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minology적으로 접근할 때, 독재(dictatorship)라는 단어는 19세기와 현재의 의미가 매우 다르다. 마르크스가 처음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표현을 만들었던 시기 세계의 정치체제는 왕정이 디폴트였고, 보통선거는 없었다. 당연히 민주주의 vs. 독재라는 어휘적 대립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의미로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 시기 독재라는 단어는 그 어원인 고대 로마의 직위 독재관(dictator; 딕타토르)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독재관은 로마가 위기에 처했을 때(=비상상황) 한시적으로 군권과 민정권을 독점하고, 로마 7언덕 구역 안에서도 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간단히 말해, 현재의 의미에 맞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재번역하면 차라리 프롤레타리아 계엄이라고 부르는 게 더 가까운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즉 다시 말해 마르크스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계급사회가 무계급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 필연적인 혼란을 보다 질서있고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권력체계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계급사회의 속성상 모든 권력체계는 본질적으로 계급독재라고 보았고,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있어서도 같았다. 정리하자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본디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이 된 계급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칼 슈미트는 "무엇이 비상상태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주권자"라고 했는데, 이 규정만큼 주권자 = 지배계급이라는 마르크스의 아이디어와 상통하는 규정도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좌파가 아는 사실이며, 마르크스에 대한 호교론의 논지로 자주 사용된다. 부르주아 독재 = 부르주아 민주주의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는 것. 때문에 김씨 3대 세습이나 중국 공산당의 인권침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본질적 속성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물론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문제는, 역사적 terminology 변화에 있어 '독재'라는 단어가 변화할 때, 그 변화의 근간을 구성한 흐름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독재라는 관념의 형성 과정 - 20세기 초 양차대전과 이에 따른 제국들의 붕괴 및 자유주의의 승리 - 은, 마르크스주의 진영도 함께 경험한 것이고 그 속에서 러시아 혁명 및 각종 제3세계의 혁명운동이 성장해 왔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 역시 마르크스 본인의 것인 채 박제되어 고정된 것이 아니라, 20세기의 역사적 경험에 맞춰 변화한 것이다.
이 변화의 본질은 결국 '비상상황'의 재정의이다. 본래 마르크스에게 있어 독재관을 필요로 하는 비상상황이란 계급사회에서 무계급사회로의 이행기였다.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를 그 독재관으로 하여 통치되다가 국가가 사멸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혁명을 해 보니, 그런 추상적인 개념보다 당장 피부에 와닿는 비상상황이 있다. 당연하지만, 혁명 그 자체다. 기존 지배계급을 끌어내리고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이 되기까지의 기간 자체도 만만찮은 비상상황인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혁명가들은 부르주아가 장악한 언론을 탄압하고, 구체제 부활을 꿈꾸는 정치세력을 숙청하고, 필요할 경우 프롤레타리아 통치기관 자체를 무력화하는 시도조차 서슴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여러 종류의 옹호론이 있고, 나도 그 옹호론의 많은 부분에 동의한다.
이 상황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다: 비상상황은 언제 끝나는가?
많은 혁명주의자들이 외면하는 사실은, 사람은 지속되는 비상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비상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발휘되는 온갖 영웅적 미덕을 찬양할 수 있지만, 그 상태를 일상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부르주아 지배체제 역시 구체제에서의 이행과정에서 많은 영웅적 순간들을 남겼지만, 결국 그 지배가 공고화된 것은 영웅이 필요없어진 이후였다.
즉 어느 순간 비상상황은 끝나고, 일상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체제는 지속될 수 없다. 이것이 단순히 사회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민주주의의 공고화(consolidation of democracy)'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아무리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라 할지라도 매년 한 번씩 6월항쟁을 일으키며 살 수는 없다. 제아무리 원리주의적인 레드넥 민병대라도 매일매일을 국가의 폭압에 대비한 훈련으로 보낼 수는 없다(사실 그런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보지 않는다). 즉,어떤 혁명적 과정을 거쳤든간에, "더이상 구체제는 부활할 수 없다"라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인민은 각자의 삶을 돌보러 돌아가야 한다.
