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혁명가 카다피)
물론 리비아 사태에서 카다피 정권의 실책이나 과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매우 확대시켜 선전함으로써 일종에 그린 리비아에 대한 악마화 이미지를 아주 성공적으로 전 세계에 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리비아 내전에서 서방에 의해 제거당한 카다피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었고, 그는 과연 서방이 말하는 것처럼 오로지 독재 권력만 탐하며 인민들을 무자비하게만 다루며 경제를 막장으로 이끈 인물이기만 한 걸까?
카다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투가 전개되고 있던 1942년 리비아에서 태어났다. 베두인족의 후예였던 카다피는 “식민주의자들의 횡포와 이탈리아로부터의 독립투쟁”에 대해 들으며 자랐고, 유목생활 중 코란을 배우는 과정에서 탁월한 학습 능력을 보였었다. 청소년이 된 카다피는 리비아 페잔의 중학교에 입학했고, 1961년 그는 아랍지역의 통일을 갈망하면서 일어난 리비아 학생들의 시위에 참가했다. 이후 군인의 꿈을 가지고 사관학교에 입학한 카다피는 이후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서방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드리스 국왕과 반동적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에 반대하여 1969년 혁명을 일으켰다.
(그린북, 카다피 동지가 쓴 원전이다.)
1969년 9월 1일 카다피는 거사를 시행했고, 왕정세력들을 축출함으로써 리비아 아랍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정권을 잡게 된 카다피는 당시 미국과 소련 그 어느축에도 들지 않으려 했던 제3세계의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 및 사상을 창시하고자 했다. 그는 경제분야에서는 사회주의를 통해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했고, 제국주의와의 무장투쟁으로 궁극적인 평화를 달성하고자 했다. 카다피는 국제 정치 차원에서 적극적 중립과 비동맹을 견지하며 평화공존을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카다피가 주도한 혁명 이후 리비아에선 서구식 민주주의의 방법과 제도가 사라졌는데, 이른바 대중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의 대중민주주의에서는 온 국민이 의사결정자가 되고 어떤 대표자난 대변자를 두지 않고 국사를 관리함으로써 국가기관에 대한 대중 참여가 극대화 되기를 추구했다. 이걸 수행하기 위해 카다피는 모든 계층과 모든 문제에 대한 정치적 결정 과정에 모든 국민의 참여가 보장될 수 있도록 민초에서 상층부까지 수평적인 차원의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경제부분에 있어 카다피는 소유권이 모든 인민들에게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수평적 소유제도를 만들려고 했다. 경제의 모든 생산부믄을 공동소유를 통해 인민이 직접 지배하고 관리하는 제도다. 그는 본질적으로 착취성이 없는 한 민간부문의 발전을 뒷받침하여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고 근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인이 생산과 서비스를 담당하도록 강조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카다피의 ‘제3세계 이론’의 핵심이었다.
(리비아의 대수로 공사)
카다피는 농업부문에 있어 자급자족 수준으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노동인구 20%를 차지하던 농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농업발전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농민들이 자력으로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땅을 배분하여 모든 농부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도록 했고, 만약에 한 사림이 자기 개인적 소유를 위하여 농장을 건설하기 원한다면 그렇게 할 자격을 부여했다. 1970년부터 시행된 카다피의 계획으로 관개용지, 목초지 개발, 대수로 공사, 현대적 영농기법 개발을 포함하여 전체 개발예산의 1/6이 농업 개발에 투자됐다. 이러한 생산량은 향상되었고, 1970년 2만 7000톤이었던 밀 생산이 1983년에는 21만 3000톤에 이르렀다. 그 사이 채소 생산은 10.8%가 증가했고, 보리와 과일 채소 육류, 계란, 우유 등의 수요과 증가했다.
1969년을 시작으로 카다피의 리비아는 산업다각화를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했다. 여기서 카다피는 공업부문에서의 노동착취를 종결시키고, 노동자를 생산순환 구조에서 파트너로 간주하는 새로운 협력관계를 확립했으며, 근로자가 생산하고 관리한 정당한 몫을 받는 제도 즉 자본주의식 착취구조인 임금제도를 철폐하고자 했다. 1981~85년의 5개년 개발 계획 동안 리비아는 산업 생산의 연간 22,6%의 성장률과 산업생산품 수출의 연간 2.4% 증가 그리고 석유산업 분야 노동자 수 연간 11% 증가를 보여줬다. 이러한 카다피의 사회주의 정책은 전제군주 시대보다 리비아 사람들의 경제적인 몫을 향상시켜 보다 잘 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69년 당시 카다피가 이끈 혁명 시점에서 6만 5000가구가 무주택자였다. 카다피는 민중의 주거 시설을 제공하기 위해 주택문제의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계획을 실행했다. 1969년에서 1975년 사이 총 11만 212가구의 주택이 건설됐고 비어 있는 건물은 필요한 가구에게 분배됐다. 국가는 저소득 가구가 주택을 구입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월 150달러 이하의 소득자에게는 원가의 10%만 부담시켰고, 빈민과 저소득층 가구는 자금 부담 없이 집을 가질 수 있었다.
