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백하게 고백한다.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나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것이다. 거의 종교이다. 나는 호흡을 멈추지 않는 한 포기하지 않고 사회주의를 주장할 것이다. 사회주의의 주장은 무가치한 나의 생애에서 최후의 호흡에 이르기까지 유일한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명백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제3장 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의 독재
유럽 대륙에서 입헌적 의회주의의 고전적 시대는 루이 필립의 시민적 왕제이며그 고전적 대표자는 기조였다. 입헌적 의회주의에 대해서는 낡은 군주제와 귀족제는이미 극복되었지만 다가오는 민주주의는 이에 대해서 방파제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되는 혼돈된 흐름으로서 나타났다. 군주제와 민주제간의 공정하고 중간자로서 입헌적 ·의회주의적인 시민적 왕제(Bürgerkönigtunn)가 떠다니고 있었다. 모든 사회문제는 이성적인 공개성과 토론에 의해서 의회를 통하여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중용(juste-milieu)이라는 말은 이러한 사고의 가장 내적인 핵심에서 나오며, 시민적 왕제와 같은 개념은 이미 그 말속에 중용과 원리상의 타협이라는 완전한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의회주의를 폐기하는 독재의 개념이 다시 현실적으로 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립해서가아니고 이러한 의회주의적인 입헌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 1848년이라는 위기적인 해는민주주의의 해인 동시에 독재의 해이기도 하였다. 이 양자는 의회주의적인 사고를 가진시민적인 자유에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두 개의 반대자의 중간에서 토론하며 균형을 만들며 원리적으로 매개하는 데에만 시종일관하였다. 이 두 개의 반대자는 함께 이 사상에 정력적으로 대항하였으므로, 이러한 조정을 시도하는 토론은 피비린내 나는 결전간의 막간(Interim)처럼 생각되었다. 이 두 개의 반대자는 균형을 폐기하여 직접성과 명료성, 즉 독재로써 이에 응수하였다.여기에는 난폭한 표어로 가령 특징지운다면 합리주의의 명료성과 비합리적인 것의 직접성이 존재한다. 직접적인,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합리주의에서 생겨난 독재에는이미 하나의 전통이 선행하고 있었다. 즉 계몽의 교육독재, 철학적 자코뱅주의, 오성의강제지배, 합리주의적 및 고전주의적 정신에서 나온 형식적 통일성, 「철학과 군도(軍刀)의동맹49)이 그것이다. 나폴레옹의 패배에 의해서 이것은 끝나고 새로이 발생한 역사감각에 의해서 이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극복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사철학의 형식에서 합리주의적 독재의 가능성은 더욱 존속하며 정치적인 이념으로서 살아있었다. 이이념의 담당자는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이며 그 궁극의 형이상학적 확증은헤겔의 역사적 논리의 기반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주의가 공상으로부터 과학으로 이행하였다는 것은 그것이 독재를 포기하였다는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계대전이래 약간의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사회주의에 대해서 독재에의 용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공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믿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징후이다. 이것은 어떻게 과학이 오늘날의 세대에대해서 사회적 행동의 명백한 기초일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과학적 사회주의에는 독재의 가능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다만, 과학이라는 말은 정당하게 이해되어야 하며 단순한 엄밀과학적인 기술성에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확실히 이러한 자연과학적인 과학성은 독재의 기초가 되는 것도 아니라면, 다른 어떠한 정치제도 내지 정치적 지배의 기초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과학적사회주의의 합리주의는 자연과학이 나아갈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멀리까지 나아간다.이러한 사회주의에서는 계몽시대의 합리주의적인 신념이 더욱 격렬하게 강조되며,더구나 하나의 새로운 거의 환상적인 진로를 취했는데, 만약 이 진로가 그 본래의힘을 보유할 수 있다면 그 강도에서 아마 계몽시대의 합리주의와 필적할 수 있었을것이다.
