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콤전망 디자인으로 고통받는 로붕이들에게 눈정화처럼 보여지는 잡지 사회주의자. 여기서 지난 5월부터 '새로운 사회주의의 내용'이라는 기획기사를 10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여기에 대해서 부족하지만 분석을 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로붕이들의 의견을 듣고 기탄없이 토론하고 싶다.
1. 왜 연재했는가?
잡지 사회주의자는 노동해방실천연대(해방연대) 전 대표인 성두현을 비롯한 일군의 사회주의자들이 제작하고 있는 사회주의 성향의 잡지이다. 이 잡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내용의 기사를 많이 썼고, 기존의 진보세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보여왔었다. 또한 '청년 사회주의자 모임', '사회주의 대오 추진위원회' 등을 조직하며 사회주의의 공론화를 위한 활동도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잡지 사회주의자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회주의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잡지 사회주의자는 이 기획기사를 연재하려는 이유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① '현살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 및 교훈의 도출, ② 현대사회에서 새롭게 제기된 문제의식의 능동적 수용, ③ 스탈린주의적 관점의 극복. 이는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딛고 어떻게 우리가 지금 '어떤' 사회주의를 주장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주의의 내용을 잡지 사회주의자는 크게 4가지로 소개한다. ①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 ② 민주주의의 심화발전으로서의 사회주의, ③ 생산과 유통에 대한 생산자들의 의식적 통제, ④ 노동자 국제주의. 이 네 가지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서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첫번째 내용 :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
잡지 사회주의자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내용을 말하기 위해 맑스와 엥겔스로 돌아간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도 있듯이 사회주의의 원래 목적이 무엇인가를 먼저 밝히고자 함이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다. 노동자 계급은 보편적 인간해방의 주체이기에,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궁극적인 해방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를 위해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이 인용되고 있다. 이중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다시 보자.
그러면 독일 해방의 적극적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 유일하게 실천적으로 가능한 독일 해방은 인간을 인간의 최고의 존재라고 선언하는 그러한 이론의 관점 위에서의 해방이다. 독일에 있어서 중세로부터의 해방은 동시에 중세의 부분적 극복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만 가능하다. 독일에서는 모든 종류의 노예상태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어떤 종류의 노예상태도 타파할 수 없다. 근본적 독일은 근본에서부터 혁명하지 않고서는 혁명할 수 없다. 독일인의 해방은 인간의 해방이다. 이 해방의 머리는 철학이요, 그 심장은 프롤레타리아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양 없이는 철학은 자기를 실현할 수 없으며, 철학의 실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을 지양할 수 없다. (강조는 필자 주)
이러한 의식 아래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성장시켜 나갔다. 맑스와 엥겔스가 이미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한 바 있는 선결적 조치들은 바로 그 목적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 즉 인간해방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 노동자국가의 수립 등등이 인간해방을 위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사회주의 운동은 '인간해방'이라는 목표와는 멀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일례가 경제주의적 관점이었다. 경제주의적 관점은 '인간해방'의 목표를 위해 시행되어야 할 수단들을 곧 목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수단이 목적이 됨으로써 사회주의운동은 협소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인간성마저 유리되는 모습까지 보이게 되었다. 잡지 사회주의자는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이뤄지지 못함으로써 사회주의가 경제주의적, 구조주의적, 객관주의적으로만 이해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경향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일종의 제도나 모델로 보고 그런 것들의 실현으로만 가능하다고 보는 관점은 앞에서 말한 협소성과 그리 다르지 않다. 잡지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 운동은 어떤 제도를 도입하는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와 사회 전반을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시켜가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럴듯한 구체적인 모델을 수립하고 선전하는 것보다는 먼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의 교훈을 반영하는 새로운 대안을 찾고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그런 과정에서 현실에 맞선 구체적 수단과 경로가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은 계급해방 외에도 생태문제, 여성문제, 소수자문제 등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의식 또한 사회주의운동이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인간해방'의 기치로 이 문제의식들을 끌어안고 그 문제들에도 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운동이 사회주의적 총체성 내에서 이뤄져야 함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리고 여성문제와 생태문제를 언급한다.
여성문제를 먼저 보자. 사회주의는 계급문제 해결로만 인식하고 여성억압에 대해서는 설명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단편적인 생각에 불구하다. 역사유물론으로도 충분히 여성억압을 설명할 수 있다. 초기 원시사회는 여성에게 그리 억압적이지 않았지만,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점차 여성억압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생산력 발전으로 인한 계급의 형성은 계급적 억압을 낳으면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상호작용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여성문제는 계급문제와 완전히 분리해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본주의는 여성억압에 기반하고 있고 자본주의의 철폐를 통해서 여성해방이 가능하다고 잡자 사회주의자는 주장한다.
다음은 생태문제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떼어 놓을 수 없고, 그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도 상호작용한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이윤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 그 자세는 노동이 비롯되는 자연에도 똑같이 유지된다. 노동자나 자연이나 자본가에게는 똑같은 수탈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지 자연에 대한 조치(생태주의 운동)으로서만 끝나서는 안된다. 즉 인간과 인간 간 관계에 대한 변혁으로 체제를 바꿔야만 그 상호작용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도 변혁할 수 있는 것이다.
