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칙
1. 계급투쟁, 그 역할과 의미
- 단일한 인류는 없다. - 계급적 인간만이 존재한다. - 노예와 주인들 |
오늘날의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는 그 이전의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단일한 인류’를 제공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는 그 상태와 역할에 따라 사회적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두 진영으로 나뉜다. 한 편에는 (광의의)프롤레타리아트가 있고, 한 편에는 부르주아지가 있다.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세기 동안 고통스러운 육체적 노동을 감내하여왔지만 그 과실果實은 그들이 아니라 자산, 권위, 문화적 생산물(화학, 교육, 예술)을 소유한 다른 자들, 부르주아지에게 돌아갔다. 노동대중에 대한 사회적 노예화와 착취는 현대 사회가 발을 디딘 근간이 된다. 이러한 노예화화 착취가 없이는 사회가 존재할 수 없다.
이로써 어느 시점에는 공개적이고 폭력적이 되고, 다른 때에는 외형상 느리고 불가시한 계급투쟁이 형성된다. 계급투쟁은 계급적 필요, 필수, 그리고 노동자를 위한 정의를 반영한다.
사회적 영역에서 모든 인간의 역사는 노동대중의 권리, 자유, 더 나은 삶을 위한 끝없는 투쟁의 연쇄로 설명될 수 있다. 인간 사회의 역사에서 계급투쟁은 언제나 사회의 형태와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모든 국가의 사회적 · 정치적 체제는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모든 사회의 근본적 구조는 우리에게 계급투쟁이 모아내고 발견될 수 있는 무대로 보인다. 계급투쟁의 세력들의 상대적 위치에 발생하는 가장 작은 변화조차도 사회의 구조에 지속적인 수정을 야기한다.
이것이 총체적이고 세계적인 관점에서 계급사회에서의 계급투쟁의 역할이라 하겠다.
2. 폭력적 사회혁명의 필요성
대중에 대한 폭력적 노예화와 착취의 원리는 현대사회의 기반을 구성한다. 경제, 정치, 사회적 관계 등 이 원리의 존재적 현현은 계급적 폭력에 의존한다. 계급적 폭력의 도구는 권위, 경찰, 군대, 사법부 등이 있다. 사회의 모든 것은, 모든 기구를 독립적으로 보면 국가의 전체 체계마저도 자본주의의 성벽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성벽에서 그들은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사회의 가장 사소한 것을, 근간을 위협하는 어떠한 운동이라도 힘으로 탄압할 준비를 마치고 있다.
동시에 사회의 체계는 노동대중을 무지와 정신적 빈곤의 상태로 유지한다. 사회의 체계는 노동대중의 사기와 지적 수준을 높이는 것을 억제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체계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의 기술적 진화와 정치체계의 완성이라는 현대사회의 진보는 지배계급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투쟁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노동해방의 결정적 순간을 연기한다.
현대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사회로 변혁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적 사회혁명을 통한 방법밖에 없음을 결론내릴 수 있다.
3. 아나키스트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노동자의 노예화와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열망으로부터 촉발된 계급투쟁은 억압 속에서도 아나키즘의 이상을, 계급과 국가에 기초한 사회체계를 온전히 도태시키고 이를 노동자 자주경영에 근거한 자유롭고 비국가주의적인 노동자들의 사회로 대체하고자하는 사상을 낳았다.
그렇기에 아나키즘은 학자나 철학자의 추상적 개념으로부터 비롯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의 직접투쟁으로부터 비롯한다. 이 투쟁은 노동자의 필요와 필수로부터 나오고, 노동자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나오며, 그 열망은 노동대중의 투쟁 속에서, 인생의 가장 영웅적인 시기가 되었을 때 살아난다.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의 위대한 아나키스트 사상가들은 아나키즘 사상을 발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 사상을 대중으로부터 발견했다. 그들의 사상과 지식은 이를 구체화하고 확산시키는 것을 도왔을 뿐이다.
아나키즘은 개인적 노력의 결과물도 개인적 연구의 대상도 아니다.
또한 아나키즘은 인본주의적 열망의 산물이 아니다. 단일한 인류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을 오늘날 인류에 대한 헌사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 아나키즘에 전체 인간에 대한 인본주의적 성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거짓에 불과하다. 이 거짓은 필연적으로 현상을 정당화하고 새로운 착취를 정당화할 것이다.
아나키즘은 대중이 일반적으로 모든 인류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싶어 하며, 현재나 미래의 인류의 운명은 착취된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관점에서만 인본주의적이다. 만약 노동대중이 승리한다면 모든 인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만약 노동대중이 패배한다면, 폭력, 착취, 노예제, 억압은 이전과 같이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
아나키스트 사상의 탄생, 개화, 실현은 노동대중의 삶과 투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아나키스트 사상은 노동대중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있다.
