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연관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찾아보니 정말 맞았네.
아인슈타인 본인도 사회주의 성향으로 인해 미국 망명 이후 반핵 운동과 매카시즘 등으로 인해 고초를 여러번 겪기도 했었고.
특히 냉전이 시작되려던 시기인 1949년에는 미국의 사회주의 잡지인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왜 사회주의인가?"를 기고하기도 했었음.
오스트리아 사민당이 2차 대전 종전 이후 10년 간의 연합군 군정 기간 동안 거국일치 정부 구성을 통해 분단을 막았던 것을 보면, 그때 한반도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정말 부러움이 안들 수가 없더라.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카를 레너처럼 우리도 여운형이라는 걸출한 위인이 있었는데...
오스트리아 사민당이 20세기 유럽 사회주의 정당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데, 한국에서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 같더라.
오스트리아 사민당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뭐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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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친구
한국물리학회
2019.01.25.
프리드리히 아들러(Friedrich Wolfgang Adler, 1879-1960)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창립자인 빅터 아들러(Victor Adler, 1852-1918)의 아들로 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가 자란 집인 빈의 알저그룬트 구(區) 베르크 거리 19번지에는 후일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살았고, 현재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물관이 되어 있다. 프리드리히는 정치보다 과학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취리히의 ETH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그는 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의 1년 후배였고, 아인슈타인과 커피하우스에 몰려다니는 등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대학 시절 이후에도 아인슈타인의 열렬한 팬으로 남았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는 취리히에서도 급진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쓰던 하숙방을 물려받아 살면서 스위스 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1897년에는 스위스 사민당과 아버지가 세운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제휴를 이루기도 했다. 그는 아인슈타인도 사회민주당에 입당시키려고 계속 설득했으나,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아인슈타인의 기질 탓에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인슈타인 역시 프리드리히를 자신이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열성적인 이상주의자”로 기억했다.
프리드리히는 물리학에서는 열역학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취리히 대학 물리학과의 알프레트 클라이너 교수 밑에서 조수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하고 그토록 애타게 바라던 일이 바로 이런 자리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갈수록 물리학보다는 마르크스와 계급투쟁에 더욱 이끌렸고, <투쟁 Der Kampf>이라는 잡지의 편집자로 활약했다. 그는 또한 열성적인 마흐 주의자로서 마흐의 70세 생일을 기념하는 토론회에 참가하고 <투쟁>지에 글을 썼다. 이 글은 레닌의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에도 인용된다. (물론 레닌의 이 책은 마흐 주의자를 공격하기 위한 책이므로, 책에서 아들러는 “철없는 강단철학 강사”라고 비난을 당한다.)
한편 취리히 대학의 클라이너 교수는 아인슈타인의 박사 학위 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학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적절한 경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며 베른 대학의 강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 한편으로 클라이너는 취리히 대학에 이론물리학 교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고, 마침내 1908년에 당국의 허락을 얻어냈다. 그러자 이제 그에게는 두 사람의 후보가 생겼다. 제자 아인슈타인과 조수 아들러.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리드리히는 열성적으로 아인슈타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에 대한 학문적인 존경심도 있었지만, 그의 낭만적인 기질이 아인슈타인이 학계에 적을 두지 않고 독학에 가까운 연구 활동을 하는 것에 대단히 감탄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는 이렇게 강변했다. “과거에 그를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겁니다. 그런 인물이 특허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곳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전 독일의 수치입니다.”
그해 6월 말에 클라이너는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기 위해 베른 대학교에 찾아갔다. 그런데 거기서 그가 본 것은 봉두난발의 젊은 강사(=아인슈타인)가 학생 한 명을 앉혀놓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원래 강의를 잘 하는 사람도 아니었던 데다가, 평가를 받는다는 생각이 그를 초조하게 만든 탓인지 그날의 강의는 그중에서도 심한 편이었다. 클라이너는 실망해서 돌아와서 “아인슈타인의 강의는 형편없다"라고 비판했다.
아인슈타인은 “내가 교수가 되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태연한 척했으나 내심으로는 몹시 낭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클라이너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제3자에게 비판한 데 항의하는 한편 다시 기회를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아들러는 더욱 적극적으로 아인슈타인을 홍보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을 영입할 수 있는데도 나를 임명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좀 어리둥절하게 들리는 말이다.
어쨌든 클라이너도 아인슈타인에게 다시 기회를 줄 용의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요청으로 두 번째 평가는 다음 해 1월 취리히에서 열린 학회 자리에서 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아인슈타인이 만족할만한 강의를 했다. 그 밖에도 아인슈타인의 유대인 혈통이 약간의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결국 1909년 2월에 취리히 대학의 임용위원회는 아인슈타인을 임명하는 데 찬성했다.
