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위는 남·북한을 아우르는 통일된 정부가 수립되어야 비로소 한국의 독립이 완수될 수 있다고 인식했고, 아울러 38선에서 남·북한 군대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며 전쟁위기가 고조되는 현상을 우려했다. 임시위는 총회에 제출한 2차 종합보고서에서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할 경우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조속히 평화협상(peaceful negotiations)을 시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14) 통일과 독립이 불가분의 관계이며 분단은 내전을 불러일으킬 것이므로 남·북한 또는 미·소가 협의에 나서야 한다는 임시위의 시각은 미국·이승만의 입장과 크게 달랐던 반면 남북협상을 추진했던 한국인 민족주의진영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 1․2차 유엔한국위원단의 평화통일 중재활동과 그 귀결(1948~1950년)라는 학위논문(故 신승욱씨)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힘



그뿐만 아니라 남북한 협상(agreement)을 추진해야한다와 동시에 보안군 통합 시 에 남북한 군대 전부 다 해산해야한다면서 북한또한 통일협상주체로 상정해야한다고 했었음

이들의 원래 목표는 남북통일과 군대 통합을 중재하고 분단으로 인한 남북교류 장애를 제거하는 데 원조하는 일이었고 대의정치의 발전과 점령군 철수에 대해 감시하고 협의하는 일이었음


그렇다고해서 제발 좀 이상한 소리들은 마시고... 



아무튼 UN한국위원단은 에초에 목적이 1947년 이후로부터 한국의 독립과 통일문제를 국제적 차원에서 다룰려고 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얘네들이 잘되었던건 아니였음 오히려 남한과 북한한테 각각 행동의 제약 및 거부당하면서 한편으로는 의도치않게 미국한테 질질 끌려다닌 신세이긴 했었음


소련이야 에초에 이런 논의하는것에 대해 반대를 해서 UN총회에 대놓고 필리버스터같은 지연전술을 오지게 했었지만 ㅇㅇ

(소련은 1946년 무렵부터 미소협의에 대한 과도정부수립이 불가능해질 경우 조선인 스스로 정부수립하게 방임하는 방침을 세웠었음)




"위원단을 정면으로 다룬 연구는 많지 않은데, 가장 자세한 것은 고든커(Leon Gordenker)의 박사학위논문이다.5) 그는 유엔 현지기구의 효과와 효율성을 분석한다는 취지에서 한국문제 사례를 검토했다. 그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하 임시위)과 유엔한국위원단이 여러 내적인 한계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 평화통일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유엔이 지역분쟁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원단(Commission) 기구보다 단일대표(Single Representative)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든커는 위원단이 생산한 유엔문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위원단의 내부 논의와 활동상을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위원단과 관계를 맺은 한국인들과 미국 등 외부 관련자들의 동향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않아 위원단 활동의 전후사정을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다. 그는 위원단의 내적 한계에 주목했지만, 기실 위원단이 부침을 겪는 과정에서 외적인 압력도 적잖이 작용했다. 그중 중요한 측면은 위원단이 일상적으로 관계했던 미국·한국인들과 어떠한 역학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위 학위 논문의 발췌한 내용임)




이들이 어떻게 여러모로 질질 끌려다니게된 여러 요소들을 찾아보면 일단 처음부터 영국과 영연방대표와의 의견이 여러모로 엇갈린게 컸었고 미국은 UN위원단의 권한을 줄일려고 애쓴점도 있었음


(당시 영국과 영연방쪽에선 한국과 미국의 한국의 전국정부 제안을 반대했었고 위원단의 권한의 확대를 통해 평화중재를 해야한다고 했었음 그래서 전국정부드립을 대체해서 영연방측과 여러국가과 합의해서 나온 국제적 승인이 38선이남의 합법정부였다는게 함정)


UN사무국이 위원단을 주도하려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외교적 공작으로 인해 사무국또한 권한이 축소되면서 고자가 되었는데 한국정부와의 협조또한 제대로 받기 힘들었었고 오히려 이에 대해 협조하고자 했던게 김구, 국회소장파세력, 안재홍등 남북협상에 호의적이였던 민족주의진영들이였음 - (당시 위원단의 절반 가까이되는게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이였음)



실제로도 면담이 오고가고 했었지만 이승만 정부가 양김(김구, 김규식)에 대해 '반역자'라고 주장한거때매 비공식적으로 진행되었음

(당시 김구식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주축이 되는 고문단을 만들고 남북협상을 재추진하자고 제안을 했고 김구는 아예 한술 더 떠서 새롭게 남북한이 동등한 조건하에 전국총선거를 추진해야한다고 했었음) 


결국에는 위원단의 제안은 남북교류를 진작하고 상호 비방을 줄이면서 전쟁위기를 완화하자고 권고안을 내놓았으나 이게 잘 되기는 개뿔이였고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정부한테도 줄창 욕을 얻어먹었음

심지어는 연방제통일에 대한 의견도 있었지만 또 욕먹고 아예 통일중재 권고안을 작성하지 못했었음


대북접촉시도또한 사무국주도하에 행동적으로 시도해본적이 있었는데 심지어는 북한의 정보기관과 무역기관을 통한 방북시도마저 있었을 정도로 별다른 수가 제대로 없었음 북한정부한테 방북요청하기도 했었지만 북한의 입장에선 자기네들의 '평화통일공세'이라는 언론플레이 쇼에 대한 맞불작전으로 인식되어서 이것또한 실현되지 못했음

(당시 북한의 언론플레이 내용은 남북한의 애국적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로 협의체와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하여 북한의 '민주개혁'을 한국으로 확장하는 연립정부의 수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이였음)




결국엔 별다른 성과없이 난항을 겪은 끝에 꿩대신 닭으로 나온것이 군사행동을 감시하고자하는 '군사감시반'의 임무였었음


이건 에초에 미국이 의도했던 요소가 섥어들어간게 있었고 이를 통해 미국의 지지를 기반하에 쉽게 추진할려고 했었지만 프랑스와 인도와 호주대표가 반대하는 등 이것대로 난항을 겪었고 오히려 위원단의 임무를 '군사 분쟁 감시 임무'를 정식으로 포함시키는것으로 대체하곤 했었음


그래서 제4차 UN총회를 통해 이런 임무가 부여되었고 1950년 초부터 군사 감시반이 파견되곤 했었는데 규모는 8명일 정도로 매우 적었고 재정지원 부족으로 활동에 큰 지장이 오기도 했었음


뭐 임무가 계속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이 터지는것은 피할 수가 없는 처지였지만 이들의 보고가 UN안보리 긴급회의에 올라올 정도의 성과를 남기곤 했음


그렇다고 이들이 오래 활동했는가하면 또 아니여가지고 전쟁포로문제와 피난민 구호문제, 인권 문제등을 조사하려는 활동을 제대로 못했고 2차 한국위원단의 임기 종료와 함께 해산되고야 말았음


이후에 위원단을 계승한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UN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치뤄서 '통일독립 민주적 전국정부'를 수립(establishment of a unified, independent and democratic Government of all Korea)해야한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이것조차도 전쟁으로 통해 평화통일 논제가 깊숙히 처박히면서 아예 불가능했었음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을 비롯한 평화통일 진영이 힘을 얻는데에 어느정도의 대외적 영향을 끼치곤 했지만 어떻게보면 전쟁을 막을수도 있는 국제적인 요소라고 봐야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