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이유 -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10가지 원리
이 책 [불평등의 이유]의 저자인 1928년생인 노엄 촘스키는 90세가 넘었지만 그의 지성의 힘은 조금도 줄지 않은 듯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는 한결같이 대중의 편에서, 사회의 가장 왼쪽 자리에서 거침없는 목소리를 내왔다. 혁신적인 이론을 내놓는 언어학자라는 점만 빼면, 그는 언제나 주류보다는 소수자의 곁에 있었고, 공화당이나 민주당에게 때로는 양당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주류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을 기점으로 한 현실 참여에서 비롯된 그의 사회참여적 저술 활동은 그동안 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 정책과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낳은 폐해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다소 새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미국의 부와 권력의 불평등 확대가 낳은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을 정면으로 겨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책은 그동안 촘스키가 설파했던 정치와 경제에 관한 논의를 일반 시민의 눈높이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정리한 내용이라 봐도 무방하다. 오늘날 미국에서 부와 권력의 집중을 낳은 10가지 원리는 민주주의를 축소하라,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라, 경제를 개조하라, 부담을 전가하라, 연대를 공격하라, 규제자를 관리하라, 선거를 주물러라, 하층민을 통제하라, 동의를 조작하라 그리고 국민을 주변화하라 이다. 하나같이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많이 접하고 있는 일들이기도 하다. 위의 10가지 원리는 미국만이 아니라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소득 불평등이 극적으로 확대되고 민주주의가 점점 껍데기만 남기고 부실해지는 많은 나라에서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설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훗날의 매디슨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만약 아테네의 정치체제가 자유민 남성을 위한 민주주의라면, 빈민들이 한데 뭉쳐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는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딜레마에 부딪혔지만, 두 사람은 정반대의 해법을 내놓았다. 매디슨이 내놓은 해법은 민주주의를 축소하는 것, 즉 부유층의 수중에 권력을 두고, 국민들이 하나로 조직되어 부자의 권력을 빼앗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방식으로 국민들을 파편화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법은 정반대였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복지국가를 제안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불평등을 축소하자고 말했다. 공공 급식같이 도시국가에 접합한 조치를 통해 불평등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똑같은데 해법은 정반대다. 한쪽은 불평등을 축소하면 이 문제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은 민주주의를 축소하자고 말한다. 아무튼 이처럼 상충하는 열망이 이 나라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25p)
촘스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았다고 서술한다. 불평등은 여러 결과를 낳는데 그 자체로 정의에 어긋날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불평등이라는 사실 자체가 사회 관계, 의식, 인간 생명등을 좀먹는 유해한 효과, 온갖 부정적 효과를 미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러한 문제는 극복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역설을 극복하는 길은 민주주의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축소하는 것이다.
권력 체계들로부터 자신들의 권력과 이윤을 확대하는 것을 막는 어떤 제약도 방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압력이 가해질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런 압력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항 세력은 당신이다. 대중이 반격을 가하는 정도만큼 효과적인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요구는 금융 체제를 이루는 기관들 전반에 대해 폭넓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조직화되고 분명한 목표를 추구하는 헌신적인 국민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과제다. 단순히 금융기관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왜 그 기관들이 존재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67p)
노동자들을 계속 불안정하게 만들면 순순히 통제된다. 미국은 비슷한 수준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공공서비스가 전혀 없기 때문에 가족이 붕괴되고 있다. 인간지배자들은 수익을 벌어들이지만 국민들은 참혹한 결과를 맞는다. 금융화와 해외이전은 부의 집중과 권력의 집중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전체과정의 일부이다. 유일한 저항세력은 당신이다. 미국 내 생산이 미국인 전체와 미국 노동자, 미국 소비자, 세계의 미래에 이익이 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분명, 이익이 될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어느 이상과 마찬가지로 얼마간은 상징적인 것이고, 얼마간은 실제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미국 경제사에서 가장 거대한 성장의 시기가 존재했다. 이른바 황금기였다. 그것은 매우 평등한 성장이었기 때문에 전체 국민의 하위 5분의 1도 상위 5분의 1과 거의 똑같이 형편이 좋아졌다. 그리고 복지 정책도 일부 이루어져 인구 대다수의 생활이 개선되었다. 예를 들어 흑인 노동자가 자동차 공장에서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고, 집과 차를 사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누구랄 것 없이 다들 그만큼 형편이 좋았다. (76p)
그러나 이제는 부모 세대보다 나은 삶, 아니면 그보다 조금 떨어지더라도 최소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경제는 위기를 거듭하며 점점 불안만 키우고 있다. 기후변화의 위험은 코앞에 닥쳤다. 냉전이 끝난 지 오래건만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의 위협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언론까지 집어삼킨 다국적기업은 거대하게 몸집을 키우면서 사람들의 생활과 정신의 구석구석까지 촉수를 뻗친다.