뉴욕타임스의 데니스 오버바이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이 임명되자 아들러는 큰 짐을 벗은 것 같다고 기록한 반면, 아인슈타인은 아들러를 순교자 콤플렉스를 가진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만, 고대하던 자리를 얻었기에 그를 대놓고 비난하진 않았다고 한다. 원, 은혜 모르는 사람 같으니. 아인슈타인의 뻔뻔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교수 임용을 일단 거절했다. 대학이 제시한 봉급이 특허청에서 현재 받고 있는 것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교섭을 거친 후 대학은 그의 연봉을 베른에서 받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맞추어 주었고 아인슈타인은 비로소 이를 수락했다. 그 해 5월 마침내 아인슈타인은 공식적으로 학계에 들어왔다. 친구에게 말했다는 임용 소감 역시 아인슈타인의 건방진 모습을 잘 보여준다. “드디어 나도 매춘부 조합에 공식적으로 가입했다네.”
아인슈타인 가족이 취리히로 이사해서 살림을 시작한 아파트는 바로 프리드리히가 아내와 살고 있던 건물이었다. 이제 두 가족은 더욱 가까워져서 늘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 시절에 프리드리히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인슈타인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에 대한 제 호감은 더욱 견고해짐을 느낍니다.”라고 적혀 있다. 두 사람은 저녁마다 만나서 물리학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의견이 잘 맞았고 여러 면에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이해조차 하지 못할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같습니다.” 역시 프리드리히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그가 특히 아인슈타인을 존경하는 이유는 가장 독립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아들러가 정치에 빠져들지 말고 물리학에 집중하도록 설득하면서, 아들러가 머지않아 여기서 자신의 후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1910년 3월에 프라하의 카를 대학으로부터 정교수로 초빙하려는 제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막 비상하려던 시절이다. 그러나 1911년 아인슈타인이 프라하로 떠난 후 아들러는 결국 물리학을 그만두고 빈으로 돌아가서 사회민주당 서기가 되어 파란만장한 정치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정당과 같은 조직에 충성하는 것은 사고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인슈타인은 아들러에 대해서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지적인 사람이 어떻게 정당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가장 아름다운 젊은 날의 일부를 함께 하고 두 사람의 인생은 갈라진다.
아들러는 당 좌파의 대표로 활동하다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반전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당의 주류는 전쟁을 지지했고, 심지어 그의 아버지 빅터 아들러도 전쟁 지지 쪽이었다. 1916년 10월 21일,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지적이고 순수한 이상주의자’로 기억하는 프리드리히 아들러는 빈의 마이슬 운트 샤덴 호텔 식당에서, 오스트리아 수상이던 카를 폰 슈튀르케(Karl von Stürgkh, 1859-1916)에게 권총 세 발을 쏘아 사살했다.
아들러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반전을 지지하는 여론에 힘입어 18년형으로 감형되어 복역했다. 1918년 전쟁이 끝난 후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들은 아들러의 석방을 청원했고, 황제 카를 1세가 이를 받아들여 사면되고 석방되었다. 이후 황제가 폐지되고 국가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그는 노동자 평의회의 지도자로서 오스트리아 국가 평의회에서 일했다. 이후에는 제2 인터내셔널의 총서기를 맡아서 국제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들러는 미국으로 피신했으며, 오스트리아 노동 위원회를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차츰 정치에 관한 일을 내려놓았다.
미국에서 아들러와 아인슈타인이 다시 만났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프리드리히 아들러는 유럽으로 돌아와서 스위스에서 살면서 여러 문헌을 정리하며 조용히 지내다가 1960년 80세로 사망했다.
참고문헌
[1] 데니스 오버바이 지음, 김한영, 김희봉 옮김, 젊은 아인슈타인의 초상 (사이언스북스, 2006).
[2] 월터 아이작슨 지음, 이덕환 옮김, 아인슈타인, 삶과 우주 (까치, 2007).
[3] 하버드 대학의 과학 철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피터 갤리슨은 2009년 1월 21일 Joseph Pellegrino University에서 이 내용에 관해 “상대성 이론의 자객 Assassin of Relativity”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일이 있다.
저자 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물리학회 '물리학과 첨단기술' 실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스핀>, <불멸의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 <LHC> 등이 있다.
아인슈타인 본인도 사회주의 성향으로 인해 미국 망명 이후 반핵 운동과 매카시즘 등으로 인해 고초를 여러번 겪기도 했었고.
특히 냉전이 시작되려던 시기인 1949년에는 미국의 사회주의 잡지인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왜 사회주의인가?"를 기고하기도 했었음.