이 사회주의는 자신을 과학적이라고 인정합으로써 비로소 본질적으로 오류 없는통찰의 보증을 가지기에 이르렀다고 믿으며, 그리하여 폭력행사의 권리를 주장한 수있었다. 역사직으로는 1848년이레, 즉 사회주의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되고, 그 이님을어느 날엔가 실현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므로 과학성의 의식이 등장한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과학성에서는 실제적인 관념과 이론적인 관념이 결합하고 있다.자주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떤 부정적인 것을 유토피아의 기부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표현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만이라고 한다. 즉 이제부터는 의식적으로 정치적 및사회적 현실에 관여하며, 그리고 밖으로부터 환상이나 가공의 이상에 따라서 현실을형성하는 대신 현실에 고유한, 올바르게 인식된 내재적 조건들에 따라서 현실을 형성하려고 결의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주의의 많은 측면과 가능성중에서 그것에 대한 궁극의 것, 즉 정신적인 의미에서 결정적인 논거, 즉 사회주의적신념의 최후의 명증을 탐구하는 것이다. 확신을 갖는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 사회적 · 경제적 및 정치생활의 올바른 인식과 이 인식에서 생기는 올바른 실천을 발견하고, 사회생활을 객관적으로 그 모든 실질적인 필연성에서 그 내실로부터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생활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에서도 엥겔스에서도또한 아마 지적인 파나티즘을 가질 수 있는 모든 마르크스주의자에서도, 역사적 발전의특수성에 대한 의식이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으므로, 그들이 의미하는 과학성을 자연과학적인 방법과 엄밀성을 사회철학과 정치의 문제에 응용하려는 많은 시도와 동일시할수는 없다. 과연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즐겨 그 사상의 자연과학적인 엄밀성에 대해서말하며, 사물이 역사적·유물론적 법칙에 따라서 생기하는 「불가피한 필연성」에 대해서적고 있다. 많은 부르주아적 사회철학자들은 이것을 반박하여 역사적인 사물은 천문학이별의 운행을 계산하듯이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불가피한 필연성을 인정하더라도, 도래할 일식을 초래하기 위해서 정당을 조직한다는 것은 이상하리라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사고의 합리주의는 독재의 개념에 대해서중요한 또 하나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기술이 각각의 정밀한 자연과학과결부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과 엄밀하게 결정론적인 세계관의 도움을받아서 자연의 법칙성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는 방법을 획득하려고 하는 과학성에만 진력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에서의 과학적인 것이 만약 그와 같은 자연과학성에있다고 한다면, 「자유의 왕국에의 비약은 절대적인 기술성의 나라에로 비약할 뿐일것이다. 그것은 낡은 계몽의 합리주의이며 수학적 · 물리적인 정밀함을 지닌 정치를 획득하려고 하는, 18세기 이래 즐겨 사용된 시도의 하나이며, 단 하나 틀린 곳은 18세기에서는더욱 지배적이었던 강한 도덕주의를 이론적으로 포기하였다는 것뿐일 것이다. 그 결과는모든 합리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도적인 이성주의자의 독재로 끝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학 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르크스가 인류사의 변증법적 발진의 사상을 보유하고이 발전을 하나의 구체적인, 일회적인 내재적 유기의 힘은 하이 자기를 자기 자신안으로부터 산출하는 상반 적인(11uitthetisult) 과정으로서 관장하는 1. 방식 수에 있다.그가 발전을 경제적·기술적인 것으로 옮겼다는 것은 그의 사상의 구조를 이느 하나변경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조에 불과하며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예컨대 그것은 심리학적으로는 경제적 요인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직관에서, 제게직으로는 기술에 나타나는 인간의 활동을 역사적 과정의 자유로운 주인을 이루고 운명의 비합리성을 지배하는 주인이려고 하는 노력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유의 왕국에 의비약은 변증법적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기술의 도움만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해서 정치적 행동 대신에 새로운기계를 발명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장래의 공산주의사회에서도 새로운 기술적·화학적인 발견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다시 이 공산주의 사회의 기초를 변화시키고 하나의 혁명을 필연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되기 때문이다.왜냐하면 미래의 사회는 기술적 발전을 극도로 촉진하고 조장할 것이 틀림없음에도불구하고, 더구나 다른 한편 새로운 계급형성의 모든 위험에서 항상 옹호되고 있다고가정하는 것은 본래 전적으로 이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대론은 모두 매우그럴듯하게 들리는데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핵심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신념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데 더구나 그것은 사회적 현실의올바른 인식을 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의식은 하나의 절대적 성격을 획득한다.즉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적인 발전의 사상을 그 속에 내포하며, 더구나 그 구체성 안에계몽의 추상적인 합리주의가 가질 수 없었던 명증을 가지는 하나의 합리주의인 것이다.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은 장래의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기계적으로 계산되고 기계적으로달성된 결과가 가지는 하나의 기계적인 확실성을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며, 장래의 일을때의 흐름에, 즉 자기를 자기 자신 속에서 산출하는 역사적 사건의 구체적 현실성에맡기는 것이다.