연대는 무척 위험하다. 지배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당신은 오직 자신만을 돌봐야지 남을 돌보면 안 된다. 그것은 지배자들이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애덤 스미스 같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무척 다르다. 스미스는 경제에 대한 접근법 전체를 공감이 기본적인 인간 속성이라는 원리에 입각해 세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감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몰아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위하고 "타인에게 신경쓰지 말라"는 비열한 좌우명을 따라야 한다. 이런 태도는 부자와 권력자에게는 좋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큰 피해를 준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이와 같은 감정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94p)
촘스키가 설명하는 것처럼, 자본가는 한편으로는 자유와 평등, 새로운 세계에서 누구나 꿈을 펼칠 기회를 약속하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교묘하게 부와 권력의 불평등에 바탕을 둔 체제를 지키려고 했다. 다수 대중이 똘똘 뭉쳐서 자유와 평등을 급진적으로 요구하는 사태를 미연에 막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굳게 신봉한 일반 대중들은 그 꿈을 좇아 근면하게 일하면서도 계급적 장벽에 맞닥뜨릴 때면 자신들의 기회와 권리를 요구했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동의를 조작하면서 이런 민중운동에 반격을 가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공평한 경쟁을 위해 경제를 규제하려 한 이들의 연대는 공격을 받았다.
그때마다 납세자는 위기를 야기한 이들을 구제하라는 요구를 받는데, 점차 주요 금융기관이 그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보통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 대신 위헙한 투자를 하는 투자자들을 일소하고자 한다. 그러나 부자와 권력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곤경에 빠지는 즉시 '보모국가'로 달려가서 납세자의 돈으로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들은 정부 보험증서를 받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얼마나 자주 온갖 위험을 무릅쓰든 간에 곤경에 빠지면 국민들이 구제해 준다는 것이다. 너무 덩치가 커서 파산하게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고 있다. (116p)
촘스키는 걸핏하면 자본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허위와 위선을 폭로한다. 오히려 "부자와 권력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곤경에 빠지는 즉시 '보모국가' 달려가서 납세자의 돈으로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한다." 우리 역시 1997년 IMF 외환위기를 통해 납세자들의 돈이 어떻게 재벌 기업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는지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런 식으로 보장된 부와 권력의 집중은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부의 집중은 권력의 집중을 낳는다. 특히 선거 비용이 급증해서 정당이 주요 대기업의 주머니 속으로 한층 더 깊숙이 들어갈 수밖에 없을 때는 더욱 드렇다."
