 거리투쟁은 현저히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환상도 가지지 않는다. 봉기가 거리투쟁에서 군대에 대해 실질적인 승리를, 즉 약 군대 사이에서와 같은 승리를 거두는 것은 굉장히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프랑스 내전에서의 계급투쟁 서문(1895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죽기 5개월에 쓴 이 작품은 수정주의의 발흥에 대한 이론적 근거중 하나이기도 함. 물론 엥겔스가 지목한 유언집행인 세명 중에서조차 베른슈타인과 베벨, 카우츠키가 다르게 해석할 정도로 민감한 주제고 오늘날까지도 학술적인 해석이 갈리니 어떻게 읽을지는 자유. 


트로츠키는 대놓고 공산당 선언이 필요하지 (후기의) 마르크스는 필요없다고 말했으니 그런 태도도 나쁘지는 않을 것. 다만 그런 태도를 견지할 경우에도 우리는 그 사람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러야할지는 조금 생각해야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