계급지배 =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마르크스의 원래 개념상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개념상에서 비상상황이란 고도의 추상적인 비유일 뿐이다. 무계급사회의 평화와 계급사회의 계급 간 적대를 대비시켜 후자를 비상, 혼란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때문에 엄밀히 말해 이 맥락에서의 비상상황은 인민의 일상과 대립되는 상황이 아니며, 그 끝 역시 국가의 사멸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새롭게 나타난 비상상황, 즉 바로 그 계급지배로 가는 과정으로서의 비상상황은 그렇지 않다. 계급지배를 만드는 과정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원초적일 수 있으며, 인민의 일상과 대립된다. 인민은 혁명의 방어를 위해 총을 들 것이며, 다소의 감시와 부자유를 감수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소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부정적 측면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다. 그들의 국가 시스템은 혁명의 방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필요했던 장치들의 제도화로 구성됐다. 지나친 검열, 강제적인 일당제, 관료들의 비대한 영향력, 통치기관에 대한 부족한 견제... 이 중 무엇이 마르크스가 본래 주장했던 바인가? 때문에 나는 엄밀히 말해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였다고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국가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항했던 혁명 국가(revolutionary state)에 불과하다. 마치 테르미도르 이전까지 산악파가 이끌던 프랑스처럼.
여기서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자.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지배 그 자체로서의 개념과 계급지배 이행기의 방편으로서의 개념으로 분화됐다. 그럼 후자의 개념은 전자의 개념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새로운 문제가 파생된다: 그럼 계급지배 이행기가 끝나고 완전한 계급지배가 달성된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계급지배란 무엇인가? 프롤레타리아가 비가역적으로 지배계급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단순한 답안들이 있다. 지배계급이라는 것은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계급이다. 그러면 생산수단은 어떻게 장악하는가? 사적 소유가 아닌 형태의 생산수단 장악은 어떤 형태이며, 어떻게 계급적 지배를 보장하는가? ; 계급정당이 계급지배의 도구이다. 그러면 계급정당의 계급성은 어떻게 담보되고 유지되는가? 부르주아 정당의 부르주아 계급성은 부르주아 계급지배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 노동자평의회가 새로운 국가기구가 되는 것이 핵심이다. 그 노동자평의회는 일상적 동원체제와 어떻게 다른가? 혁명기 소비에트의 영웅적 위업을 매일 매월 매년 반복하자는 뜻인가? 이와 같이 각각의 기존 답안들은 단편적인 단서일 뿐(결코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다), 더 많은 의문점을 불러온다.
내 한계는 여기까지다. 이론의 공백을 조명하긴 했지만, 답을 낼 능력은 나에게 없다. 다만 몇 가지 결론을 대신해 하고 싶은 말은 있다. 첫째, 난 이상의 한계를 이유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포기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결단코 없다. 계급지배의 전화 없이 즉시 계급지배를 철폐하겠다는 생각은 망상이며, 이미 마르크스가 거꾸러뜨린 망령이다. 둘째, 많은 좌파들이 잊는 사실인데,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도 '국가'다. 국가로서 가지는 본질적 속성과 한계들이 있고, 이는 무시되어선 안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존재는 반드시 다른 국가의 존재를 상정하며, 국가 간의 상충하는 국익의 존재를 포괄한다. 이를 무리하게 노동자 국제주의라는 앙상한 이상으로 깔아뭉개려 하는 것이 오히려 유사 제국주의적 상황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 외에도 무엇이 국가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이고 무엇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에서는 철폐되어야 하는 구체제적 속성인지, 추상수준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셋째, 가설 수준에서 갖고 있는 아이디어지만, 지배계급이 된다는 것은 그 계급의 이익에 다른 모든 계급의 이익이 종속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생산수단의 장악은 그것을 이루는 본질적 방법이고. 얼치기 진보주의자들은 인민이 삼성 상속세를 걱정해 주는 것을 비웃곤 하지만, 부르주아가 지배계급인 이상 부르주아의 손해는 반드시 일정 정도 다른 계급에게도 확장/이전된다. 그 자리에 프롤레타리아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프롤레타리아는 인민의 호민관이어야 한다"라던 마르크스의 언급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여기까지 진짜로 다 읽은 동지가 있다면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지금은 공부도 투쟁도 하지 않지만,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 있던 생각을 풀어놓고 싶었던 나이 든 노동자의 한풀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그럼 이만.
