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의 사건에 대한 국제노동자협회 사무국의 보고


1936719일 이후 안티 파시스트 스페인의 발흥


스페인이던 어디서건, 민주적 부르주아들은 파시즘을 몰아내는 데에 있어 무능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아사냐 정권은 성직자들과 군인들의 반란을 대비하는 데에 있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즘에 대비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했다. 한편, 1936719일에는 강력한 대중운동이 스페인 군부의 폭동을 막아내는 것을 성공했으며, 만약 반역자 장군들이 사라고사, 팔마, 세비야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면 그것은 공화국 당국의 실패로 인한 것이었다. 대부분 지역의 반군은 아사냐 정권에서 가장 가차 없이 박해됐던 혁명적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인해 격퇴됐다. 스페인 혁명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연합체는 바로 CNT이었다. 그들의 전술은 719일 카탈루냐에서의 승리를 가져왔다. 스페인 경제에 매우 중요한 지역들에서의 노동자들의 승리는 파시즘에 대항한 전쟁을 진지하게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었다.

거리에서의 승리 이후, 인민의 민병대 부대들은 반군에게 점령당했거나 위협을 받고 있는 다른 지역으로 전진했고, 후방에서는 경제생활에 대한 사회변혁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노동조합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사회변혁은 아래에서부터 시작됐으며, 이는 노동자들이 지역 경제조직의 방향을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국가에게 남은 기능은 이미 실현된 사실을 승인하는 것뿐이었다.


아나키스트들과 생디칼리스트들의 위치


그 순간의 가능성을 보고, CNT는 자신들의 목표인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를 즉각 실현하겠다고 선언했다. CNT는 신디케이트와 노동조합을 통해 대규모 중규모 산업시설들을 집산화하는 데에 착수했고, 구 국가체제를 노동조합 통제 하의 새로운 경제, 정치, 문화적 유기체로 교체함을 선언했다. 이 문제에 대한 CNT의 입장은 719일 이전에 확실히 정해져 있었지만, CNT만으로는 이 책무를 이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목표들이 이행될 수 있도록 아나키즘적 노동조합과 사회주의적 노동조합 (CNTUGT) 의 혁명적 동맹이 제안되었다. CNTUGT719일 이전에는 카탈루냐에서 주로 활동하는 노동조합이 아니었으며, 그 이후에는 온건한 프롤레타리아들과 하위중산층 전체의 피난처가 됐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위원회에서 자신들과 동등한 대표권을 부여했다.

마드리드 목전에서 전투가 격화되고 수도를 방어하는 것이 전쟁의 매우 중요한 점이 되었을 때 (사회주의자들과 부르주아들의 정부는 발렌시아로 떠남), CNT는 중앙정부를 대체하는 방위위원회를 형성할 것을 요구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CNT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파시즘에 맞선 인민의 단결을 원했으며, 그러한 연합을 결성하는 것이 자신들의 책무라고 여겼다. 인민의 연합이 파시즘에 맞서는 것을 더 촉진시기 위해 CNT는 스스로의 전술을 제쳐두고 중앙정부에 대표되기로 동의했다. 마드리드의 노동자들은 파시즘으로 향하는 길을 막기 위해 두 번째로 결집했으며, 마드리드는 구원됐다.

719일 이후, CNT는 희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최고의 무장조직들이 전선에서 죽어나갔으며, CNT는 자신들의 사회적 목적을 무조건 즉각 실현하라 주장하지도 않았다. 강력한 혁명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페인 대부분 지역에서 쉽게 행해질 수 있었던 그들의 독재체제 형성도 하지 않았다. CNTCNT를 적대조직으로 간주하며 그렇게 취급하던 다른 반파시스트 조직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전통적 원칙인 자유와 자유롭고 자발적인 협력에서 일관되게 영향을 받았다. CNT의 사심없음, 다른 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면과 일단 양보하려는 자세, 그들의 목표를 향한 압박감은 구체제의 직업 정치인들 (공화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에게 약하다는 표시로 비춰졌으며, 그들은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계획을 밀어붙이고, 노동자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직접적 영향력을 줄이고, 오래된 특권들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용했다. 그리고 노동자들, 특히 카탈루냐에서는 불만이 커져갔다. 그것이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힘과 이해하려는 의지를 보였던, 53일에서 6일까지 이어진 비극적인 일들의 근원이었다.


CNT가 만든 길


CNT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전체주의적 국가나 독재적 성향을 갖춘 인물의 몇몇 정당의 책무가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경제조직의 책무라고 여겼다. CNT719일 이후로 다른 반파시스트 집단에 대한 이해를 하는 정책을 펼치고 공통의 정책이 실행될 수 있도록 수많은 희생을 했던 것은, 이러한 방식이 자유지상주의적이고 반독재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방식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관용, UGT와의 화해는 건설적인 성향을 띠었고 긍정적 목표를 향해있었다.

사회주의적인 면에서 국가 경제의 재건을 위해 그렇게까지 열정을 가지고 행동하는 조직은 없다.” 라고 CNT의 발렌시아 지역 기관지인 Fragua Social에서는 썼다.