오스트리아 사민당이 2차 대전 종전 이후 10년 간의 연합군 군정 기간 동안 거국일치 정부 구성을 통해 분단을 막았던 것을 보면, 그때 한반도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정말 부러움이 안들 수가 없더라.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카를 레너처럼 우리도 여운형이라는 걸출한 위인이 있었는데...
오스트리아 사민당이 20세기 유럽 사회주의 정당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데, 한국에서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 같더라.
오스트리아 사민당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뭐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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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친구
한국물리학회
2019.01.25.
프리드리히 아들러(Friedrich Wolfgang Adler, 1879-1960)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창립자인 빅터 아들러(Victor Adler, 1852-1918)의 아들로 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가 자란 집인 빈의 알저그룬트 구(區) 베르크 거리 19번지에는 후일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살았고, 현재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물관이 되어 있다. 프리드리히는 정치보다 과학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취리히의 ETH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그는 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의 1년 후배였고, 아인슈타인과 커피하우스에 몰려다니는 등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대학 시절 이후에도 아인슈타인의 열렬한 팬으로 남았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는 취리히에서도 급진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쓰던 하숙방을 물려받아 살면서 스위스 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1897년에는 스위스 사민당과 아버지가 세운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제휴를 이루기도 했다. 그는 아인슈타인도 사회민주당에 입당시키려고 계속 설득했으나,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아인슈타인의 기질 탓에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인슈타인 역시 프리드리히를 자신이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열성적인 이상주의자”로 기억했다.
프리드리히는 물리학에서는 열역학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취리히 대학 물리학과의 알프레트 클라이너 교수 밑에서 조수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하고 그토록 애타게 바라던 일이 바로 이런 자리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갈수록 물리학보다는 마르크스와 계급투쟁에 더욱 이끌렸고, <투쟁 Der Kampf>이라는 잡지의 편집자로 활약했다. 그는 또한 열성적인 마흐 주의자로서 마흐의 70세 생일을 기념하는 토론회에 참가하고 <투쟁>지에 글을 썼다. 이 글은 레닌의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에도 인용된다. (물론 레닌의 이 책은 마흐 주의자를 공격하기 위한 책이므로, 책에서 아들러는 “철없는 강단철학 강사”라고 비난을 당한다.)
한편 취리히 대학의 클라이너 교수는 아인슈타인의 박사 학위 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학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적절한 경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며 베른 대학의 강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 한편으로 클라이너는 취리히 대학에 이론물리학 교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고, 마침내 1908년에 당국의 허락을 얻어냈다. 그러자 이제 그에게는 두 사람의 후보가 생겼다. 제자 아인슈타인과 조수 아들러.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리드리히는 열성적으로 아인슈타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에 대한 학문적인 존경심도 있었지만, 그의 낭만적인 기질이 아인슈타인이 학계에 적을 두지 않고 독학에 가까운 연구 활동을 하는 것에 대단히 감탄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는 이렇게 강변했다. “과거에 그를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겁니다. 그런 인물이 특허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곳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전 독일의 수치입니다.”
그해 6월 말에 클라이너는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기 위해 베른 대학교에 찾아갔다. 그런데 거기서 그가 본 것은 봉두난발의 젊은 강사(=아인슈타인)가 학생 한 명을 앉혀놓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원래 강의를 잘 하는 사람도 아니었던 데다가, 평가를 받는다는 생각이 그를 초조하게 만든 탓인지 그날의 강의는 그중에서도 심한 편이었다. 클라이너는 실망해서 돌아와서 “아인슈타인의 강의는 형편없다"라고 비판했다.
아인슈타인은 “내가 교수가 되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태연한 척했으나 내심으로는 몹시 낭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클라이너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제3자에게 비판한 데 항의하는 한편 다시 기회를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아들러는 더욱 적극적으로 아인슈타인을 홍보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을 영입할 수 있는데도 나를 임명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좀 어리둥절하게 들리는 말이다.
어쨌든 클라이너도 아인슈타인에게 다시 기회를 줄 용의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요청으로 두 번째 평가는 다음 해 1월 취리히에서 열린 학회 자리에서 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아인슈타인이 만족할만한 강의를 했다. 그 밖에도 아인슈타인의 유대인 혈통이 약간의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결국 1909년 2월에 취리히 대학의 임용위원회는 아인슈타인을 임명하는 데 찬성했다.
