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크로포트킨의 공헌을 마땅할 만큼 고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을 현대에 맞추어 추론하려는 시도가 필수적일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의 운명에 관해 이러한 작업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크로포트킨 자신도 볼셰비키 혁명의 발달과 퇴행을 분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혁명운동 전개에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적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크로포트킨은 현대의 아나키즘적인 사고방식에 매우 중요하지만, 그는 여전히 일부 관심 있는 그룹 밖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광주는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중심이지만, 무려 2,000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1980년의 봉기는 많은 사람들이 겨우 이해하는 수준에(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두 경우 모두 유럽중심주의에 의해 소외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크로포트킨이 러시아를 떠나지 않고 같은 책과 문건을 썼다면 오늘날 러시아 밖에서는 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크로포트킨을 여러 가지로 비판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비판되어야 하는 것은 1차 세계대전의 종전협약에 대한 지지이다. 그의 유럽중심주의적 편향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늘에 와서는 『상호부조론』에서 분석된 해당 방면에 대한 표현을 읽을 때, 우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다. 그는 “미개인”이나 “야만인”과 같은 구식의 언어를 사용한다. 게다가 『혁명가의 회상』에서는 “아시아적 책략”, “… 혐오스러운 오리엔트 방식” 그리고 “오리엔트적 향락은 혐오시 되었다” 등의 삐딱한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러한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크로포트킨의 시대에는 이러한 편견들이 거의 일반적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어쨌거나 국제주의자였다. 그가 편집한 스위스 신문인 「반역Le Révolté」의 역할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새로운 형태의 삶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오래된 불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키고, 인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 이것이 혁명적 언론의 주된 임무가 되어야 한다. 성공적인 혁명을 만드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혁명가의 회상』, p.418.)
크로포트킨의 혁명에 대한 개념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혁명과 서유럽에서의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운동, 특히 1789년에서 1793년 사이의 혁명, 그리고 1871년의 파리 코뮌과 관련하여 혁명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크로포트킨에게 자유 코뮌은 진정한 혁명의 종착점이자 수단이 되었다. 그는 인민의 책임과 권리를 앗아가고자 하는 대의제 정부와 그 관료들을 혐오했다. 그는 장군들 마냥 자리에 앉아 가두투쟁에 지침을 내리는 자들을 수차례 쏘아붙였다.(『혁명가의 회상』, p.282.) 오늘의 시위 중에는 집에 앉아 있다가 다음날이면 활동가를 위한 “안내서”를 써내던 작자들에게 그가 뭐라 말했는지는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당대의 무장 시위에 참여했고, 비겁함을 운동 내부에서 극복할 과제라고 보았다(『혁명가의 회상』, p.419.).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믿음은 무궁무진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의 인민들이 보여준 자발적인 조직”에 감탄하면서, 도시의 각 구역이 독자적인 군사 및 시민 위원회를 선임하였지만, “저녁에 열린 총회에서 중요한 모든 문제들이 대중적으로 언급되었다”고 썼다(『프랑스 대혁명』, p.313.). 크로포트킨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구들이 공공안전위원회의 손발로 변질되어가는 것(즉, 국가의 기구가 되어가는 것)을 관찰한다. 40,000개의 혁명위원회가 국가에 의해 삼켜졌을 때, 혁명은 살해당했다.
혁명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수천 명의 희생은 진정한 혁명의 형태, 즉 “자주적인 코뮌”을 크로포트킨에게 보여주었다. 크로포트킨은 여러 저술을 통해 민주공화국과 대의정부가 기존의 사회질서를 모두 혁파하기보다는 개인의 몫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존 제도의 개혁을 원하는 중산층 급진주의자들의 야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이라고 이해했다(『빵의 쟁취』, pp.44, 213-14.). “대의제 정부는 그 목적을 달성하여 궁정의 통치를 종식시켰다.”(『아나키즘적 코뮌주의』, p.68.). “절대 군주제는 농노제도에 대응한다. 대의정권은 자본 통치의 제도에 대응한다.”(『아나키즘적 코뮌주의』, p.52.)