아나키즘은 현대의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를 노동자들에게 그 노동의 생산물을, 자유를, 독립성을, 사회적 · 정치적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로 변혁시키기를 원한다. 이 다른 사회는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사회가 될 것이다. 이 사회에서 사회적 연대와 자유로운 개인은 최대로 드러날 것이고 이 두 이상은 완벽히 조화를 이룰 것이다.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는 물리적이건 지적이건, 사회적 가치의 유일한 창조자는 노동자라고 믿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노동자만이 사회적 경제적 생활을 운영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는 비非 노동계급의 존재를 옹호하지도, 허용하지도 않는다.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의 사회에 존재하는 한, 비 노동계급이라 해도 어떠한 의무를 부여 받지는 않을 것이다. 비 노동계급이 생산적이 되고, 다른 이들과 같은 조건 아래의 코뮌주의 사회에서, 사회의 자유로운 구성원으로서 다른 구성원들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누리며 살고 싶어 할 때 중단될 것이다.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는 개인과 인민대중을 향한 모든 착취와 폭력을 멈추고자 한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모든 부문을 단결시키고, 모든 개인에게 평등한 위치를 확보하고, 최대의 후생을 확립하기 위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이 필요하다. 그 기반은 생산의 수단과 도구(산업, 운수, 토지, 원자재 등)에 대한 공동소유가, 평등과 노동계급의 자주경영이라는 원칙 위에 건설된 경제 조직이 될 것이다.
노동자가 스스로 운영하는 사회의 한계 속에서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는 각 개개인의 가치와 권리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확립한다.(이것은 “총체적” 개인성이나, “신비로운 개인성”이나, 개인성이라는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는 개인을 의미한다.)
4.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한 형태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현대 사회의 두 대립적 계급,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두 계급의 혼합이 자본주의의적 사유재산의 근간이 된다. 이러한 혼합은 의회와 민족 대의 정부로 드러난다.
공식적으로, 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단결의 자유, 평등 등을 법으로 규정한다.
현실적으로 이 모든 자유들은 상대적이다. 이 모든 자유는 그것이 부르주아지와 같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허용된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의 원칙을 불가침의 원칙으로 보존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가 전체 경제를, 언론을, 교육을, 과학을, 예술을 통제할 권리를 준다. 그리고 이것이 부르주아지를 그 사회의 절대적 주인으로 만든다. 경제 생활권을 독점함으로써 부르주아지는 정치권에서 무제한적 권력을 확립할 수 있다. 그 결과 민주주의가 허용하는바 의회와 대의정부는 부르주아지의 집행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의 형상 뒤에, 허구의 민주적 보장 뒤에 숨은 부르주아 독재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5. 국가와 권위에 대한 부정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국가가 복잡한 정치적, 시민적, 사회적 관계를 조율하며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기구라고 정의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이 정의에 완전히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정의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한다. 법과 정의의 근간이 대다수 인민이 소수에 예속되는 것이라는 명제가 있어야, 이것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목적이라는 논의가 있어야 이 정의가 완전해질 것이다.
국가는 부르주아가 확보한 조직된 폭력임과 동시에, 그 집행기구의 체계다.
좌파들, 특히 볼셰비키들 역시 부르주아 국가와 권위가 자본에 복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권위와 국가가 사회주의 정당의 손에 들어온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당들은 ‘사회주의적’ 권위와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위한 존재들이다. 이들 중 일부(사민주의자들)는 권력을 평화적, 의회주의적 수단으로 확보하고자 하고, 다른 이들(볼셰비키, 사회혁명당 좌파)은 권력을 혁명적 수단으로 확보하고자 한다.
아나키즘은 이 둘 모두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노동해방 투쟁을 저해한다고 생각한다.
권위는 언제나 인민대중의 착취와 예속에 의존한다. 모든 권위는 착취로부터 태어났거나 착취를 위해 창조되었다. 폭력과 착취가 없는 권위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
국가와 권위는 대중으로부터 모든 주도권을 빼앗아가고, 창조와 자유로운 행동의 영혼을 죽이며, 그들에게서 복종을, 기대를, 사회적 사다리를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지도자를 향한 맹신을, 권위를 나누고 있다는 환상을, 노예의 심리상태를 길러낸다.
그렇기에 노동해방은 오로지 광대한 노동대중의 직접적 혁명 투쟁과 자본주의 체계에 대항하는 계급 조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현재의 질서를 긍정한 채 평화로운 수단으로 사회민주당이 권력을 확보하는 것은 노동 해방이라는 과업에서 단 한 발짝도 전진하는 길이 아니다. 실질적인 힘, 결과적으로 실질적인 권위는 경제와 정치를 통제하는 부르주아지에게 여전히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의 형태에서 사회주의적 권력의 역할은 체제 변혁이 아닌 개량으로 축소된다. (독일, 스웨덴, 벨기에 등의 사회민주당을 보라)
사회적 봉기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조직함으로써 권력을 확보하는 것 역시 노동의 진정한 해방이라는 대의에 전혀 복무할 수 없다.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어야 할 국가는 그 자신의 필요와 성격에 따라 불가피하게 왜곡된다. 국가는 그 자체로 목표가 되고, 특정한 특권 계층을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권위와 국가를, 언제나의 대중에 대한 폭력적 예속과 착취를 재확립하게 된다. (볼셰비키의 “노동자-농민 국가”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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