이 시기 독재라는 단어는 그 어원인 고대 로마의 직위 독재관(dictator; 딕타토르)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독재관은 로마가 위기에 처했을 때(=비상상황) 한시적으로 군권과 민정권을 독점하고, 로마 7언덕 구역 안에서도 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간단히 말해, 현재의 의미에 맞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재번역하면 차라리 프롤레타리아 계엄이라고 부르는 게 더 가까운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즉 다시 말해 마르크스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계급사회가 무계급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 필연적인 혼란을 보다 질서있고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권력체계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계급사회의 속성상 모든 권력체계는 본질적으로 계급독재라고 보았고,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있어서도 같았다. 정리하자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본디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이 된 계급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칼 슈미트는 "무엇이 비상상태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주권자"라고 했는데, 이 규정만큼 주권자 = 지배계급이라는 마르크스의 아이디어와 상통하는 규정도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좌파가 아는 사실이며, 마르크스에 대한 호교론의 논지로 자주 사용된다. 부르주아 독재 = 부르주아 민주주의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는 것. 때문에 김씨 3대 세습이나 중국 공산당의 인권침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본질적 속성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물론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문제는, 역사적 terminology 변화에 있어 '독재'라는 단어가 변화할 때, 그 변화의 근간을 구성한 흐름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독재라는 관념의 형성 과정 - 20세기 초 양차대전과 이에 따른 제국들의 붕괴 및 자유주의의 승리 - 은, 마르크스주의 진영도 함께 경험한 것이고 그 속에서 러시아 혁명 및 각종 제3세계의 혁명운동이 성장해 왔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 역시 마르크스 본인의 것인 채 박제되어 고정된 것이 아니라, 20세기의 역사적 경험에 맞춰 변화한 것이다.
이 변화의 본질은 결국 '비상상황'의 재정의이다. 본래 마르크스에게 있어 독재관을 필요로 하는 비상상황이란 계급사회에서 무계급사회로의 이행기였다.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를 그 독재관으로 하여 통치되다가 국가가 사멸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혁명을 해 보니, 그런 추상적인 개념보다 당장 피부에 와닿는 비상상황이 있다. 당연하지만, 혁명 그 자체다. 기존 지배계급을 끌어내리고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이 되기까지의 기간 자체도 만만찮은 비상상황인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혁명가들은 부르주아가 장악한 언론을 탄압하고, 구체제 부활을 꿈꾸는 정치세력을 숙청하고, 필요할 경우 프롤레타리아 통치기관 자체를 무력화하는 시도조차 서슴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여러 종류의 옹호론이 있고, 나도 그 옹호론의 많은 부분에 동의한다.
이 상황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다: 비상상황은 언제 끝나는가?
많은 혁명주의자들이 외면하는 사실은, 사람은 지속되는 비상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비상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발휘되는 온갖 영웅적 미덕을 찬양할 수 있지만, 그 상태를 일상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부르주아 지배체제 역시 구체제에서의 이행과정에서 많은 영웅적 순간들을 남겼지만, 결국 그 지배가 공고화된 것은 영웅이 필요없어진 이후였다.