구체적인 역사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야말로 마르크스가 결코 포기하지 않은 획득물이었다. 그러나 헤겔의 합리주의는 역사 그 자체마저 구성하려고 하는 용기를 지니고있었다. 능동적인 인간에 대해서 현재라는 시대와 현재의 순간을 무조건적으로 확실하게파악하는 것 이외에는 이미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변증법적인 역사구성의도움을 빌려 비로소 과학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의과학성은 헤겔의 역사철학의 원리에 입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헤겔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며,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을 다시 상세히하기 위함도 아니며, 단지 마르크스주의 논리의 핵심과 그 특수한 독재의 개념을 결정하기위해서는 이 점에 관한 헤겔의 역사적 변증법과의 관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기때문이다. 여기에 일정한 사회이론상의 구성과 하나의 합리주의적인 독재로 인도하는
곳의 일정한 종류의 형이상학적 명증(metaphysische Evidenz)이 있는 것이 명백하게 될 것이다.
변증법적 발전과 독재를 서로 결합한다는 것에는 확실히 어려움이 따른다. 왜냐하면 독재는 일련의 연속적 발전의 중단, 즉 유기적인 진화에 대한 기계적인 개입과 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발전과 독재는 일견 서로 배제하는 것 같다. 대립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자기 발전하는 세계정신의 무한한 과정은, 그것 자신에의 대립자인 독재도 자기 중에 넣어서 그럼으로써 독재로부터 그 본질인 결단도 제거해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발전은 중단 없이 진전하며 중단도 그것을 전진시키기 위한 부정으로서 거기에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본질적인 것은, 예외는 외부로부터는, 즉 발전의 내재성 밖에서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토론과 같은 발전을 중단하는 도덕적 결단이라는 의미에서의 독재는 확실히 헤겔의 철학에서는 문제가 될 수 없다. 서로 대립하는 사물이라 할지라도 서로 침투하며, 모든 것을 은폐하는 발전 속에 합체시킨다. 도덕적 결단의 양자택일, 즉 명백하고 단호한 준별은 이 헤겔의 체계에는 들어갈 여지가 없다. 독재자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토론에 있어서의 하나의 요소가 되며, 확고하게 진행하는 발전의 하나의 요소가 된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명령 역시 이 세계정신의 연동 운동에 동화된다. 헤겔의 철학은 선과 악의 절대적인 준별을 기초지을 수 있는 윤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철학에 대해서 선이란 변증법적 과정의 각각의 단계에서 이성적인 것이며, 따라서 또한 현실적인 것이 된다. 선이란 (여기서 크리스티안 야넨츠키[Chr. Janentzky]의 적절한 정식을 인용한다면) 정당한, 변증법적인 인식과 의식성이란 의미에서의 「시대에 적합한 것」이다. 만약 세계사가 세계의 법정이라면 그것은 최종심이 아닌, 또한 확정적으로 선별된 판결이 아닌 소송이다. 악은 비현실적이며 무엇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것인가가 생각되는 한에서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것은 또한 오성의 잘못된 추상. 자기 자신에게 제한된 개별적인 일과성의 혼란으로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와 같이 작은 영역에서만, 즉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배제하고, 잘못된 가상(假像)을 배제하기 위해서만 독재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부차적인 것, 일시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것의 본질적인 부정이 아니며, 중요하지 않은 폐품 처리일 것이다. 피히테의 합리주의 철학에 의한 경우와는 달리, 여기서 강제지배는 거부되고 있다. 헤겔은 피히테에 반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즉 세계가 신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며 인간이 그 가운데 어떤 목적을 가져와서, 추상적인 있어야 할 모습에 따라서 그것을 구축할 것을 세계가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폭한 추상일 것이다.라고, 당위는 무력(無力)이다. 정당한 것은 또한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있다는 것 없이 단지 그런 있어야할 것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며 생에 대한 주관적인 억제이다.