1871년 파리 코뮌과 관련하여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파리 코뮌의 봉기는 따라서 모든 진정한 혁명가를 괴롭히는 질문에 해결책을 가져왔다. 프랑스는 1793년~1794년, 강력한 자코뱅 조치를 통해 l'egalite de fait, 즉 진정한 경제적 평등을 도입하려고 했을 때와 그리고 1848년 “민주사회주의 공화국을” 실시하려고 했을 때의 두 번에 걸쳐 일종의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했고, 그 방식은 중앙정부를 통해 그것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매번 실패하여왔지만, 이제 새로운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자유 코뮌은 그들 자신의 영역에서 혁명을 해내야만 한다.”(『현대 과학과 아나키즘』, p.164.)
크로포트킨에게 자유 사회의 정치적 형태는 분명히 독립적 코뮌이었다. “독립적 코뮌이야말로 사회혁명이 반드시 취해야 할 형태다. 모든 나라와 전 세계가 그것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 구성원들이 물품의 소비, 교환, 생산을 공동화하기로 결정하면, 그들은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현대 과학과 아나키즘』, p.164.) 크로포트킨은 파리 코뮌과 카르타헤나, 바르셀로나 코뮌에 대한 이해에서 코뮌의 의미를 정치적 형태로 구체화하여 미래에 투영했다.
“운동 그 자체뿐 아니라 코뮌 혁명이 정신에 남긴 인상과 그 경향을 분석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미래의 사회 발전 과정에서는 더 진보된 인간의 집단이 독립적인 삶을 시작하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징후를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집단은 국가 내의 후진적 부분을 선진화하기 위하여 법과 무력으로 그들의 의견을 강요하거나, 실제로는 중위결(좌파는 우경화되고 우파는 좌경화되어야 당선인을 만들 수 있다는 다수결의 원칙-역자 주)이 될 수밖에 없는 다수결의 원칙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예시를 만들어낼 것이다. 동시에 코뮌 내의 대의제 정권의 실패는 단순히 영토를 넓히기보다는 자치와 자율행정이 더 진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자치와 자율행정이 효과적이 되기 위해, 그것들 역시 자유로운 공동체 안에서 삶의 다양한 기능에 포함되어야 한다.”(『아나키즘적 코뮌주의』, pp.51-2.)
후기 작품에서 크로포트킨은 1871년 이후 “… 자유 코뮌은 그 이후 현대 사회주의 사상이 실현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상호부조론』에서, 그는 진화와 인간사에서 코뮌적 협력이 가져왔던 형태를 추적한다.
1917년 이후 그는 다시 러시아로 이주했다. 볼셰비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음에도 그는 러시아로 파병된 반혁명적 외국군을 깎아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혁명에 관한 짧은 성명 두 장만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 코뮌에 대한 지지를 다시 한 번 표명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자연적으로 분리된 부분을 중앙 통제 하에 재결합하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연방의 각 부분이 스스로 자유 코뮌과 자유 도시의 연합이 될 때가 올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나는 또한 서유럽의 특정 지역이 곧 같은 과정을 따를 것이라고 믿는다.”(크로포트킨, 〈서유럽의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당대의 모든 혁명과 관련하여, 그는 독립된 코뮌의 형태로 드러나는 진정한 자유를 그 목표로 확립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었을까? 어떤 수단이 사용될 수 있었는가? 크로포트킨에게 있어 대답은 명확했다. 봉기가 그 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전위당이나 다른 어떤 조직된 작은 집단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가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봉기와 자유 코뮌은 크로포트킨에게 필수적이었다. 대중 동원을 위해서는 중앙의 집회소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없었다.
“팔레 루아얄은 정원과 카페를 갖춘 개방된 공간이 되었고, 모든 계급 출신의 수만 명이 매일 소식을 교환하고, 그 시간의 팸플릿에 대해 토론하고, 군중들 속에서 미래의 행동에 대한 열망을 새롭게 하고, 서로를 알고 이해하려고 했다.”(『프랑스 대혁명』, p.61.)
