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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서적산책 1화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 평전>



유신독재의 서슬이 아직도 시퍼렇던 1976년. 한 청년이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3년 가까이 수배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노트에 글씨를 채워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한 뭉치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청년은 완성한 원고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그의 인생이 세상에 알려지는구나. 혹사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노력하다 죽어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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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의 초판. 1983년 6월 출판되었다. 이때는 당시의 사정으로 인하여 책 제목과 저자가 본래와는 다르게 적혀 있다.)




어두운 시대를 딛고 나온 책



1982년 말, 돌베개 출판사 편집부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청계피복노조 전(前) 간부 민종덕으로 그의 손에는 원고가 들려 있었다. 민종덕은 편집부에 원고를 출판해 달라고 부탁했다. 원고의 내용인즉슨 지난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자살한 전태일(全泰壹, 1948.8.26~1970.11.13)의 삶을 다룬 평전이라는 것이다.



편집부는 고민에 빠졌다. 비록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독재는 끝났지만, 다시 전두환의 독재가 시작되어 사회는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는 동안 박정희 사망 이후 활기를 띄던 사회 운동은 전부 된서리를 맞았다. 이미 <씨알의 소리>, <창작과 비평> 등의 잡지들이 폐간 처분을 당하고, 사북 광부들의 투쟁과 광주 시민들의 항쟁이 잔인하게 진압당하지 않았던가? 그런 시절이었기에 이런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판사의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저할 수도 없었다. 전태일의 삶을 다룬 그 원고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끝내 편집부는 이 원고를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983년 6월 이 원고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돌베개에서 출판되었다. 저자가 밝혀지지 않았기에 저자명 대신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으로 처리하였다. 300페이지의 책은 초록색 표지에 붉은 글씨의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제목 밑에는 전태일의 영정을 들고 울부짖는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었다.



출판되자마자 이 책은 한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부에서는 책의 출판과 유통을 막으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판매금지도 명령하고 출판기념회도 무산시키는 등 야단이었다. 기업에서는 공장 내에서 이 책을 가지고 다니거나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그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책은 노동자와 학생, 사회운동가 그리고 의식 있는 시민들에게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책을 통해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알았다. 그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죽었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책을 덮은 그들은 제2의 전태일이 되어 굳은 마음으로 투쟁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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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과 조영래. 공교롭게도 전태일과 조영래는 모두 대구 출신이다. 나이는 각각1948년생과 1947년생으로 조영래가 한 살 더 많다.)




조영래와 전태일



한국을 뒤흔든 저서인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민주화 이후인 1991년에야 개정판이 나왔다. 이때 비로소 책은 <전태일 평전>이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초판에 밝혀지지 않았던 저자의 이름도 밝혀졌다. 그의 이름은 조영래(趙英來, 1947.03.26~1990.12.12).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 등에서 이름을 날렸던 인권변호사였다. 하지만 정작 저자였던 그는 자신의 이름이 담긴 개정판이 나오기 얼마 전 지병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조영래는 본인이 살아있을 적에는 자신이 이 책을 썼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그리하여 그의 친우였던 재야운동가 장기표의 글을 통해서야 출판사도 조영래가 <전태일 평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면 그는 전태일과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조영래는 이전부터 민주화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대를 다닐 적에 한일회담 반대운동, 3선개헌 반대운동 등에 참여하며 사회의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던 때에 그는 대학 졸업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분신소식은 곧 조영래에게도 전해졌고 그는 이후 전태일 정신을 알리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 특히 전태일이 생전에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말했다는 “나도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라는 말은 그의 양심을 강타했다.



조영래는 이후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몇몇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와 수배생활을 전전하게 된다. 그사이 그의 동창이었던 장기표가 전태일의 수기를 어머니 이소선 여사로부터 받아 그에게 주었다. 이후 1974년부터 조영래는 이 수기를 바탕으로 가족과 동료들의 증언을 참고하여 ‘전태일 평전’ 원고 작업에 들어갔다. 3년 후인 1976년 마침내 원고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유신정권 시절에는 출판될 수가 없었고 1978년 일본에서 <불꽃이여 나를 감싸라>는 제목으로 먼저 출판되었다. 그리고 조영래가 변호사가 될 무렵인 1983년에야 평전은 비록 불완전한 모습이었지만 출판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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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장에서의 전태일)




전태일의 삶을 담다 Ⅰ - 어린 시절과 평화시장



이런 내력을 갖고 있기에 조영래는 전태일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22년의 짧은 생애가 조영래의 담담하고도 전율적인 필체로 펼쳐진다. 또한 삶과 더불어 소개되는 생전 글들을 통해 전태일이 어떤 생각을 하며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조명한다.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의 삶을 5부로 나누고 있다. 각 부분은 다음과 같다.