법인 기업은 국가가 창조한 법적 허구다. 경우에 따라 좋은 기업도 있고 나쁜 기업도 있다. 하지만 기업을 인간으로 칭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른바 자유무역협정, 이를테면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예로 들어 보자. 이 협정을 체결한 주역들은 법인 기업에 사람을 훌쩍 뛰어넘는 권리를 주었다. 따라서 만약 제네럴모터스가 멕시코에 투자하면 멕시코 국민의 권리, 멕시코 사업체의 권리를 얻는다. 그러나 어떤 멕시코 사람이 뉴욕에 가서 '나는 미국 국민의 권리를 원한다'고 말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인격 개념은 한편으로 법인 기업까지 포합하는 쪽으로 확대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제한되었다. (134p)
헌법 수정조항 제14조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미등록 외국인일지라도 권리를 박탈당할 수 없다. 그러나 법원은 오랫동안 쌓여져 왔던 지혜를 통해 그런 가능성을 없애 버렸고, 불법 체류 외국인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등록 외국인은 미국에서 살면서 자신이 살 집을 짓고, 자신의 잔디밭을 다듬는 등의 일을 해도 사람이 아니지만, 제너럴일렉트릭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불사의 초강력 인간이다. 이와 같은 기초적 도덕의 전도와 이 법률의 명백한 의미의 전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따라서 동조적인 정부와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상당한 실체가 된 대중운동 사이에 일종의 공모가 이루어졌다. 쟁의 행위가 벌어졌다. 소유주에게 엄청난 공포를 안겨 준 공장 점거 파업이 벌어졌다. 공장 점거 파업은 '사장은 필요 없다. 우리가 직접 공장을 돌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업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1930년대의 경제 언론 기사를 읽어 보면, "대중의 정치권력이 고조되면서 기업가들이 위험에 직면에 있으며" 이런 상황을 진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이야기를 주입하기 위해 그들의 생각을 장악하려는 지속적인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식이다. (147p)
촘스키는 책 이곳 저곳에 반복적으로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단지 선거 날 투표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행동'을, 권력자들에게 순응하는 대신 이의를 제기하고, 대중에게 불리한 정책들을 좀 더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통해 막아내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는 꼭 유명하고 힘이 있는 영웅들의 힘만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 아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소위 '평범한' 사람들의 힘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일을 바꾸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러니 당장 눈앞에 변하는 것이 없다고 해서, 일이 잘 되어가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해서 너무 빨리 포기하거나 불만을 터뜨리지 말고, 좀 더 멀리 보며 인내심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홍보 산업은 이런 목표와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그 과정은 대단히 정교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오늘날 실제로 현실에서 목격된다. 예컨대, 10대 여자아이들은 토요일 오후에 자유 시간이 생기면 쇼핑몰에 가지 도서관 같은 곳에 가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전자기기를 하나 더 사지 않으면 내 인생에 아무것도 성취한 게 없다'고 느낀다. 요지는 모든 사람을 통제하여 사회 전체를 완벽한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체제는 한 쌍에 기반을 두는 사회가 될 것이다. 완벽한 체제는 한 쌍에 기반을 두는 사회가 될 것이다. 당신과 텔레비전, 아닐 이어폰과 인터넷이 한 쌍이다. 그런 것들이 제대로 된 삶을 당신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필효하지 않거나 원하지 않지만, 버젓한 삶의 척도인 그런 것들을 얻으려고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168p)
경제학 수업에서 시장은 원래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합리적 선택을 하는 소비자들에 근거한다고 가르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자동차 광고를 예로 들자면 축구 스타와 여배우가 자동차에 탑승해서 굉음을 내며 산을 올라가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짜여진다.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정보와 지식이 없는 소비자가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기 위해 수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여론 조작에서 나온 것 처럼 언론은 우리에게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광고주에게 상품으로 파는 것이다. 그게 광고다.
대중의 결집과 행동이 존재하지만 대단히 자기파괴적인 방향을 향한다. 그것은 혐오, 타인과 취약한 대상에 대한 공격 등 초점에 맞지 않는 분노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에 거스르는 방향으로, 말 그대로 자기 이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결집되는 것은 정말로 비합리적인 태도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 정치인을 지지한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를 잠식하는데, 그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며,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살피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만드는 일이다. (184p)
도널드 트럼프를 예로 들자면 세상만사에 분노하는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지지를 얻으며, 그가 아무나 추잡한 발언을 할 때마다 지지율이 올라간다. 그의 인기는 혐오와 공포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그들이 직접 뽑은 대표자들조차 그들의 이해와 관심을 거의 대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겼다. 경제성장도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불평등, 그 모습과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면서, 이런 현상이 바로 우리나라에 닥칠 미래의 모습이 아닐까 우려된다. 노엄 촘스키는 언제나 -가진자의 반대편-의 편이다. 또한 그러한 자리에서 대중을 위한 주장을 펼치는데 눈높이를 항상 맞추고 있다. 그래서 촘스키의 책을 읽을 때마다 불편한 진실에 대해 한걸음 더 다가가는 느낌이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게 미국의 일일지라도 현대는 세계화의 시대라 조만간 이 책에서 말하는 것들을 제대로 느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벌써 왔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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