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은 그에 앞선 스페인 내전과 함께 현대사에서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이라고 일컬어져왔다. 근대에 들어서 동서양에 많은 전쟁이 있었고, 20세기 현대사에서만도 전체 지구를 덮은 처절한 전쟁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유독 스페인 내전과 베트남 전쟁을 두고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괴로워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베트남 동란'은 그 성격과 배경이 복잡하다. 그 전쟁의 한쪽 당사자가 공산주의 세력이고 다른 한쪽이 반공주의 세력이라는 사실만으로 베트남 동란을 '공산주의 대 반공주의의 대결'로 획일화한 단색적 도식화는 진실에서 너무나 먼 것이었다. 바로 그 '반공산주의'의 주도자로 그 동란에 뛰어든 미국이 결국 실패라고 만 것은 베트남 동란의 복잡한 성격과 배경을 지나치게 단색적으로 도식화했던 결과다.
베트남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연합국의 승리로 일본의 점령에서 해방되었다. 그러자 인도차이나반도를 100년 동안 지배하다 일본에 쫓겨나갔던 프랑스는 일본의 철수 후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군사적 재점령을 시도했던 것이다. 호치민을 지도자로 하는 베트남 인민은 일단 손에 넣은 독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독립세력과 식민세력, 아시아 후진민족과 유럽 백인세력, 원시적 민병과 현대적 군대 사이의 8년간에 걸친 전쟁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의 결정적 패배로 끝났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또는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인민은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그 승리를 다지는 강화조약인 제네바 협정으로 국토와 인민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운을 감수해야 했다. 제네바 협정은 "북위 17도선을 임시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베트남 인민군과 프랑스 연합군은 각기 군사분계선의 북쪽과 남쪽으로 철수하여 집결한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은 결코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로 해석될 수 없다. 이 협정체결로부터 2년 후인 1956년 7월 남북베트남을 아우른 총선거를 실시하여 베트남을 통일되도록 한다"고 규정했던 것이다.
약속된 총선거에서 호치민의 승리가 확실한 것을 예상한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해서 남베트남의 실권을 장악하는 한편, 미국에 망명 중이던 응오딘지엠을 들여보내 총선 실시 거부를 선언케 하였다. 이 시점에서부터 제2차 베트남 전쟁 즉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거니와, 베트남 전쟁은 그러므로 단순한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다. 민족주의 대 제국주의, 독립투쟁 대 식민주의, 혁명 대 반혁명, 통일 대 분열, 독립 대 의존, 인권 대 반인권, 자유 대 억압, 황색인 대 백색인, 아시아 대 서양, 낙후 대 현대, 원시적 소총 대 초현대식 폭격기, 주판 대 전자 계산기, 사랑 대 증오 그리고 그밖에도 상상할 수 있는 20세기의 모든 갈등요소가 뒤범벅이 되어서 전개된 전쟁이었다. 그것이 "20세기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출처 : 리영희 베트남 전쟁 p.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