19세기가 18세기의 합리주의를 넘어선 가장 중요한 발자취는 헤겔과 피히테의 이러한 대립 속에 있다. 도덕적 준별의 절대성은 해체된 것이기 때문에 독재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여전히 구래의 합리주의의 일관된 진행과 고양만은 헤겔의 철학에 남아 있다. 의식된 인간적인 행위가 비로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인간을 「즉자적 존재의 자연적인 유한성에서 「대자적 존재라는 보다 높은 단계로 몰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경험적인 것의 우연성과 자의성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 따라서 세계사적인 사건의 억제하기 어려운 진전이 그를 넘어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철학이 관조에 머무르는 한, 거기에 독재가 들어갈 여지는 없다. 그러나 헤겔 철학이 능동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자마자 사정은 달라진다. 구체적인 정치적 및 사회적 실제에서 보다 높은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저위대한 세계사적 진전의 담당자로서 임하는 자는 제약성이란 저항을 뛰어 넘어 실질적으로 필연적인 것」(sachlich Notvendige)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의 의사는 여기서도 부자유로운 자를 자유케 할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하나의 교육 독재이며 세계사가 항상 전진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태에 반하는 것의 강제적 배제가 끊임없이 필요하게 되며, 따라서 독재가 영구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도 나타나는 것은 헤겔 철학에 의하면, 모든 사건 중에 존재한다는 보편적인 양면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철학 자신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즉 그 발전개념은 독재를 한쪽에서는 지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 그것을 영구적인 것이라고 선언할 수도 있다. 인간의 활동에 대해서는 보다 높은 단계에 있는 것이 의식적으로 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것에 대해서 지배를 미쳐도 좋으며, 미쳐야 한다는 논거가 항상 계속 존재하는데, 이것은 정치적 · 실천적인 결과에서는 합리주의적인 교육독재와 동일한 것으로 귀착한다. 헤겔주의도 그때에 모든 합리주의적 체계와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것을 어떤 우연적인 것, 어떤 실체 없는 것으로서 부정하며 전체를 체계적으로 절대적인 것에까지 높이고 있다.
세계정신은 의식의 그때그때의 단계에서 바로 언제나 소수의 인간의 두뇌에만 파악된다. 시대의 전체의식은 일거에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지도 않으며, 지도적인 민족들이나 지도적인 집단들의 모든 구성원에게서 나타나지도 않는다. 거기에서 세계정신의 선발대가 항상 존재하게 되는데, 이것은 발전과 의식의 첨단, 즉 전위이다. 이 전위는 정당한 인식과 의식을 가지기 때문에 행위에의 권리도 가지는데 - 그것은 인격적인 신에 의해서 선출된 자로서가 아니라 발전에 내재하는 것을 결코 밟고 나오지 않는 계기로서, 또는 통속적인 비유로 말한다면 도래할 사태의 조산원으로서이다. 세계사적인 인물 테세우스 · 케자르 · 나폴레옹 - 은 세계정신의 도구이며 그들의 독재는 그들이 역사적 계기 속에 서 있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헤겔이 1806년 당시 예나에서 말 타고 들어오는 것을 본 세계정신 나폴레옹]은 한 사람의 군인이며 결코 헤겔주의자는 아니었다. 그것은 철학과 칼의 동맹의 대표자였으며, 단지 칼 쪽에서만 대표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자신의 시대를 정당하게 인식하였다는 의식에서 정치적 독재를 요구하고 자명 -것인데 - 그 독재에서 스스로 독재자이려고 한 것은 헤겔주의자였다. 그들은 피히테와 다르지 않으며 그들이 견해가 잘못이 아니란 것을 온 세상에 입증하려는 각오를 가지고있있다. 이것이 그들에게 서재에의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여기서 헤겔 철학에 대해서 말한 것, 즉 그 실천적 귀결이 하나의 합리주의적 독재로적 사회주의에있어서의 독재 통하는 일면을 가진다는 것은 또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타당하며, 더구나 마르크와 변증법 스주의적 독재의 형이상학적 보증을 기초지우는 명증은 전적으로 헤겔적인 역사구성의틀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관심은 나중에는 오로지 국민경제학적인것에만 향하게 되고 (이것도 바로 뒤에 보듯이 헤겔적 사고의 귀결 속에 있는데), 계급이라는결정적인 개념이 역사철학적 · 사회학적 체계 속에 충분히 내포되어 있지 않으므로,피상적인 관찰자는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을 유물론적 역사관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항상 그 기본선을 계속 유지하는 공산당선언에서이미 본래의 역사구성이 나타나 있다. 세계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것은 이미 옛적부터 알려지고 있었다. 실제로 공산당선언의 새로운 점은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또한 부르주아가 증오할만한 것은 1848년에는 이미 주지의 사실이며, 당시의 유명한문학자로서 이 말을 비방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었다. 