카다피의 혁명으로 리비아 사회에선 여성들의 사회활동도 많은 변화를 보였다. 카다피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억압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그르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사회가 일하기 원하는 남성과 여성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다피 이전의 리비아 사회는 여성에게 균등한 교육, 고용, 국가건설의 기회를 주지 않았지만, 카다피가 들어선 이후에는 많은 법률들이 제정되어 여성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법적절차에 있어 이혼을 위한 동등한 권리와 적령에 달한 여성에게 미래의 남편을 선택할 권리 그리고 인민의회와 인민위원회에서 남자와 똑같은 자역으로 참여하고 활동하는 것이 보장됐다. 또한 카다피의 교육 혁명으로 인하여 1968~78년 사이 중등교육을 받는 여학생 수가 4배 이상 증가했다.
카다피가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리비아는 여러 변화를 거쳤다. 모든 가정의 전기는 무료였고, 신혼부부는 집을 살 때 국가에서 5만 달러를 지원받았으며, 모든 종류의 대출은 법으로 이자가 0%였다. 모든 교육은 무료였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여 리비아 국민 중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인구에서 83%까지 증가했다. 의료 서비스는 무료로 제공됐고, 자동차를 사면 정부에서 비용에 50%를 지불했다.
서구 제국주의에 반대해 오던 카다피는 1970년 10월 리비아의 상업부문을 움켜쥐고 있던 거대지주 이탈리아인 2만 명을 추방했고 모든 외국은행, 보험회사, 원유 운반시설과 몇몇 석유회사를 국유화했다. 이러한 조치에 미국은 리비아와 사이가 안좋아졌고, 1980년에는 외교관마저 철수시켰다. 미국은 카다피가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제와 군사적 보복을 자행했다. 1980년대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은 CIA를 통해 카다피 반대파들과 협력해서 쿠데타를 준비하기도 했었고, 1986년 2월에는 170대의 미군 비행기를 보내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공습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미국이 노골적으로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를 암살하기 위해 저지른 짓이었고, 이러한 공습으로 230명의 리비아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후 미국은 1988년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일어난 팬암기 폭파 사건을 리비아와 연루시켜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유엔의 경제제재를 단행했다.
정리하자면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는 서방이 선동하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민중을 개돼지로 취급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끈질긴 투쟁을 해왔고, 미제국주의의 경제제재 속에서도 견디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무상의료, 무상전기 제공, 주거해결등을 통해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리비아 내전이 끝난 이후에 들어선 새 리비아 정권은 결국 혼란만 가중시켰고, 현재 리비아는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서구 제국주의의 선전책동에 휘말린 사람들은 카다피에 대해 안좋은 얘기만 하지만, 정작 NATO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학살당한 리비아인에 대해선 아무런 말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혁명이라며 옹호하는 행태를 보였다. 우리는 미국이 민주화와 민주주의를 핑계로 베네수엘라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했던 일을 잊어선 안될 깃이고, 리비아 또한 그런 사례중 하나였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언제나 그립읍니다.. - dc App
아 님은 갔습니다. 아라비아의 체게바라이신 카다피 동지가 갔습니다. 인도주의와 인권을 가장한 제국주의자 흑인 오바마 미국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도시는 초토화되었습니다. 카다피 동지는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헐리우드 배우 대통령인 제국주의자 레이건이 벵가지를 공습해서 수양딸을 잃었던 카다피 동지는 제국주의와 결사항전 하였습니다. 그렇게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신 카다피 동지는 산화했습니다. 이렇게 님은 갔지만 혁명을 꿈꾸는 전 세계 단결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겐 님은 잊지못할 혁명가입니다. 카다피 동지 만세!
이건 정말 개추 - dc App
리비아 반혁명 지지했던 자칭 민주주의자+좌파들은 지들이 이것보다 더 심한 지옥불을 만들었다는 거에 대해선 전혀 문제의식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