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포트킨과 광주
광주 봉기는 크로포트킨의 분석틀을 세 가지 방법으로 검증하고 있다.
⑴ 독립적 코뮌과 자산의 자유로운 분배
5월 21일 군대가 도시에서 쫓겨난 후, 모든 사람들은 기쁨과 안도를 나누었다. 시장과 상점이 다시 문을 열어 영업을 시작했고, 평상시처럼 음식, 물, 전기 등을 이용할 수 있었다. 어떤 은행도 약탈당하지 않았고 강도, 강간, 절도와 같은 일반적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관棺과 가솔린, 담배는 품귀했다. 어떤 사람들은 군대에서 더 많은 관을 조달하려고 시도했고, 시민군은 휘발유를 배급했고, 사람들은 새로 참가한 무장한 동료들과 함께 담배를 나누어 피웠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담배를 공유하는 것은 공동체 경험의 중요한 부분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여전히 담배를 갖고 있는 가게 주인들은(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도록)한 번에 한 갑씩 팔거나 나눠주는 경우가 많았다. 병원에서는 혈액 공급이 부족했지만, 필요성이 알려지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헌혈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술집 작부들과 매춘부들 역시 자신들에게도 헌혈을 허용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여 헌혈하였다. 기부를 통해 수천 달러가 빠르게 모금되었다. 이 모든 예는 도시 전체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단결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며칠 동안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를 청소하고, 밥을 짓고, 시장에서 무료 급식을 제공하며, 예상되는 반격을 경계했다. 모두가 해방광주에 기여하고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 자발적으로 새로운 분업이 나타났다. 시민군들이야말로 책임감의 표상이었다. 사람들은 이 민병대를 “시민군” 또는 “우리의 동지”라고 불렀다. 그들은 민중을 보호하고 그들을 돌보았다. 세계 전역의 군대에서 하는 것과 같은, 괴물 같은 행동을 유도하는 세뇌나 군사적 광기도 없이, 시민군의 남녀들은 모범적인 방식으로 행동했다. 대중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질서를 구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중·고등학생들을 무장 해제시켰고, 이는 투사회보가 책임을 지고 집행했다(이재의,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p.71). 최후의 공격이 임박하자 지도부에서는 무장세력 중 고등학생들이 살아남아 투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귀향하라고 주장했다. 많은 시위를 거친 젊은 투사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떠났다.
⑵ 대의제 정부가 아닌 민주광장에서의 총회가 최고 의사결정기구였다는 것
도청 광장 분수대 주변에서는 매일 집회가 열렸고, 그곳에서는 민의가 직접 공식화됐다. 5월 16일 ‘민주광장’으로 개칭한 이 공간은 해방 광주 이전부터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평화롭게 모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너무 많은 친구들과 이웃들의 피를 통해 얻은 권리였다. 본능적으로 광주 사람들은 광장을 영적인 고향으로 인식하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매일 그곳에 모여들었다. 매일의 집회는 모두가 발언권을 갖는 새로운 종류의 직접 민주주의의 배경이 되었다. 여성들의 공적 역할은 그들이 겪었던 일상적인 종속성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 어린 욕구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분수대는 이제 통합의 중심이었다. 여성 노점상, 초등학교 교사, 서로 다른 종교의 신앙인, 주부, 대학생, 고등학생, 농부 등 모든 계급의 인민들이 연설했다. 그들의 성난 연설은 봉기의 엄청난 에너지의 발현인 공동의 의식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봉기 기간 내내 강한 연대감을 형성하며 함께 뭉쳐져 있었다. 그 순간, 도시는 하나였다.”(이재의,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p.105)
해방 광주에서는 5번의 집회가 있었고, 각각 많은 수가 참석했다. 최초의 대규모 집회는 군대가 후퇴한 다음 날 군대의 패배를 축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집회였다. 다음날(23일)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에서는 군중이 15만 명으로 불어났다. 대회는 인민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5월 24일에는 10만 명 이상이 모였고, 5월 25일에는 5만 명(수습위원회 사퇴 요구), 5월 26일 마지막 집회가 끝난 뒤에는 3만 명이 모였다. 이 마지막 집회에서 새로운 구국과도정부救國過渡政府에 대한 요구가 나왔다.
⑶ 자발적 조직
전투의 열기 속에서 발현하고, 도시를 운영하고, 그리고 군대의 반격에 대한 최후의 저항에까지, 자발적으로 등장한 자기 조직의 능력은 새로운 눈을 뜨이게 한다. 20세기 후반 이라는 시기적 조건 속에서, 높은 문해율文解率과 언론, 그리고 보편 교육(남한의 모든 남성이 받은 군사교육을 포함한다)은 그 어떤 권력의 중추에 자리 잡은 조그만 엘리트집단이 통치하는 것보다도, 수백만 민중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이 더욱 현명할 수 있게끔 한다. 우리는 광주 봉기의 사건들을 통해 자치를 위한 이러한 자발적인 능력(엘리트 통치의 치명적인 부조리와 함께)을 관찰할 수 있다.