[귀찮은 사람들을 위한 세 줄 요약]
1. 사회주의운동의 기본전제는 인간해방이었다.
2. 이전의 사회주의는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3. 인간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로 생태 문제, 여성 문제에 대해서 답을 제시할 수 있다.
3. 두번째 내용 : 민주주의의 심화발전으로서의 사회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이 늘 트집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 민주주의 문제다. 사회주의하면 민주주의가 파괴된다는 것이 저들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잡지 사회주의자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재검토로서 민주주의 문제를 논한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민주주의의 진전 없이는 사회주의의 발전은 고사하고 결곡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라고 봤다. 그리고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민주주의'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국가형태라고 주장한다. 왜 그런 주장을 하는 걸까.
잡지 사회주의자는 이를 위해 먼저 왜 사회주의에서 노동자민주주의가 필수적인지를 먼저 설명한다. 설명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적 특성을 가진다. 즉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소유하기 때문에 생산자들에 의해 생산이 통제된다. 이와 달리 자본주의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형태를 보인다. 그 이유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성격 때문인데, 둘의 관계는 사실상은 착취 관계지만 표면적으로는 노동력을 계약하는 '계약관계'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부터 정치와 경제의 상대적 자율성이 나타난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가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부터 파쇼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왕정복고 같은 봉건적 형태의 부활까지도 가능했음을 우리는 이미 역사 속에서 본 바 있다. 이들은 비록 정치적 형태가 다를지언정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는 다르다. 사회주의에서는 정치와 경제는 통일되어 있어서 정치의 변화는 곧 경제의 변화이다. 잡지 사회주의자는 그렇기에 "노동자민주주의가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의 형성의 조성자로서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나중에 사회주의의 세번째 내용과도 연관된다.) 물론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노동자국가의 수립 등등의 요소들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잡지 사회주의자에서는 이런 조건들이 필요조건에 불과하지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비록 이런 필요조건들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노동자민주주의가 사라진 관료주의 하에서는 소외된 노동은 다시 발생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공산주의적 생산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경험이 그러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노동자민주주의가 아니라 '관료적' 사회주의가 되어버렸고 이는 잡지 사회주의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조잡한 경제주의적 사회주의관이 만들어내는 허구적 환상"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왜 현실 사회주의에서 노동자민주주의가 변질되어 버렸을까? 노동자민주주의는 러시아 10월 혁명을 통해 탄생하고 발전할 기회를 얻었지만 혁명을 막 성공시킨 러시아의 사회적 현실은 매우 열악했다. 게다가 소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배신으로 인해 서유럽에서의 혁명은 좌절되고, 곧이어 발생한 내전은 신생 혁명정부를 난관에 빠뜨렸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역량도 아직 부족한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당'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대리주의) 특히 내전으로 인해 전시공산주의가 시행되면서 당내민주주의도 제한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수분파가 소수분파를 억압하는 상황이 펼쳐졌고 그 결과는 끝내 스탈린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스탈린의 집권과 함께 노동자민주주의는 종언을 고하고 관료적 사회주의가 대두하였다. (물론 러시아혁명의 선구자 레닌도 이런 문제점을 자각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도 이를 완벽히 극복해내지는 못했다. 노동자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했던 탓이다. 결국 그 대가는 일시적 제한이 아닌 영구적 제한으로 이어졌다.)
잡지 사회주의자는 노동자민주주의의 변질이 현실 사회주의를 맑스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노동과정은 관료적 전제 아래 놓이고 당과 국가, 특히 당이 자립하여 사회 전체에 군림하는 사회를 만들어 내었다"고 봤으며 이는 "노동자, 민중은 명목상의 주체일 뿐 지배와 억압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즉 진정한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 그저 관료가 지배하는 공동생산체제만 가져왔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능력마저 상실해버려 끝내는 자본주의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고 봤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와 교훈은 노동자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관료적 형태의 사회주의는 결코 사회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 스스로가 발전시켜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잡지 사회주의자는 노동자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변질을 막아야 하며, 이 과제를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의 사회주의 운동의 향배에 달려 있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제1인터내셔널의 규약을 상기시킨다.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스스로에 의하여 획득되어야 한다."
[귀찮은 사람들을 위한 세 줄 요약]
1. 사회주의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이를 위해서 노동자민주주의는 필수적이다.
2. 하지만 현살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민주주의가 변질되어 관료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3. 사회주의 사회의 실현은 노동자민주주의의 부단한 발전을 필요로 하며 이는 노동자들의 참여로 가능하다.