대중 동원을 위한 집회소가 중요성을 드러낸 한 예는 1789년 6월 10일이었다. 파리 시민들을 상대로 사용하기 위해 총을 장전하는 것을 거부한 11명의 군인들이 체포되어 수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4,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즉시 팔레 루아얄에서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갔다. 그런 대군을 보고 간수들은 호응했고, 군중을 막기 위해 전속력으로 말을 타고 달려간 용기병들은 재빨리 군도를 벗고 인민들의 대오에 합류했다.(『프랑스 대혁명』, p.69.)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호전성에 감탄하면서, 크로포트킨은 가게를 장악하고 있는 군중들은 약탈을 하지 않고 그들의 집단적인 영양보충과 방어를 위해 필요한 것만 가져갔다면서 도둑질은 끝났다고 언급했다(『프랑스 대혁명』, pp.75, 106.). 반란이 파리에서 프랑스의 많은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모든 유럽은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움직였다”고 크로포트킨은 그 반란이 어떻게 프랑스를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단결시켰는지 추적했다(『프랑스 대혁명』, pp.95, 177.).
1871년 파리 코뮌 이후 스페인의 카르타헤나와 바르셀로나에서 비슷한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는 봉기 그 자체가 사람들이 일어나게 하도록 고무시켰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이 현상을 에로스 효과라고 이해한다. (내 책 『신좌파의 상상력: 1968년에 대한 세계적 분석』을 참조하라) 크로포트킨은 봉기는 종종 절망의 산물이지만 혁명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들이 파업을 일으키거나 그들이 싫어하는 일부 관료들에 대한 작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성공에 대한 희망도 없이 굶주린 아이들을 위한 음식을 얻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단순히 상황이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두 번, 아니 수십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의 유사한 반란이 앞서 왔으며 모든 혁명에 선행해야 한다. 이것들이 없이는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크로포트킨, 『현대 과학과 아나키즘』)
그는 이후에 봉기가 혁명의 종착점을 결정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열쇠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모든 혁명의 성격은 그것이 선행하는 봉기의 성격과 목적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으로 명시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나는 이제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1980년 광주항쟁으로 눈을 돌린다. 1980년대 한국과 아시아 민주화 운동에 중심적 중요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광주 항쟁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먼저 간단한 요약을 할 것이고, 그 후에 내가 자유 코뮌과 폭동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견해에 특히 중요한 봉기의 요소들을 묘사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도주의자였던 크로포트킨은 봉기할 만큼 용기 있던 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죽음과 부패에 대해 이해하였다. 그는 투옥과 추방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통치에 대한 자신의 원칙적인 반대를 유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희생이 잊히는 것을 거부했다. 정부의 잔혹성에 대한 그의 설명을 읽다보면, 그것이 파리에서 일어났는지 광주에서 일어났는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무엇을 하든지 너는 죽을 것이다! 팔짱을 끼고 끌려간다면, 죽을 것이다! 자비를 구걸하면, 죽을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든, 오른쪽, 왼쪽, 뒤로, 앞으로, 위로, 아래로, 어디로 가건, 죽을 것이다! 너는 단지 무법자가 아니라 인간이 아니다. 네가 몇 살이건 간에, 성별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너를 구할 수 없다. 너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죽기 전에 먼저 아내, 누이, 아들, 딸들, 심지어는 요람에 있는 아기가 괴로워하는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네 눈앞에 부상자가 구급차에서 끌려나와 총검에 꿰이거나 개머리판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그는 부러진 다리나 피를 흘리는 팔에 의지하여 살아서, 고통스럽고 신음하는 쓰레기 다발처럼 시궁창에 던져 넣어질 것이다. 죽음! 죽음! 죽음!”(크로포트킨, 〈파리 코뮌〉, 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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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언제나 그렇듯 '아나키스트 연대' 가 되겠음. https://blog.naver.com/anarchistleague/22211467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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