즉 어느 순간 비상상황은 끝나고, 일상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체제는 지속될 수 없다. 이것이 단순히 사회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민주주의의 공고화(consolidation of democracy)'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아무리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라 할지라도 매년 한 번씩 6월항쟁을 일으키며 살 수는 없다. 제아무리 원리주의적인 레드넥 민병대라도 매일매일을 국가의 폭압에 대비한 훈련으로 보낼 수는 없다(사실 그런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보지 않는다). 즉,어떤 혁명적 과정을 거쳤든간에, "더이상 구체제는 부활할 수 없다"라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인민은 각자의 삶을 돌보러 돌아가야 한다.
계급지배 =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마르크스의 원래 개념상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개념상에서 비상상황이란 고도의 추상적인 비유일 뿐이다. 무계급사회의 평화와 계급사회의 계급 간 적대를 대비시켜 후자를 비상, 혼란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때문에 엄밀히 말해 이 맥락에서의 비상상황은 인민의 일상과 대립되는 상황이 아니며, 그 끝 역시 국가의 사멸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새롭게 나타난 비상상황, 즉 바로 그 계급지배로 가는 과정으로서의 비상상황은 그렇지 않다. 계급지배를 만드는 과정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원초적일 수 있으며, 인민의 일상과 대립된다. 인민은 혁명의 방어를 위해 총을 들 것이며, 다소의 감시와 부자유를 감수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소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부정적 측면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다. 그들의 국가 시스템은 혁명의 방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필요했던 장치들의 제도화로 구성됐다. 지나친 검열, 강제적인 일당제, 관료들의 비대한 영향력, 통치기관에 대한 부족한 견제... 이 중 무엇이 마르크스가 본래 주장했던 바인가? 때문에 나는 엄밀히 말해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였다고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국가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항했던 혁명 국가(revolutionary state)에 불과하다. 마치 테르미도르 이전까지 산악파가 이끌던 프랑스처럼.
여기서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자.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지배 그 자체로서의 개념과 계급지배 이행기의 방편으로서의 개념으로 분화됐다. 그럼 후자의 개념은 전자의 개념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새로운 문제가 파생된다: 그럼 계급지배 이행기가 끝나고 완전한 계급지배가 달성된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계급지배란 무엇인가? 프롤레타리아가 비가역적으로 지배계급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단순한 답안들이 있다. 지배계급이라는 것은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계급이다. 그러면 생산수단은 어떻게 장악하는가? 사적 소유가 아닌 형태의 생산수단 장악은 어떤 형태이며, 어떻게 계급적 지배를 보장하는가? ; 계급정당이 계급지배의 도구이다. 그러면 계급정당의 계급성은 어떻게 담보되고 유지되는가? 부르주아 정당의 부르주아 계급성은 부르주아 계급지배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 노동자평의회가 새로운 국가기구가 되는 것이 핵심이다. 그 노동자평의회는 일상적 동원체제와 어떻게 다른가? 혁명기 소비에트의 영웅적 위업을 매일 매월 매년 반복하자는 뜻인가? 이와 같이 각각의 기존 답안들은 단편적인 단서일 뿐(결코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다), 더 많은 의문점을 불러온다.
