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들어 작성하고 있는 가제 현대식 묵가 사상 초안인데 아직 한참 미완성이긴 한데
일단 기본적인 이상 세계 틀은 잡아둔 거 같아서 피드백 좀 받고 싶어서 글 올려봄..
구체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혁명/개혁하는 방안들도 작성하긴 해야하는데
솔직히 지금 다루는 이상세계 부분을 먼저 다져야 하지 않나 생각도 들었음...
어쨌든 함 읽어보고 피드백 주심 ㄳ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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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왜 현대식 묵가 사상인가?
현대식 묵가 사상은 묵가 사상과 부가적인 동양 사상의 일부를 필자 기준으로 현대 사회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다. 현대식 묵가 사상은 아나르코 코뮤니즘과 유사할텐데 굳이 아나르코 코뮤니즘 대신 현대식 묵가 사상을 내세우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서구화, 자본주의화, 식민지화 이후로 동양 사회는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과 가치를 상실했고 이를 대체할 서양의 사상과 가치도 제대로 심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현대의 동양 사회는 심각한 윤리 상실을 겪고 있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잊혀진 동양 사상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한 후 이식하려 한다.
2. 현대의 한국(남한), 일본 등 아시아의 친미, 자본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와 관련된 단어에 대해 상당히 거부적인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런 거부적인 사회 분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공산주의, 좌파 이념보다는 묵가 사상을 대신 어필해서 최대한 사람들에게 어필하려 한다.
제1장: “나”와 “너”, “인권”과 “겸애”
고대 묵가 사상에 자주 나오던 “겸애”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나”와 “너”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나"는 과연 존재하는가? "나"의 사고, 감정, 감촉 등 모든 것은 실재한다는 확증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 감정, 감촉 등 "나"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수용하는 그릇, 즉 "나"라는 존재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 "나"의 존재는 내 도덕 기준과 “겸애”의 근간이 된다.
"나"의 존재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의 존재는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체성", 또는 이를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주체성"에 대한 의식은 감정의 실재를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장한다.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만큼 그 감정이 상처받지 않도록 대우받아야 마땅하다. 때문에 "나"는 마땅히 "인격체답게"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 이는 "나"의 "인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너"는 과연 존재하는가? "나"와 달리 "너"의 사고, 감정, 감촉은 물론 "너"의 존재 자체가 실재한다는 확증이 없다. 그러나 반대로 "너"의 존재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반증 역시 없다. "너"의 "주체성"에 대한 의식, 감정의 존재 가능성은 "나"의 그것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절대로 없는 것이 아니며 이는 "너"의 "인격체답게" 대우 받을 권리, "인권"을 증명한다.
"너"는 누구에게 해당되는가? "너"는 단순히 다른 인간 외에도 모든 생명체, 모든 개체, 모든 물건에 해당된다. 다만 통상적으로 무생물체, 예를 들어 바위, 금속 등은 "주체성"에 대한 의식, 감정이 없다고 경험을 토대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이지 않으며(예: 인공지능 등) 언제나 상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또한 타인에 대한 "인권"의 훼손 행위는 타인 뿐만 아니라 행위자의 인격을 훼손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무생물체에게도 행하지 않는 것을 권한다.
이렇게 인권의 보호는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끼리 실수도 아닌 고의로 인해 인권이 침해되는 경우가 절대로 적지 않은데 이는 주로 “공포”와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포는 "나"가 "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 주로 발생한다. 내가 너를 온전히 이해했다면 거의 모든 상황에 대처가 가능하므로 공포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혐오”는 공포에서 파생되는 혐오가 있고 다름을 수용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혐오가 있다.
아무리 내가 너를 온전히 이해해도 이해를 통해 파악한 다름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혐오가 남아있다.
혐오를 이겨내어 남을 사랑하는 것의 핵심은 같은 인간, 인격체인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수용, “관용”하는 것이다. "나"가 바람직하게 "너"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관용이다. 그 다음 가장 권장되는 것은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는 “겸애”이며 가장 이상적인 것은 남의 죄까지 용서할 수 있는 “아가페적 사랑”이다.
제2장: 공동체 조합계 - 이상세계
이제는 위에서 말한 관용과 겸애를 필요로 하는 이상세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현대식 묵가 사상이 지향하는 이상세계는 제국이 사라지고 작은 단위로 나뉘어진 수많은 공동체와 이들의 상호작용을 보조하는 공동체 조합이 주가 되는 세계, 즉 "공동체 조합계"이다.
이 이상세계는 당장은 망상처럼 여겨지겠지만 조금만 목표를 낮춰서 수많은 공동체 조합 대신 여러 소국가들이 주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허황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미국 역시 51개의 국가(주)가 하나의 중앙집권형 제국으로 합쳐진 것이고 중국은 과거에 몇번씩이나 수많은 소국가들로 나뉜 적이 있다. 물론 이를 어떻게 실현할지를 이야기하라 하면 제각각 의견이 분분할테니 당장은 함부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우선은 이 "공동체 조합계"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가장 먼저 "공동체"에 대해 설명하자면 여러 가족, 또는 그에 준하는 무리가 모여 만든 일종의 인위적 대가족이다. 공동체는 공동체원의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과 애정, 존중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자아 실현은 공동체가 제도적으로 충족시켜주기는 어렵다.)(매슬로 욕구위계이론 참고)이 욕구들은 최소한으로라도 안정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공동체는 아래와 같은 요소가 필요하다.