공산당선언의 새로움과 매력은 그것과는 좀 다른 것이다. 즉 계급투쟁을 인류사상 유일한 최후의투쟁, 즉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긴장의 변증법적 절정에까지 체계적으로집중한 데에 있는 것이다. 다수의 계급간의 대립은 하나의 최후의 대립으로 단순화된다.이전의 무수한 계급 대신에 마르크스에 의해서 『자본론』의 국민경제학적 서술에서더욱 인정되고 있는 리카르도의 세 계급(자본가 · 토지소유자 · 임금노동자)도 아니며,단 하나의 대립만이 나타난다. 단순화라는 것은 강도를 힘있게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이제 그것은 체계적이고 방법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나타난다. 그 기초가 여전히경제적인 것일지라도 발전의 행로가 변증법적이며, 따라서 논리적이므로 세계사의마지막 위기적인,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에서는 하나의 단순한 대립(Antithese)이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세계사적인 계기의 최대의 긴장이 생긴다. 이러한논리적인 단순화에서 현실적인 투쟁의 마지막 고조만이 아니라, 또한 사상적인 대립(Gegensatz)의 마지막 고조도 이루어진다. 따라서 변증법적 필연성에서 사태가 일변하기 위해서 모든 것은 극단적으로까지 추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대함이 극치에이른 부는 거대해진 빈곤에게 대립하며, 모든 것을 소유하는 계급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계급에게, 점유하고 소유하기만 하는 더 이상 인간적이 아닌 부르주아는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지만, 다만 인간일 뿐인 프롤레타리아에 대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헤겔 철학의 변증법이 없이는 역사의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빈곤화의상태가 몇 세기 동안 존속하고, 마침내 인류가 일반적인 침체 속에 빠지거나 또는새로운 민족이동이 지상의 모습을 바꾼다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따라서미래의 공산주의 사회, 즉 계급 없는 인류라는 보다 높은 단계는 사회주의가 헤겔적
변증법의 구조를 보유할 때에만 명증을 얻는 것이다. 물론 그 때에는 자본주의적사회질서의 비인간성은 자기 자신의 부정을 자기 자신 속에서 필연적으로 산출해야만하는 것이다.
라살레 도 이러한 변증법의 영향 아래 긴장을 상반적으로(antithetisch) 극단화하려고노력하였다. 다만, 그에게 있어서는 아마 사상적인 충동보다는 수사적인 것이 더욱 작용하였을 것이며, 예컨대 그는 (슐체-델리취 [Schulze-Delitzsch]*에 반대하여) 리카르도는부르주아 경제학의 최대의 이론가이며 그 경제학을 정점에, 즉 절벽으로 인도하였다.다만 여기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은 그 이론적 발전 그 자체에 의해서 사회경제학으로돌아갈 밖에는 달리 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즉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최후가도래하였다는 확실성이 나타나기까지 최대의 강함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같이 본질적인 생각에서 라살레와 마르크스는 전적으로 일치한다. 여러 대립들이 마지막의 절대적인 계급적 대립으로 단순화될 때 비로소 변증법적 과정 속에 절대적으로 위기적인 순간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이러한 순간이 나타나서 부르주아지의 마지막 때가 실제로 도래하였다는 확실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마르크스주의가여기서 전개하는 의론의 논거를 검토하면, 헤겔적 합리주의에 전형적인 자기보증이인식되는 것이다. 그 논리의] 구성은 발전이 끊임없이 상승하는 의식을 의미한다는데에서 출발하며 이 의식 자체의 확실성 속에 이 발전이 정당하다는 증명을 인정하려는것이다. 상승하는 의식의 변증법적인 구성은 이를 구성하는 사상가를 그 자신이 그사상에 의해서 발전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그에게 동시에 그에 의해서남김없이 인식된 것, 역사적인 과거로서 그의 배후에 가로 놓여 있는 계급의 극복을의미한다. 만약 그에게 발전이 자기 자신을 마지막 깊이까지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는정당하게 사고할 수 없으며 자기모순에 빠질 것이다. 하나의 시대가 인간의 의식 속에파악된다는 것은 역사적 변증법에 대해서는 그 의식된 시대가 역사적으로 끝났다는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상가의 모습은 역사적인 것에, 즉 과거와 지나가버리는 현재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주의자는 마치 예언자처럼 자신이 미래를예언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통속적인 견해만큼 잘못된 견해는 없다. 헤겔주의자는다가오는 사물을 구체적으로, 그러나 소극적으로만 오늘날 이미 역사적으로 완결된것의 변증법적인 대립으로서 인정한다. 이에 반하여 현재까지 발전하여온 과거를 그는자신의 지속적인 발전 속에서 바라보며, 그가 그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올바로 구성한경우에 그것은 남김 없이 인식된 것으로서 의식에 의해서 극복된 단계의 하나에 속하며,그 마지막 때는 오고 있다는 확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불가피한 필연성」이라는 몇몇 표현법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다가오는 사물을천문학자가 미래의 별자리를 계산하듯이 예측하지 못한다. 