내 한계는 여기까지다. 이론의 공백을 조명하긴 했지만, 답을 낼 능력은 나에게 없다. 다만 몇 가지 결론을 대신해 하고 싶은 말은 있다. 첫째, 난 이상의 한계를 이유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포기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결단코 없다. 계급지배의 전화 없이 즉시 계급지배를 철폐하겠다는 생각은 망상이며, 이미 마르크스가 거꾸러뜨린 망령이다. 둘째, 많은 좌파들이 잊는 사실인데,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도 '국가'다. 국가로서 가지는 본질적 속성과 한계들이 있고, 이는 무시되어선 안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존재는 반드시 다른 국가의 존재를 상정하며, 국가 간의 상충하는 국익의 존재를 포괄한다. 이를 무리하게 노동자 국제주의라는 앙상한 이상으로 깔아뭉개려 하는 것이 오히려 유사 제국주의적 상황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 외에도 무엇이 국가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이고 무엇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에서는 철폐되어야 하는 구체제적 속성인지, 추상수준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셋째, 가설 수준에서 갖고 있는 아이디어지만, 지배계급이 된다는 것은 그 계급의 이익에 다른 모든 계급의 이익이 종속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생산수단의 장악은 그것을 이루는 본질적 방법이고. 얼치기 진보주의자들은 인민이 삼성 상속세를 걱정해 주는 것을 비웃곤 하지만, 부르주아가 지배계급인 이상 부르주아의 손해는 반드시 일정 정도 다른 계급에게도 확장/이전된다. 그 자리에 프롤레타리아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프롤레타리아는 인민의 호민관이어야 한다"라던 마르크스의 언급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여기까지 진짜로 다 읽은 동지가 있다면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지금은 공부도 투쟁도 하지 않지만,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 있던 생각을 풀어놓고 싶었던 나이 든 노동자의 한풀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그럼 이만.
비상사태는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한 포위를 극복해내고 국제노동계급이 승리를 이룰 때까지라고 생각함.
너무나 길게 설정된 해당 과정에서 강제적 일당제와 관료과두적 집산제가 굳어져버릴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먼 곳에 계엄 해제의 시점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함 하긴 그래서 마르크스 선생님이 세계혁명론을 가져오신 거겠다는 생각이 들긴 함
부르주아 지배는 왕정과 귀족이 이미 세계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던 19세기에 이미 영국에서 완전히 공고화됐다. 제국주의 열강의 포위가 100년이고 200년이고 지속되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도래는 불가능한가? 그럼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는 자기 역량으로 달성될 수 없는 거 아닌가?
토지귀족들은 부동자산의 자본화를 통해 손쉽게 부르주아 지배체제 하의 기득권층으로 흡수될 수 있었기에 큰 변혁 없이 부르주아 지배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반면에 노동자-자본가 관계는 결코 그렇지 못하지.
당과 대중을 대립관계로 보는 게 아니라 둘은 그냥 다른 거. 인민은 인민 그 자체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님. 당이 기능적/유기적으로 대중과 연결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당이 인민을 대신하거나 인민의 존재를 담보할 수는 없다.
귀족-부르주아 관계와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관계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데는 동의함. 그러나 이유가 설명되더라도 한계가 극복되는 것은 아님. 결국 전세계 부르주아의 절멸까지 혁명의 종료가 유예된다면 그 혁명은 그냥 안 끝나는 혁명이 될 가능성이 크다.
동지의 의견에 많은 부분 동의하며, 우리가 과거의 실패와 핏빛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질문에 확고히 답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동지!
고맙습니다. 문제의식을 방기한 사람이라 좀 민망합니다만, 많은 동지들이 같이 생각하면 언젠가는 답이 나오겠지요.
두서없이 글을 쓰다 보니 깜박한 내용이 있는데, 전체 논지에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고 여담에 가깝다. 마르크스는 아무래도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멀지 않았던 시대를 산 사람이라, 혁명 과정이 오래 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사람임. 1848년 혁명만 봐도 알지만 당대 유럽에서 혁명은 한 번 불붙으면 긴밀히 연결된 각국으로 불길처럼 퍼지는 거였고
몇 개월 안에 끝났음. 아마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 자국 내 혁명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혁명 국가를 포위하는 상황 자체를 상정 못했을걸. 그래서 20세기에 생각 못했던 오차가 발생한 거임.
본인도 본문에서 제시한 의문점의 존재에 강력히 동의함
공감에 감사를 표합니다.
본인이 여전히 맑스주의자였다면 상당부분 동의할만한 부분이 있었을 듯한 글이네. 되게 재밌게 읽었음. - dc App
잘 읽어줘서 감사. 본인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아나키즘에 적대적이지만, 진정성 있는 아나키스트 사람까지 적대하진 않음. 건투하시길!
