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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운요호 사건, 이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에게 강화도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이승만이 태어나던 1875년은 조선시대 후기로써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던 시대였다당시 일본군함이 강화도에 나타나 포격을 가했던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고, 1876년 일본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이런 상황의 조선 시대에 태어난 이승만은 조선의 정세와는 별개로 머리가 매우 뛰어났다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고 이성계의 18대손의 가계를 가지고 있는 몰락 왕손의 후예인 이승만은 5세에 천자문을 배우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배웠다이어서 남산에 있는 도동서원에 입학하여 10대 시절에는 사서삼경과 통감절요를 읽으며 과거 시험을 준비했었다.

 

이승만은 13세때부터 도합 11차례나 과거에 응시했다그러나 조선 후기 부패한 탐관오리들의 탐욕으로 인하여 이승만은 과거시험에 떨어졌고결국 이러한 상황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서당공부를 중당하고 동학에 입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이승만이 20살이 되던 1894년 조선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혁명이 있었고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이승만은 1895년 미국 감리교선교사가 아펜젤러(Appenzeller)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했다거기서 이승만은 배재학당 영문부에 입학하여 영어 공부에 열중했고영어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역사·지리·산수·성경 등의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임에 따라 입학 6개월 만에 영어 조교사로 발탁됐다.

 

1897년 7월 이승만은 우수한 성적으로 배재학당을 졸업했다그는 졸업생 대표 연사로 선발되어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의 연설을 했다배재학당 시기 그는 서재필이 했던 강의를 들었었는데서재필의 강의는 이승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이승만은 서재필이 조직한 협성회에 참가했고, 1898년 유영익·최정익과 함께 협성회보’ 창간을 주도하여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했다이승만이 20대를 보낸 1890년대 조선의 상황은 격렬한 변화가 있었다. 1895년에는 일본 공사가 보낸 폭도들에게 명성황후가 살해당했고고종이 아관파천하는 일이 있었으며단발령이 발표됐다이런 상황에서 1896년 서재필이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고고종은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1897년 10월 1일 기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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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있던 시절의 이승만) 

  

이처럼 조선 후기 변화가 있자이승만 또한 초기 개화 활동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이후 협성회보가 중단되자 이승만은 매일신문을 개제하여 발간했고매일신문 폐간이 된 이후에는 제국신문에서 주필로 활약했다독립협회가 당시 있던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침탈을 비판하고 의회설립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만민공동회 개최를 준비하자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에서도 활동하며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개화활동을 하던 중 이승만은 조선 당국에 체포되어 재판에서 중형이 선고됨에 따라 서소문감옥에서 옥생활을 하게 됐다당시 이승만은 서소문감옥에서 죄수들을 교육하는 활동을 했었다이 내용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잘 서술되어 있다백범일지에 따르면 그는 당시 감옥서 죄수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고 한다또 이승만 감옥에서 박용만이라는 인물과 의형제를 맺게 됐다그리고 감옥에 있으면서 제국신문의 논설을 쓰기도 했고,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그가 쓴 독립정신은 조선인들을 개화하겠다는 목적에서 집필되었고이 책은 1910년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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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저서인 독립정신, 그는 감옥에 있을 시절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이 독립정신이라는 책은 현재 이승만의 악행을 숨기려는 목적으로 뉴라이트 세력들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

 

1904년 8월 9일 이승만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도움으로 5년 7개월간의 감옥 생활 끝에 출감했다당시 조선의 정세는 엄청나게 변해가고 있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4년에는 비록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봉건 자본주의 국가 러시아와 전쟁을 치렀고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이렇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조선에게 강제로 체결하게 함으로써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이승만은 출옥하자 먼저 출감한 박용만 등은 상동교회 부설로 세운 청년상동학원 교장으로 이승만을 초청했다박용만에게 초청으로 청년상동학원에서 일하게 된 이승만은 교사로 활동했다그러나 1달도 안 되어 이승만은 미국으로 떠났다당시 이승만은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선 미국의 힘을 빌리는 길 밖에 달리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4년 11월 이승만은 제물포에서 미국행 선박에 올랐고, 3주 뒤 미국령 하와이에 도착했다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다시 배를 타 12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으며며칠 뒤 열차편으로 수도 워싱턴으로 향했다워싱턴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던 이승만은 외교활동에서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결국 이승만은 조국으로의 귀국을 단념하고 미국에서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게 됐다이승만은 조선을 떠날 때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으려는 야심이 있었는데실제로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게일언더우드벙커 등 조선 내의 저명한 선교사들로부터 미국 교계 지도자들 앞으로 쓴 추천서 19통도 챙겨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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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교에 다니던 당시 이승만 성적)

 

