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문화예술인, 아픈 만큼 성숙해졌다

경향신문 | 김태훈 | 2020.11.01. 10:29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인들에게 충격이었다. 진보정당 23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선거를 치르거나 문화 관련 정책을 입안하는 데 문화예술인들이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낸 경우가 많았다. 그랬던 만큼 보수정권 집권기 9년 동안 되돌아온 칼바람도 매서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기생충>으로 대표되는 한국 영화의 세계적인 위상은 시련을 거친 뒤 더 높아졌다. 문화예술 관련 기관·단체를 장악한 ‘코드 인사’를 넘어 일선 문화예술인들의 밥줄까지 움켜쥔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진보성향 예술인들의 ‘독기’가 더 강해졌다는 분석도 있다.

진보정당과 문화예술인들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정치적 이벤트의 기원을 추적하면 민주노동당이 나온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힌 문화예술인 165인의 지지선언이 있었다. 당시 지지선언에는 박찬욱 영화감독, 조세희 소설가, 임옥상 화가, 서동진 문화평론가 등 문학·미술·영화·평론·공연예술계와 문화 관련 단체 인사들이 광범위하게 포함됐다. 비록 그해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지지선언에 참여한 인사들의 수나 영향력으로 보면 문화계 내에서의 진보정당 지지세는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모든 문화예술인이 진보성향을 띤 것도 아니고, 큰 틀에서 ‘민주진보진영’이라 묶인 문화예술인 사이에서도 지지정당에 따라 지향하는 지점은 달랐지만 이들의 위력은 작지 않았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으며 국회 진출에 성공한 제17대 총선 당시에도 진보정당의 파장이 커진 배경에는 문화예술인들의 지지도 한몫했다. 당시 박찬욱 감독과 배우 문소리씨 등 영화계에서만 226명, 문화예술계를 통틀어 474명이 민주노동당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등 대중예술로서 인지도가 가장 높은 영화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에 힘을 싣는 데 일조했다.

민주노동당 국회 10석 획득에 한몫

위기는 머지않아 찾아왔다.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취임 이후 문화예술계 진보세력에 대한 위축 작업이 계획적으로 시작됐다. 이는 진보진영 내부의 내홍과 맞물려 현재까지도 완전히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의 타격을 입혔다. 2002년 대선 때부터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했고 줄곧 진보신당 등 소수 진보정당을 지지해오고 있는 변영주 영화감독은 “최악의 빌런과 싸우는 과정에서 최선을 지향한 움직임이 번번이 좌절되어온 역사였다”고 말했다. 정국을 주도할 권력은 물론이고, 문화예술계에 미칠 영향력 또한 막대했던 보수정권·정당에 맞서야 한다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보다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온 문화예술인들의 싸움은 늘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변 감독은 “민주당은 공과 과를 함께 평가할 수는 있는 정도지만 현재 국민의힘으로 이어진 보수정당은 진보정당과 문화예술계 모두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혀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나타난 문화예술계 내부의 지형 변화에 진보 문화예술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저항했지만, 이는 다시 정권의 강압적인 조치를 불렀다. 이명박 정부 초기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공공연히 발언했다. 10년 가까이 지난 2017년에야 밝혀진 블랙리스트 명단을 통해 문화예술인들은 뒤늦게서야 자신들을 향한 정권 차원의 공작이 얼마나 교묘하게 진행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문화권력 균형화’라는 이름으로 문화예술계를 탄압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한술 더 떠 ‘문화융성’이란 미명하에 블랙리스트 규모를 더욱 확장시켰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나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시국선언 참여자들은 어김없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들 보수정권 기간 동안 목록에 오른 문화예술인들이 9473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진보성향이라서가 아니라 당시로선 정권에 적대적이지 않았더라도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무분별하게 명단에 포함시켰음을 방증한다. 자신은 중도성향이라고 밝힌 한 연극계 인사는 “현장에서 보면 당시 정부의 조치는 보수성향 예술인이라도 대놓고 정권 코드에 맞춰야 살아남는다는 경고였고, 정권 비판과 무관한 내용이라도 먼저 자기검열부터 하라는 신호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진보정당과 끈끈한 유대 회복 과제로

당시 보수정권의 일방통행에 반감을 느낀 나머지 별다른 정치적 입장을 보이지 않던 예술인들조차 반대 입장을 취하게 만들 정도로 비판적 문화예술인이 늘어난 현상은 진보성향 예술인들의 결의와 응집을 유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정치와의 관계를 놓고 보면 진보정당이 분열된 상태로 이전까지의 영향력을 잃어버리면서 문화예술계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을 여력이 없었던 문제도 컸다. 진보정당과 문화예술인 사이 만들어졌던 끈끈한 유대 대신 각기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만 남은 셈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때 진보정당 지지에 발 벗고 나섰던 인사들이 등을 돌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진보정당 지지를 표명했던 한 문화평론가는 “더 이상 현실정치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고 말을 아꼈다. 역시 진보정당 지지에 나선 바 있는 한 소설가도 “블랙리스트 사태를 보며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고 밝히는 게 두려워질 정도로 트라우마가 생기기도 했지만 진보정당들의 의제나 정치적 역량이 갈수록 기대에 못 미쳐 지지를 망설이게 된 점도 있다”고 말했다.

문화예술인들이 진보정당과 비슷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편향적 예산지원이나 코드 인사에 대한 불만 때문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자유로운 창작활동과 문화예술의 공공성을 지향하는 예술계만의 특수한 생리가 진보정당과 닮아 있다. 진보정당 내부에 발 벗고 뛰어들어 현실정치 안에서 문화예술인의 기본권과 권익을 보장하려 나선 인물도 있다. 2019년 노회찬재단 설립 당시 이사로 참여했고 지난해 정의당 차별금지법추진특위 위원장에도 임명됐던 김조광수 영화감독이 대표적이다. 그는 올해 치른 제21대 총선에서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결국 출마의 뜻을 접었다.

김조광수 감독은 정치 영역에서 활동하기엔 개인적 성향이 잘 맞지 않는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동시에 진보정당 내부에서 해결되지 않고 있는 과제 역시 정치 참여 의사를 접게 만든 이유라고 밝혔다. 그는 “보수와 진보를 떠나 기성 정당들이 모두 문화예술인들이 처해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서는 더 이상 정치에 몸담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라며 “문화예술인들이 선거 때마다 각 정당의 얼굴마담으로 이용된 뒤 돌아서면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해묵은 숙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