4. 세번째 내용 : 생산과 유통에 대한 생산자들의 의식적 통제

이제는 경제 부분이다. 잡지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경제의 대안이 "생산과 유통에 대한 생산자들의 의식적 통제"가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경제체제가 지시적이고 명령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에 대해 제시된 대안 중 하나가 시장사회주의였는데, 잡지 사회주의자는 여기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즉 이들은 "노동자민주주의가 아닌 시장에서 답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유는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민주주의보다는 시장의 도입이 자신들의 지위에 안정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잡지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와 시장의 결합인 시장사회주의가 결코 좋은 결말을 내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조화로운 결합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승리로 끝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 베트남 등을 보면 '사회주의 기반의 시장경제'를 표방하고 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이들은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장은 결코 사회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시장이 자본주의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지 사회주의자는 시장사회주의자들을 향해 "사회주의자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맹비난한다.
자본주의의 문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잉여가치의 착취뿐만 아니라 상품생산, 시장을 위한 생산에도 있기에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사회주의는 이 모두를 극복해야 한다고 잡지 사회주의자는 주장한다. 왜 상품생산이 자본주의와 연결되어 있는가? 상품생산과 유통이 자본주의적 생산에 있어서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품생산은 맑스가 자본론에서 지적했듯이 생산자가 생산과 유통에 의해 지배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폐해의 책임에서 상품생산 또한 자유롭지 않다. 그렇기에 사회주의는 이런 것도 극복해야만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것이 "결합된 노동자 자주관리체들이 생산과 유통에 대한 생산자들의 의식적 통제를 실현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민주적 계획이라고 잡지 사회주의자는 주장한다. 현실 사회주의 하의 경제체제의 한계는 그것의 관료적 계획이었다. 노동자 민중이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 아닌 관료들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했기에 생산자들의 '의식적' 통제가 아닌 '관료적' 통제에 불과했다.
공산주의적 생산단계는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많은 역량을 쌓아야 한다. 그 역량이 바로 노동자민주주의로서 이뤄져야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노동자민주주의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관료적인 형태로 공산주의적 생산단계를 이루는 것은 노동자 민중의 참여와 적극성을 떨어뜨려 경제의 침체를 가져오게 된다. 반면 노동자와 민중이 스스로 참여하는 방식의 통제라면 노동자 자신이 생산이 주체로서 생산을 관리하는 셈이기에 보다 미래지향적이다.
[귀찮은 사람들을 위한 세 줄 요약]
1. 사회주의와 시장이라는 배제적 요소를 결합시킨 시장사회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2. 지시적, 명령적 경제체제의 대안은 생산과 유통에 대한 생산자들의 의식적 통제이다.
3. 민주적 계획에 대한 회의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관료주의적 계획보다는 미래지향적이다.
5. 네번째 내용 : 노동자 국제주의

노동자 국제주의는 사회주의운동의 전통 중의 전통이었다. 이미 제1인터내셔널만 해도 노동자 국제주의의 기치를 들고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사회주의자들은 국제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제2인터내셔널도 붕괴 이전까지는 반전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노동자 국제주의는 곧 숱한 배신을 맞이하게 된다. 사회주의자를 자칭했던 사람들은 전쟁이 터지자 노동자 국제주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국수주의적 태도로 일관했다. 자국의 노동자 계급에게 타국의 노동자 계급을 죽일 것을 소리높여 외쳤던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여기에 맞서서 외롭게 투쟁하였다. 독일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투옥까지 당하면서 투쟁했고, 프랑스에서는 장 조레스와 암살당하면서까지 반전을 외쳤다. 세르비아와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의회 내에서 반대표를 던졌다. 이런 국제주의적 연대는 나중에 제3인터내셔널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면서 사회주의 체제가 이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볼셰비키들은 러시아에서의 혁명이 곧 서유럽에서의 다른 혁명들로 이어질 것을 기대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서유럽 혁명가들도 이에 맞춰 혁명을 위해 힘썼다. 하지만 소위 '사회민주주의자'들, 특히 제2인터내셔널을 무너뜨리고 노동자 국제주의를 배신했던 기회주의자들은 이번에도 숱한 방해공작을 펼쳤다. 심지어 독일의 경우에는 에베르트, 샤이데만 등을 위시한 사회민주당 인사들이 반동세력과 결탁하여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암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결국 서유럽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좌절되었고 이는 '혁명의 고립'을 가져왔다.
혁명의 고립은 결국 러시아에서 노동자 국제주의와 노동자민주주의의 왜곡 및 변질로 이어지고야 말았다. 잡지 사회주의자는 여기서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이 "허구적"이라고 비판한다. 일국에서의 혁명은 일시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일국사회주의론에 입각하여 소련은 노동자 국제주의를 소련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귀찮은 사람들을 위한 세 줄 요약]
1. 노동자 국제주의는 사회주의운동의 전통이었다.
2. 노동자 국제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사회주의운동은 난관에 봉착했다.
3.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은 노동자 국제주의에 대한 왜곡이다.
반공주의 프로파간다 총집산이누
? 전혀
제내의 얄팍한 이론이 전적으로 반공주의 프로파간다에 기대고 있음
http://lodong.org/wp/archives/12833
일국 사회주의론에 대한 천편일률적 왜곡에 대해서는 김해인 선생의 글을 참조해도 괜찮을듯.
뜨로쯔끼주의-좌익공산주의적 레파토리네
레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