아무튼 이런 미국 기독교계 인사들의 지원으로 이승만은 1905년 가을학기부터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다. 1907년 6월 졸업할 때까지 2년간 공부에 전념했다비록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이승만은 워싱턴 대학을 마친 뒤 서재필 등의 주선으로 보스턴에서 있는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 즉 현재 기준으로도 세계 최고의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당시 하버드대학에 몇몇 과목에서 D나 C를 받았기에 박사과정을 마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하버드대학에서 2년 내에 박사학위 취득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국내에서부터 친분이 있던 프린스턴신학교 출신 북장로교 홀 선교사를 통해 프린스턴 대학원에 다시 입학했다따라서 이승만은 탄탄한 인맥을 통해 하버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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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대학 졸업할 당시의 이승만)

 

이에따라 이승만은 1909년 9월부터 1910년 6월 중순까지 2년 동안 뉴저지주 소재 프린스턴대학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그는 국제법을 전공으로 했고미국사와 철학사 과목들을 부전공으로 택했다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승만을 지도교수로서 가르쳤던 인물이 바로 미국의 제국주의자이기도 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었다하지만 그의 학위 취득과정에는 의문점이 적지 않다이승만의 동지였지만뒷날 정적이 된 이현구는 자서전에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는 이승만이 통상 12년 이상 소요되는 학부와 박사과정을 단 5년 만에 어떻게 수료할 수 있었는지 미스테리하다.”라고 의문을 제기했다박사학위와 석사학위를 같은 날에 받은 것도 참으로 이해가 안 될 만큼 흥미로운 일이다정확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이렇게 빠른 기간에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주한 선교사를 비롯한 미국 기독교계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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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제국주의자 스티븐슨, 그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했던 친일파이자 친미 제국주의자였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선 한국 독립운동사에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미국의 제국주의자이자 대통령인 테어도어 루즈벨트의 절친인 스티븐슨이 장인환 전명운 의사에 의해 암살당했기 때문이다테어도어 루즈벨트의 절친인 스티븐슨은 일본 제국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악질적인 친일 친미 제국주의자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스티븐슨은 일본은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잘 먹고 잘 살수있도록 유도하고 노력하였던 고마운 나라이다그러므로 조선인들은 이러한 일본에게 감사를 표해야할 것이다와 조선은 원래부터 못 사는 나라가 아니었던가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없이는 살아가기가 힘들다모든 한국인들은 일본 과의 조약 체결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와 같은 제국주의적 망발을 일삼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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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환 전명운 의거를 보도한 미국 신문, 이는 비단 조선 사회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까지 발칵 뒤집었던 사건이었다.) 

  

또한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그는 기자회견에서 한국민이 일본의 보호정치를 찬양하고 있다면서 을사조약은 한국민을 위해 취해진 당연한 조치이며한국민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무지한 민족이다라는 망언을 했다그런 망발로 인하여 그는 조선 교민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기도 했었다그러나 그는 미국의 제국주의자 답게 뉘우침 없이 친일언동을 계속했다결국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오클랜드역에서 재미 조선인인 장인환과 전명운 열사에 의해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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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장인환 전명운 열사 의거 장소, 2018년 11월 필자가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직접 방문했던 곳이다. 당시 필자는 서부 여행에선 한국 여행사가 운영하는 현지 패키지를 이용했는데, 그때 가이드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며 이 장소에 대해 얘기해줬다. 필자를 포함한 여행일원들은 독립투사들을 기억하는 차원에서 거사 장소에서 묵념의 시간을 가졌었다.)

 

장인환과 전명운 열사의 의거는 조선사회는 물론 미국에도 큰 충격을 줬다미국 당국에 의해 체포된 이후 두 의사가 재판을 받게 되자그의 재판과 변호를 위해 미주 본토는 물론이고 하와이 멕시코국내연해주만주중국 등지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답지하여 그 당시 돈으로 7390달러가 모였다당시 장인환 전명운 열사를 변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들은 당시 하버드 대학에서 유학중이던 이승만을 초청했다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에게 장인환 전명운 변호 통역 요청을 거절했다거절할 당시 이승만이 내세웠던 이유는 시간 관계로 오래 있을 수 없으며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 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였다여기서 얘기한 시간 관계를 이해한다 치더라도 살인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구절은 정말 그가 조선의 독립을 생각하는 인물이었는지 심히 의심받을 만하다결국 이승만은 어려운 살림의 교포들이 힘들게 모아 보낸 비용으로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장인환은 재판에서 징역 25년형을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지만조선의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을 살인을 운운하며 변호를 거부한 이승만의 행동은 참으로 큰 오점이었다이후 이승만은 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하고도 갈등을 하게 되는데박용만과의 갈등 당시에는 의형제를 맺은 이에게 믿기 힘들 정도의 배신 행위를 보여주었다그런 인물이 바로 우남 이승만이었고장인환 전명운 열사의 재판 변호 거부는 그가 저지른 악행의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