1부는 전태일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다. 전태일의 어린 시절은 한마디로 불우했다. 가정은 늘 경제적인 문제로 휘청거렸고 그로 인해 태일은 늘상 배고픔과 노동일에 시달려야 했다. 언젠가 대구 남산동에서 가족들과 함께 짧은 평화를 누렸을 때 그는 그 시절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시절이라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행복은 짧았고 좌절은 길었다. 그럼에도 태일은 자신의 수기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거나 혹은 거기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기를 선언한 것이다. 또한 이때의 불우한 어린 시절은 오히려 전태일에게 세상 속 약자들을 향한 연민의 시각을 형성하게 한 중요한 시기이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부는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되며 그곳의 참혹한 노동현실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다. 전태일이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지만 곧 그의 눈에는 비참한 환경에서 고통받는 어린 여공들이 비쳤다. 기업은 이들을 그저 쓰다 버리는 소모품으로만 여겼다. 전태일은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기도 하고 잠시 쉬게 하는 호의를 베풀기도 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기업주의 매몰찬 해고뿐이었다. 온정주의적인 방식은 한계가 너무나도 명백했던 것이다.



하루는 그날 역시 몸이 아픈 아이가 있어서 모두 먼저 내보내고 혼자 남아 작업장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업주에게 그만 들켜버렸다. (…) 업주는 불쾌한 낯빛으로 “재단사는 재단사가 할 일만 하지 왜 시다들의 일까지 참견하느냐? 자꾸 그러면 시다들의 버릇이 나빠진다. (…)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 주인 말 안 듣고 그렇게 제멋대로 하는 재단사하고는 나도 같이 일할 수 없으니 내일부터는 나올 필요 없네…….” 업주와 재단사 사이에 이런 따위 말다툼이 몇 번 오가고 나서 그는 간단하게 해고당해버렸다.



3부는 근로기준법을 발견한 이후 노동운동에 입문하지만 좌절을 맛보는 과정이다. 이무렵 삭막한 현실에 고민하던 전태일의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근로기준법’이었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이 노동할 때 있어서의 기준을 정한 법이었다. 전태일은 한자로 가득찬 이 법을 어렵사리 읽으면서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8시간 노동, 유급휴가, 생리휴가, 건강진단, 재해보상, 야간작업 금지 등등……. 법으로는 보장되어 있는 것들이 현실에서는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껏 ‘이렇게 좋은’ 규정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직장에서는 주인이 맘대로 하는 것인 줄만 알고 찍소리 한번 못하고 속아 살아온 자신이 정말 너무나도 바보였다.



이후 전태일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재단사 친구들을 모아 ‘바보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결과는 녹록치 않았다. 회사에서는 해고당했고, 노동청에서는 무시만 당했던 것이다. 결국 바보회의 활동은 1969년 겨울부터는 중단되고 만다. 하지만 아무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태일은 이때의 경험을 통해 점점 투사로서의 사상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무엇인가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여태껏 그는 노동자들이 기업주의 탐욕에 희생되고 있으며 그 기업주들과만 투쟁하면 되는 줄로 생각해왔었다. (…) 만약 노동청이 기업주들과 결탁하고 있는 것이라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태일은 가슴이 가위에 눌린 듯 답답해왔다. (…) 그리고 그는 거듭거듭 다시 박차고 일어났다. 인간과 사회의 현실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가 이 과정을 통하여 마치 봄비를 맞은 초목처럼 그의 머리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보다 뿌리 깊은 분노가, 보다 뜨거운 연민이 그의 가슴속 깊이에서 끓어올랐다. 거듭거듭 밀려오는 고뇌와 좌절과 자학의 늪을 빠져나올 때마다 그의 투지는 용광로를 거쳐나오는 쇠처럼 더욱 강인해져갔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모든 투쟁방법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재검토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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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영정을 안고 울부짖는 이소선 여사. 전태일의 마지막 부탁을 이루고자 그녀는 전태일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었다.)




전태일의 삶을 담다 Ⅱ - 그의 결단 그리고 투쟁과 죽음



4부는 전태일 본인의 사상의 흐름과 성장 그리고 결단이 나온다. 평화시장에서의 좌절 이후 전태일은 공사판에 나가 일하기까지 하였다. 그 기간을 거치면서 전태일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평화시장에서의 잔혹한 현실은 비단 평화시장에서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어디를 가든지 고통받는 민중들이 있었고, 그것은 그에게 슬픔과 연민 그리고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 당시 그가 적은 수기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貧)한 자는 부(富)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실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소녀들이 때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대통령 각하. (…) 저 착하디착하고 깨끗한 동심을 좀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서는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 못합니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 이것도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속히 신체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이나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고,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지키는 기업인 ‘모범업체’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이전의 온정주의적 방식만큼이나 한계가 뚜렷한 것이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부당한 현실에 직접 맞서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것.