- 농장과 제조시설
- 주거시설
- 자연재해에 대비한 시설
- 외침 및 치안에 대비한 시설
- 의료 지원
- 공통관심사
- 관용과 겸애
- 문화와 교육
이 중에서 일부 요소는 공동체만으로 충당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 일정 기술 수준 이상의 농장, 제조/의료시설(공동체 조합의 공장, 기술집약체를 통해 수급)
- 공통관심사, 문화, 특정 전문 분야의 교육(공동체의 이합집산을 통해 수급)
위와 같은 요소는 마음에 맞는 일반 공동체끼리 구성한 공동체 조합 내에서 지원 및 추출을 통해 특수목적용 공동체를 형성해서 충당한다.
이 공동체와 공동체 조합은 모두 직접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이상적인 단계가 아닌 소국가적 단계라면 소국가 자체는 규모상 불가피하게 간접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운영하더라도 그 하위에 있는 공동체들은 직접 민주주의 기반으로 운영하는 것을 권장한다. 또한 소국가는 필히 소환제도 등과 같은 민중이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아직은 공동체 조합의 규모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공동체 조합보다 상위 조직이 필요한지는 고찰이 필요하다. 다만 묵가 사상에 조금이나마 더 충실하자면 공동체 조합보다 상위 조직은 사회의 불안정성을 감안하더라도 없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제3장: 바람직한 노동 분담
초고도의 기술로 거진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수급하지 않는 이상 사람은 노동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 엄밀히 따지면 그런 기술이 마련된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의 노동은 필요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은 다소 폭이 넓게 사람이 필요로 하거나 소비하길 원하는 재화, 서비스 등을 생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노동은 결과물로서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를 충족시키지만 동시에 노동 자체로 소속감과 애정, 넓게는 존중까지 충족시킨다. 노동자는 자발적으로 형성한 공동체 내에서 노동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노동을 하면서 자아에 대한 애정을 느낀다. 또한 노동자는 노동을 함에 따라 생산물인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하는 소비자들에 대해 존중하게 되고 애정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노동이 존중을 충족시킨다는 건 노동의 주체가 노동의 혜택을 받는 소비자들의 존중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이지 노동을 해야지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우선 노동은 공동체의무형과 개인직업형이 있다. 공동체의무형 노동은 공동체 내 정치 활동, 치안과 방위, 재난 대응 등 공동체 내에서 모든 구성원이 직업보다는 의무로서 해야 하는 노동을 말한다. 개인직업형 노동은 개인이 직업으로서 수행하면서 단순 생산활동 뿐만 아니라 위에서 서술한 정신적 만족까지 느낄 수 있는 노동을 말한다.
노동의 속성은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 노동의 본질 기준: 단순반복성-복잡성
- 노동 환경 기준: 비위생적인 환경-쾌적한 환경
- 사용되는 신체 능력 기준: 신체중심적-사고중심적
- 시간적 요소 기준: 시간제약적음-정기적임-긴급적임
노동은 제각각 다른 속성을 가지는데 노동자가 한가지의 노동만 직업으로서 일주일에 40시간 넘게 하면 이 속성과 관련된 부작용을 겪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단순반복적인 노동만 계속 하면 사고 경직화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계속 노동하면 위생과 관련된 신체적 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게 되고, 사고중심적 노동만 하면 두뇌 쪽에 높은 피로도가 쌓인다.
이런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같은 시간을 일하더라도 서로 상반되는 두 노동을 섞어주면(노동량을 늘리는 게 아니라 기존 노동(예:8시간)에서 절반을 다른 노동으로 할당하는 것이다.) 부작용이 덜 발생하고 해소될 수도 있다. 가령 예를 들어 쓰레기처리 및 청소를 하는 청소부에게 정원 관리 업무를 부여하여 환경관리사 직업을 부여하거나, 공장에서 반복노동하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공장에서 생산할 재화를 직업 디자인하도록 하면서 XX제조장인 직업을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노동자가 두 노동을 직업으로 가지면 생산 효율성은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대신 효율성보다 중요한 노동자 개인의 불행을 줄일 수 있다.
직업에 대한 고찰의 결과 대부분의 노동은 업무시간 및 스케쥴 조정 등을 통해서 모두 동등한 가치의 직업이 되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래에 언급할 극소수이지만 중요한 직업은 동등한 가치의 직업으로 만들기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당장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유일한 사례)가 바로 의사인데 의사는 복잡성, 비위생적인 환경, 사고중심적, 긴급적, 네가지의 모든 강도 높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의사의 경우 자격 조건을 엄격히 하는 대신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그들에게 추가적인 보너스를 지급해야 마땅할 수도 있다.
물론 인공지능 및 로봇 공학이 극도로 발달되면 간급적인 치료는 인공지능에게 전담시켜서 의사가 짊어져야 하는 노동의 강도를 낮출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정도의 과학 기술이 발달되면 노동 자체가 필요 여부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 이게 왜 로갤 사전임 사전 갈 거리는 아닌데 - dc App
글 작성자 의향이 그렇다면 탭 변경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