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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속류적이며 비변증법적인 이해도 백낙청 식의 이해와 그 연원이 같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는 이들은 독재(dictatorship)에서 민주주의의 부정과 억압만을 바라본다. 그런 이들은 민주주의도 사실상 지배의 한 형태임을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란 부르주아 독재의 한 형태임을 간과한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투쟁은 같은 언어와 동일한 사건을 둘러싼 투쟁이다. 피지배계급의 투쟁을 심정적으로 옹호하는 이들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똑같이 쓰고 있는 ‘독재’라는 언어를 피해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폭력’의 문제도 그러하다. ‘비폭력’ 투쟁이었고 경찰의 ‘폭력’에 의해 우발적으로 폭력이 등장한 것이라고. 그런 식이라면 ‘독재’와 ‘폭력’은 지배계급만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 버린다. 인민 대중의 봉기가 일어나는 지점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똑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바로 그 지점이다. 2009년 5월 16일 토요일 대전에서 화물연대 박종태 열사의 투쟁이 위력적으로 전개된 후 5월 18일 월요일 조간신문들의 1면을 보았더니 확연하게 대조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중․동은 모두 집회 참가자들이 만장깃대로 무장하고 경찰을 몰아붙이는 사진을 전면에 실었다. 반면 ‘진보언론’이라 불리는 ≪한겨레≫와 ≪경향≫은 그 사건이 부각되지 않도록 피해갔다. 부딪치고 있는 쟁점을 회피하는 것은 벌써 패배의 시작이다. 박종태 열사가 왜 죽었고 노동자들이 무장하고 투쟁했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실은 묻혀져 버렸다. 결국 논쟁은 죽창이냐 죽봉이냐 만장깃대냐는 지엽적인 것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용산참사 사건 때도 마찬 가지다. ‘화재의 원인’이 신나와 화염병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쟁을 한다면 그것은 시작하기도 전에 져 있는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 노사과연, <맑스-레닌주의 문학 예술론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한 고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