이런 생각은 결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수기를 보면 그의 이러한 변화는 점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태일은 1969년 12월 31일 이렇게 썼다.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나는 결단코 투쟁하련다. 역사는 증명한다.” 또한 1969년 말과 1970년 초에 작성한 소설 초안들에서는 죽음으로써 투쟁하는 인간상을 그려내었다. 그리고 1970년 6월 9일의 수기에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5부는 투쟁에서 죽음에 이르는 최후의 나날들이다. 평화시장에 돌아오고 나서 전태일은 다시금 동지들을 모아 ‘삼동친목회(삼동회)’를 결성했다.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평화시장에서의 노동현실을 고발하고 바꾸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먼저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그렇게 126명의 노동자가 답변을 했고 이를 토대로 전태일은 진정서를 작성하여 노동청에 제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에도 관련 기사가 실렸다. 이에 전태일과 회원들은 기뻐했다.



(…) 신문 300부를 들고 그들은 다시 평화시장으로 달려갔다. 큰 모조지를 잘라서 그 위에다 붉은 글씨로 ‘평화시장 기사특보’라고 쓴 단장을 만들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다 두르고 시장 내 이 건물 저 건물을 쫓아다니며 신문을 돌렸다. (…) 그날 저녁의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군데군데에 노동자들이 몰려 서서 신문 한 장을 두고 서로 어깨 너머로 읽으면서 웅성거렸다. 평화시장의 오랜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신문기사가 나자 평화시장과 노동청에서는 황급히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을 불러 요구사항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요구기한은 넘겨지지 일쑤였고, 단체행동을 하겠다고 경고하면 그제서야 들어주겠다며 구슬렸지만 농간에 불과했다. 선거가 끝나고 나서는 아예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이 삼동회의 요구를 묵살하는 행태까지 보였다. 이에 전태일은 최후의 투쟁을 준비해야 했다.



11월 7일, 약속한 날짜가 되었건만 약속은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삼동회는 다시 모였다. 전태일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근로기준법 화형식(火刑式)’을 하자고 제의하며 모두 희생할 각오로 싸우자고 말하였다. 정해진 거사 일자는 11월 13일. (…) 이러한 계획들이 세워지고 나서 전태일은 다시 회원들을 향하여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고 힘주어 말했는데 (…)



그리고 마침내 1970년 11월 13일. 예정된 시위는 경찰과 경비대의 방해로 위기에 처했다. 플래카드는 찢어졌고 몇몇 회원들은 얻어맞고 끌려갔다. 전태일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던 모든 투쟁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사회의 무섭고도 참담한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여기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이미 그는 휘발유통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휘발유통을 뒤집어 쓴 그의 몸뚱이 위에 라이터 불길이 붙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그는 몇 마디의 구호를 짐승의 소리처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입으로 화염이 확확 들이찼던 것인지, 나중 말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소리로 변하였다. (…)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렇게 전태일은 목숨을 던졌다. 그는 병원에서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에게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동지들에게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말했다. 분신의 참혹한 고통으로 전태일은 그날 저녁 숨을 거뒀다. 그의 마지막 말은 “배가 고프다……”였다. 평전은 전태일이 유서 형식으로 써놓은 구절로 끝맺고 있다.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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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언어로 번역된 전태일 평전. 시계방향으로 영어판, 중국어판, 인도네시아어판, 몽골어판.)




전태일이 우리에게 외친다



<전태일 평전>은 비록 전태일의 죽음으로 끝나고 있지만 그의 생애는 죽음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죽고 나서 전태일은 다시 뜨겁게 살아오기 시작했다. 그를 알고 기억하고 계승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삼동회 회원들, 그리고 노동현실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당국의 탄압을 딛고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였다. 장기표를 비롯한 대학생들은 그들과 연대하였고, 전태일의 친구가 되길 자청한 조영래는 전태일의 삶을 다룬 <전태일 평전>을 썼다. 그리고 그 책을 읽은 사람들 역시 전태일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국의 노동운동은 전진해 왔다.



2007년 한국일보는 ‘우리의 시대의 명저’ 50권 안에 <전태일 평전>을 넣었다. 그 책이 한국현대사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인정한 것이다. 무엇보다 전태일을 지금도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은 그가 보여준 솔직함과 연민 그리고 무한한 사랑일 것이다. 장기표가 얘기했듯 그의 삶은 “가장 인간적인 사람의 가장 비범한 삶”이었다.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향한 그의 인간애와 희생정신은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태일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노동해방을 위해 오늘도 전진하는 민중의 투쟁 또한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태일의 정신은 이제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전태일은 더이상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만이 아닌 것이다. 이미 영어판, 중국어판, 일본어판, 몽골어판, 인도네시아판이 각각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중국 대학생들은 <전태일 평전>을 필독서로 읽고 있고 몽골과 인도네시아 등은 노동자들의 교육 교재로 <전태일 평전>을 쓰고 있다. 언어도 다르고 국가도 다르지만 ‘노동자’라는 계급만은 동일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태일은 오늘도 가고 있다. 그것을 예견하듯 책의 서(序)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전태일은 여러분에게로 간다. 이 결함투성이의 책자에, 전태일에 관한 약간의 진실이라도 담겨져 있다면, 당신이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사는 어떤 인종·계층·신조·사상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태일은 반드시 당신에게로 가서 당신의 심장을 두들기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소리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