지, 진정성 있는 아나키즘이 뭐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이 아닌 계급투쟁적 성격 있는 아나키즘을 말하는건가? - dc App
진정성 있는 아나키즘이 아니라 진정성 있고 아나키스트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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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레닌주의 모범답안인데, 핵심을 잘못 짚고 있음. 첫째, 당과 대중의 이해가 불가분이라는 건 선언일 뿐 실제가 아님. 세상에 이런 당은 존재할 수 없음. 하다못해 부모도 자식과 불가분의 이해를 갖지 않음. 또한 세상의 모든 정책은 광범위한 지지와 성원 속에서 결정되며 중요한 건 그 광범위한 지지와 성원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임.
원글에 내가 부르주아 계급정당의 부르주아 계급성이 부르주아 계급지배의 원인이냐 결과냐를 물었는데 이를 좀 더 고민해 보길 권함.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성은 결코 주어진 공리가 아님.
둘째,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 철폐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음. 동원(mobilization)은 단순히 상층의 천편일률적인 지시 이행 관계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님. 자연인으로서의 존재를 잠시 정지하고 사회에 의해 호명되는 주/객체로서만 존재하도록 강제/유도한 상태가 동원임. 기층의 열망이 있고 없고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있다 한들 그게 영속화될 수는 없음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도 결국 계급사회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음. 물론 다수 대중의 지배라는 점에서 우월하지만 본질적으로 계급사회가 가진 한계를 초월할 수는 없음. 사적 개인과 공적 조직의 대립, 대리인과 피대리인의 대립 등이 그러함. 가능하지 않은 이상을 가능한 것처럼 분식하는 것이 혁명 타락의 1보라고 생각함.
개추다 개추 정말 좋은 글이다. 나 개인으로서도 가지고 있던 가려움을 속 시원하게 긁어준 것 같다.
좋아해 줘서 고맙다 ㅋㅋ
잘 읽었고... 다만 내 생각은 과거의 현실사회주의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수도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봐. 님은 과거의 현실사회주의를 일종의 비상상황에서 선의를 가지고 pt독을 집행하려했던 거라고 보면서 그 한계를 지적하지만, 난 그들이 과연 선의였는가, pt독이 뭔지나 알고 pt독을 하려고 했던건가(전위성이 담보되지 않는 자칭 계급의 전위당의 일당독재라....), 그것이 사회주의적 안타 타점 안에 들어가는건가 믿지 않거든. 미래를 논했으면 좋겠음. 과거는 포기하고
잘 읽어줘서 감사. 내가 현실사회주의 국가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며 논의를 전개한 것은 그래야만 선의로 해결되지 않는 한계가 보일 수 있기 때문임. 악의적인 놈들이 해서 잘못된 거니 우리가 다시 하면 괜찮다 이런 건 너무 무책임한 얘기. 과거의 한계를 정확하게 되짚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고 봄.
그리고 혁명성과 안정성을 대비하면서 '변화를 싫어하는 인간의 일상 회귀'를 긍정적? 불가피적?으로 보는거같은데 이거는 나는 완전히 다르게 생각함. 그거는 우리가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봐. 안정성은 어쩔수없다는 명제를 받아들이면 사실 그 다음에는 모든게 불가능해지는거같아서. 자본주의 탄압보다 그 안정성 굳어버림 변화를 멈춰버림이 더 두려워
이 점에서는 조금 오해가 있는 듯한데, 인간의 일상 희구와 혁명은 대립되는 영역이 아님. 애초에 그럼 사회주의는 모든 걸 더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한 사상이고 체제인가? 역사의 변증법적 흐름 속에서 특정 시점의 필요성이 전화되지 못하고 화석화되는 것에 대한 경계라고 봐줬으면 좋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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