또한 그는 심리주의적인저널리즘이 그를 비평하려고 하듯이, 다가올 파멸을 예언하는 유대적인 예언자도 아니다.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강한 도덕적인 열정이 숨쉬고 있으며, 그것이 그의 논증이나 서술방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것도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경멸이 마르크스에게만 한정하지 않듯이 그에게만 특유한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사회주의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도 발견된다. 마르크스의 업적은 부르주아를 귀족적이며 문학적 르상티망의 영역에서 세계사적인 인물에까지 높였다는데에 있으며, 이 세계사적인 인물은 도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헤겔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비인간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 비인간적인 자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직접적인 선과 절대적으로 인간적인 것을 불러내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마치 헤겔(『현상학』 Phänomenologie II 257)이 「유대 민족에 대해서 말하듯이, 구원의 문 바로 앞에 서있기 때문에 가장 타락한 민족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절대적으로 부르주아지의 부정이 되리라는 것뿐이며, 프롤레타리아의 미래 국가에서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 관한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규정된다는 것은 하나의 체계적 필연이다. 이것을 완전히 망각한 때에만 프롤레타리아트를 적극적으로 규정한다는 시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미래 사회에 대해서는 거기에는 어떠한 계급대립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 그것은 잉여가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며 소유도 없고 가족도 조국도 알지 못하는 사회계급이라고 말할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적 무가 된다.50) 그들에게 타당해야 하는 것은, 그들은 부르주아와의 대립에서 인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여기에서 변증법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생기는 것은 그들은 과도기에는 계급소속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즉 바로 인류에의 대립을 이루는 계급으로 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계급대립은 모든 대립이 절대적으로 극복되고 순수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대립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확실성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 그것이 경제적으로 부르주아지의 변증법적인 대립자인 한, 단지 소극적으로만 관계를 가진다. 이에 반하여 부르주아지는 적극적으로 완전한 역사성 속에서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르주아지의 본질은 경제적인 것 속에 있으므로 마르크스는 거기에서 그것을 남김 없이, 또한 그 본질에서 파악하기 위해서 그것을 경제적인 영역에까지 추구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르크스가 이에 성공하고 부르주아지를 남김 없이 인식할 수 있었다면, 그 부르주아지는 이미 역사적인 것에 속하고 완결된 것이며, 정신이 의식적으로 극복된 발전의 한 단계를 보여주는 증명이 되고 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를 올바로 분석하고 파악하는 데에 성공하느냐의 여부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의 과학성에 대해서는 바로 생사의 문제이다. 여기에 마르크스가 경제 문제를 파고들 때에 나타낸 악마 같은 정진의 가장 깊은 동기가 있다. 그러나 그가 경제적·사회적 생활의 자연법칙을 발견하려고 희망하였고, 더구나 그의 연구를 거의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고전적장소」로서의 영국의 산업사정에만 한정한 것, 그가 항상 상품과 가치, 즉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개념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따라서 낡은 고전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에 머무르고있다는 데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만약 마르크스주의에 특유한 과학성이단지 예리한 분석에만 있다면 이러한 비난은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성은 여기서는의식을 진보의 기준으로 하는 발전의 형이상학의 의식성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항상부르주아 경제 중에 돌입하여 가는 경탄할 관철성은, 학구적 · 이론적인(akademischtheoretisch) 열광에서도, 반대자에 대한 기술적 · 전술적인 관심도 아니다. 