광주에서는 파리 국가수비대와 같이 권력에 대한 공격을 선도하는 기성무장단체가 없었다. 오히려 공수부대원들의 잔혹성에 대한 자발적인 저항의 과정이 그 상황에 맞선 인민들을 앞으로 몰아붙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전의 정치적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다. 몇몇은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거나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은 역사적 사건의 전개라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나타났다. 해방 광주는 정부의 강요나 정당에 의한 계획 없이 조직되었다. 크로포트킨은 금남로 집회에서 차량을 압수하자는 요청에 응한 자들을 팔레 루아얄의 군중들이 죄수를 석방시킨 것과 동일하게 대했을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기성 무장조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거의 모든 운동 지도자들은 체포되거나 은신해 있었다. 5월 17일 밤, 군 정보 요원과 경찰은 시내 전역의 운동가들의 집을 급습하여 운동 지도부를 체포했다. 체포되지 않은 지도자들은 은신했다. 김대중을 포함한 민주화운동의 국가적 지도자들은 이미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날 아침,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들 자신을 조직했다. 그 조직은 수백 명으로 시작되어 이윽고 수천 명이 되었다.
조직의 등장은 상당히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은 모두에게 명백했다. 정부조차 공개적으로 봉기를 “공동체 자치”라고 지칭했다. 22일 오전 10시30분쯤 복음주의 목회자 8명이 모여 상황을 진단했다. 그 중 한 명은 마침 광주에 있었던 미국 침례교 선교사 아놀드 피터슨이었다. 그는 나중에 목회자들의 평가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우리가 공감했던 감정은 “이럴 수는 없다”는 말로 요약된다. 한 도시의 시민들이 의식적인 계획이나 지도부 없이 봉기하여 정부를 내쫓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피터슨, 49 페이지)
들불야학, 광대(연극 활동가 단체),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같은 소수의 기존 단체들은 일간지 “투사회보”를 발행하여, 이들은 무장 저항을 강화하고 고무시켰다. 그들은 시장과 더 보수적인 시의회 의원들을 압도하는 데 성공했다. 새롭게 등장한 무장투사들과 연계하여 다양한 배경의 전투적인 개인들이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초점, 즉 지속적인 무력 투쟁에 헌신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기할만한 사항으로, 이 호전적인 단체의 많은 회원들은 이전에 파리 코뮌에 대한 연구 모임에 참여했는데, 그중 일부는 시인이자 활동가인 김남주와 함께 진행되었다(인터뷰, 1999년 11월 29일). 나는 2001년 봉기 참여자들과 29차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광주 봉기 이전 한동안 파리 코뮌에 집중했던 스터디 그룹의 일원이었음을 나타내는 사람이 많았다. 윤상원(해방광주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은 녹두서점에서 열린 1976년 김남주의 파리 코뮌 연설에 참석했다(인터뷰, 2001년 11월 7일). 봉기 당시 윤상원은 대학 내 다른 유력 인사들과의 토론에서 파리 코뮌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했다(인터뷰, 2001년 6월 22일). 적어도 십여 명의 다른 핵심 활동가들이 파리 코뮌을 연구했었다.
광주 봉기에 앞서 활동가들이 파리 코뮌을 연구한 것은, 한 봉기의 유산이 지역적 차이를 넘어 인간이 압제에 대응하는 다른 봉기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심지어 폭동이 잔인하게 진압될 때에도―두 경우 모두 그렇듯이―그 경험은 새로운 욕망과 새로운 필요, 새로운 두려움과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고, 봉기의 참가자들과 그 봉기가 만들어낸 파문에 서 있는 이들의 심장과 정신에 영향을 준다.
결론
광주항쟁에 대한 이러한 간략한 발언을 통해,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여전히 새로운 혁명적 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희생에서 얻은 그의 분석의 범주는 현대의 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통찰이 현대와도 분명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특히 오류의 비용이 수천 명의 목숨이 될 수 있을 때, 혁명 이론은 이전의 혁명 물결의 유산을 의식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운명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주어야 한다.
다행히도, 크로포트킨의 서술 중 오류로 드러난 것 중 하나는 억압의 피비린내 나는 집행인들은 “절대로 기소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크로포트킨의 혁명적인 팜플렛』, p.138.). 놀랍게도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 이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광주학살 주모자)은 모두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다. 역사상 그러한 유혈사태의 책임자들이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앞으로 기업의 지배와 전쟁, 군국주의라는 현재의 악몽을 대신할 자유, 번영이라는 크로포트킨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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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언제나 그렇듯 '아나키스트 연대' 가 되겠음. https://blog.naver.com/anarchistleague/222114676352
근로인민의 자발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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