뉴욕타임스의 데니스 오버바이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이 임명되자 아들러는 큰 짐을 벗은 것 같다고 기록한 반면, 아인슈타인은 아들러를 순교자 콤플렉스를 가진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만, 고대하던 자리를 얻었기에 그를 대놓고 비난하진 않았다고 한다. 원, 은혜 모르는 사람 같으니. 아인슈타인의 뻔뻔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교수 임용을 일단 거절했다. 대학이 제시한 봉급이 특허청에서 현재 받고 있는 것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교섭을 거친 후 대학은 그의 연봉을 베른에서 받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맞추어 주었고 아인슈타인은 비로소 이를 수락했다. 그 해 5월 마침내 아인슈타인은 공식적으로 학계에 들어왔다. 친구에게 말했다는 임용 소감 역시 아인슈타인의 건방진 모습을 잘 보여준다. “드디어 나도 매춘부 조합에 공식적으로 가입했다네.”
아인슈타인 가족이 취리히로 이사해서 살림을 시작한 아파트는 바로 프리드리히가 아내와 살고 있던 건물이었다. 이제 두 가족은 더욱 가까워져서 늘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 시절에 프리드리히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인슈타인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에 대한 제 호감은 더욱 견고해짐을 느낍니다.”라고 적혀 있다. 두 사람은 저녁마다 만나서 물리학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의견이 잘 맞았고 여러 면에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이해조차 하지 못할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같습니다.” 역시 프리드리히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그가 특히 아인슈타인을 존경하는 이유는 가장 독립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아들러가 정치에 빠져들지 말고 물리학에 집중하도록 설득하면서, 아들러가 머지않아 여기서 자신의 후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1910년 3월에 프라하의 카를 대학으로부터 정교수로 초빙하려는 제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막 비상하려던 시절이다. 그러나 1911년 아인슈타인이 프라하로 떠난 후 아들러는 결국 물리학을 그만두고 빈으로 돌아가서 사회민주당 서기가 되어 파란만장한 정치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정당과 같은 조직에 충성하는 것은 사고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인슈타인은 아들러에 대해서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지적인 사람이 어떻게 정당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가장 아름다운 젊은 날의 일부를 함께 하고 두 사람의 인생은 갈라진다.
아들러는 당 좌파의 대표로 활동하다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반전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당의 주류는 전쟁을 지지했고, 심지어 그의 아버지 빅터 아들러도 전쟁 지지 쪽이었다. 1916년 10월 21일,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지적이고 순수한 이상주의자’로 기억하는 프리드리히 아들러는 빈의 마이슬 운트 샤덴 호텔 식당에서, 오스트리아 수상이던 카를 폰 슈튀르케(Karl von Stürgkh, 1859-1916)에게 권총 세 발을 쏘아 사살했다.
아들러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반전을 지지하는 여론에 힘입어 18년형으로 감형되어 복역했다. 1918년 전쟁이 끝난 후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들은 아들러의 석방을 청원했고, 황제 카를 1세가 이를 받아들여 사면되고 석방되었다. 이후 황제가 폐지되고 국가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그는 노동자 평의회의 지도자로서 오스트리아 국가 평의회에서 일했다. 이후에는 제2 인터내셔널의 총서기를 맡아서 국제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들러는 미국으로 피신했으며, 오스트리아 노동 위원회를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차츰 정치에 관한 일을 내려놓았다.
미국에서 아들러와 아인슈타인이 다시 만났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프리드리히 아들러는 유럽으로 돌아와서 스위스에서 살면서 여러 문헌을 정리하며 조용히 지내다가 1960년 80세로 사망했다.
참고문헌
[1] 데니스 오버바이 지음, 김한영, 김희봉 옮김, 젊은 아인슈타인의 초상 (사이언스북스, 2006).
[2] 월터 아이작슨 지음, 이덕환 옮김, 아인슈타인, 삶과 우주 (까치, 2007).
[3] 하버드 대학의 과학 철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피터 갤리슨은 2009년 1월 21일 Joseph Pellegrino University에서 이 내용에 관해 “상대성 이론의 자객 Assassin of Relativity”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일이 있다.
저자 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물리학회 '물리학과 첨단기술' 실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스핀>, <불멸의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 <LHC> 등이 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687349
오스트리아 사민당이라. 스탈린이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에서 오토 바우어의 문화-민족 자치론을 깔때 자주 언급됐던 정당이었지. 계급성을 담보로 하지 않은, 특정 민족이 타지에 알박기만 하면 소수에 불과해도 자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이론이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 사민당 이론가들에게서 나왔음. - dc App
오스트리아 사민당과 관련해서 이론쪽으로는 오토 바우어의 '민족문제와 사회민주주의'가 우리말로 번역되어있음. 2공화국(연합군 분할통치 이후) 사민당에 대해서는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를 추천함. 2공화국 정치, 경제 전반을 다루는 책인데 양당중 하나인 기사당보다도 사민당이 확실히 돋보이더라
바우어 책을 시간나면 한번 봐야겠네. 스탈린이 1913년 빈에서 쓴 논문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에서 반박용으로 많이 인용됐는데 번역서가 있다는게 놀라울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