그것은 철두철미 형이상학적인 강박에서 생기는 것이다. 올바른 의식은 발전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하였다는 규준이다. 그렇지 않고 현실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목전에 절박하지 않은 경우에는지금까지의 시대, 즉 부르주아지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는 없다. 반대로 그것이 올바르게인식된다는 것은 그 시대가 이미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헤겔주의적인, 따라서또한 마르크스주의적인 확실성의 자기보증은 그러한 순환 중에서 성립한다. 즉 발전의진행을 올바르게 통찰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시대(der historische Moment)가 도래하였다는 과학적인 확실성이 주어진다.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이해할수 없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를 이해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의시대(Epoche) 위에 황혼이 드리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기 시작하며, 이것은 이경우 예술과 과학이 번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몰락하는 시대가 새로운 시대의 역사적인의식의 객체가 된다는 의미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자기를 획득한 인간성은 마지막 상태에서는 합리주의적인 교육독재가 인간성의 최후 상태라고 간주하는 것과는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거기까지 사고의 발자취를 밟을 필요는 없다. 세계사까지도 자신의 구성 속에 이끌어넣은 합리주의는 그 위대한 극적 순간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상승하는 하나의 열병을가지고 끝나며, 그것은 계몽기의 소박한 낙관주의가 눈앞에 본 목가적인 천국을, 즉콩도르세가 인류의 발전에 관한 그의 묘사 계몽의 묵시록」에서 눈앞에 인정한 천국을더 이상 직접 눈앞에서 보지는 못한다. 새로운 합리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자기 자신도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데, 그 앞에는 두려워할 만한 부정이 서 있다. 그때에 일어나게되는 폭력행사는 이미 피히테의 교육독재와 같은 소박한 교단주의적인 것일 수는 없다.부르주아는 교육시켜야 할 것이 아니라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생기는 투쟁,더구나 완전히 현실적인 피비린내 나는 투쟁은 근본적으로 항상 사변적인 것에 머무르는헤겔적 구성과는 다른 사상과 정신구조를 필요로 하였다. 물론 이 헤겔적 구성은 가장중요한 지적 요소로서 존속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떠한 긴장력을 더욱 발휘할 수 있는가하는 것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거의 모든 저서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이미 합리주의적이도록 동기지우기 위한 단순한 지적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부르주아
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간에 불타오르는 투쟁 속에 있는 당파들은 실제의 구체적인 투쟁에 필요하게 되는, 보다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체적 생의 철학은 이 때문에 하나의 정신적인 무기를 제공하며, 그것은 보다 깊은주의주의적인, 정서적인 내지는 활력적인과정들과 비교하여 모든 지적인 인식을 단지 부차적인 것이라고 보는 이론이며, 거기에서는 재래의 도덕의 서열관계, 즉 의식의 의식 없음에 대한, 이성의 본능에 대한 지배가 근본적으로 동요시키는 정신구조에 대응하는 이론이었다. 교육독재의 절대적 합리주의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권력분립의 상대적 합리주의에 대해서는 직접적 폭력행사라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고, 토론에 대한 신념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행동의 이론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의회주의뿐만 아니라 합리주의적인 독재에도 여전히 이론적으로 보유된 민주주의는 이로써 근본으로부터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트로츠키가 민주주의자 카우츠키*에 대해서 정당하게 말하듯이, 상대성의 의식 중에는 폭력을 행사하여 피를 흘린다는 용기는 발견되지 않는다.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하기에 제국주의를 주장한다. 나에게 제국주의의 주장은 사회주의 실현의 전제이다. 내가 사회주의를 품고 있지 않다면 제국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제국주의를 내걸고 러일전쟁을 외치는 바 그 바탕에 사회주의의 이상이 있다. 나는 사회주의자이면서 제국주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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