집산화의 움직임은 부르주아들이 그들의 경제적 힘을 잃은 순간부터 급격하게 추진되었다.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들은 공장, 사유지, 광산, 운송수단을 장악했다. 이는 노동자들 마음속 성숙한 이념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었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가지게 된 첫 기회에 행정과 국가경제의 방향타를 손에 넣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같은 상황에 놓였지만 스페인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전통이 결여된 또 다른 프롤레타리아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노동조합들에 존재하는 확고한 이념적 기반이 부족했을 것이기에, 그들이 추구해야 할 사회적 목표가 결여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다른 혁명들 (다른 나라들에서의) 때처럼 우리 일반적인 목표의 부재 때문이 아니다. 스페인 프롤레타리아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재건에 있어 초기 단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의 강력한 대중운동이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형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활동을 조직하고 조정해야 한다. 이 책무를 이행하면서 CNT는 한편으로는 산업의 국가적인 연방 현성을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와 군사적인 과제의 달성을 위해 UGT와의 동맹을 체결하는 것을 노력한다. 프롤레타리아는 경제생활을 탄탄하게 조직해야 한다. 고립된 기업들과 특정 지점에 노력을 한정지으려는 시도는 비판받아야 한다. 경제는 산업과 모든 산업들의 협동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CNTUGT 두 다른 노동조합 중 어느 쪽도 그 책무를 홀로 달성할 수 없음 또한 명심해야 한다. 두 단체는 서로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UGTCNT에 그들의 의지를 강요할 수 없으며,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내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가지 형태의 경제구조는 함께 공존할 수 없다.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두 세력들 가운데에서 상호이해를 통해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 하지만 이는 전 국가적 차원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산업들의 연방 창설과 CNT, UGT 간 동맹에 기여함으로서 이베리아 반도 경제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까지 시도된 모든 사회적 실험과 본질적으로 다르고 우리 사람들의 특별함이라 할 수 있다.”

CNTUGT의 협력은 기회주의의 결과가 아닌, 스페인 생디칼리스트들과 아나키스트들의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은 사회혁명을 이루겠다는 목표도, 그들의 자유지상주의적인 열망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CNT1936719일 이래로 계속해서 이 길을 밟아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행보에 장애물을 맞닥뜨렸다. 정치인들의 관료주의와 특권이라는 구체제의 수호자들은 자신들을 자유지상주의 혁명의 반대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반 혁명이 모습을 드러내다


스페인의 혁명적 노동자들에게 파시즘에 맞선 투쟁은 자본가 정권에 맞선 투쟁과 합쳐지기 시작했다.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의 논란 있는 원조, 러시아의 외교적 이득도 CNT의 그런 관점을 돌릴 수는 없었다.

전국의 하류, 중류 부르주아들과 아직 독립하지 못한 장인들, 개량적 조직을 따르는 프롤레타리아들, 그리고 특히나 공산주의자들은 과거의 경제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쳐나갔다. 부패한 부르주아 민주정이 파시즘에 맞서는 인민들의 이상으로서 소개되었다. 그리고 파시스트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공화국 당국의 처참한 실패가 일어난 뒤, 중요한 경제 기능을 통제하고 있던 CNTUGT 대표들이 참여하고 반파시스트 정당들의 대표들이 종종 참여했던 혁명위원회들은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모든 권력을 정부로!


좌익, 우익 공화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들고 나오던 슬로건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기나긴 전투와 전투들이 전쟁으로 변모해나가는 것을 이용하여 가장 현대적인 전투 수단과 적절한 군사조직을 만드는 것을 정당화했고, 그것을 노동자들의 혁명적 계획과 구상, 진취성을 막무가내로 제약하는 데에 사용했다. 집산화의 과정에서 남게 된 쁘띠 부르주아들에 대한 정의는 더 늘어났다. 농촌의 지주들은 노동자들의 집단농장에 맞서 들고 일어났다. 이러한 다툼들의 예시 중 하나는 발렌시아 정부의 공산주의자 농업부 장관과, CNTUGT에 의해 발렌시아 지역의 오렌지 플랜테이션에 형성된 농장 노동자들의 집단농장 간 충돌이었다. 비슷한 사례로 바르셀로나의 CNT조합에 맞서 공급부 장관, 카탈루냐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요구하던 사회화에 반대하고 식료품에 한정된 분배의 사회화를 격렬히 반대하던 제 3 인터내셔널의 추종자들 간 분쟁도 일어났다.


테러 캠페인


이러한 상황은 CNT에 반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진행됐던 테러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중부 (Center) 지역에서는 지난 몇 달간 80명의 아나키스트 동지들이 비겁하게 살해당했다. 마드리드 방위 군정 (이후 폐지됨) 의 공공질서 위원회는 CNT가 다른 곳 보다 강력하지 않은 중부 (Center) 지역에서 가차 없이 CNT에 대한 탄압을 가행했다. 알메리아에서는 민병대 지휘관이었던 아나키스트, 마레토가 투옥된 뒤 수치스럽게 모욕당했다. 그는 53일에서야 겨우 석방되었다. 무르시아에서는 비밀리에 설립된 공산주의자들의 체카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이미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던 여러 반파시즘적 주민들을 해치웠다. 스페인 대중에게 실질적 영향을 행사한 적이 없고, 스페인인들의 사고방식과는 정반대되는 중앙집권적 이념을 가진 제 3 인터내셔널의 지배욕은 사회주의적 노동조합인 UGT에서 침투의 기회를 찾았다. 발렌시아에 의석을 가지고 있는 UGT 집행위원회는 UGT가 카탈로니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문제삼았다. UGT 내에서의 총선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마드리드에서와 같이 아스투리아스에서도 패배했다.

낡은 부르주아 민주정의 수호자들, 즉 자본주의 질서를 선전하는 이들과 CNT를 지지하는 사람들 간의 충돌은 특히 카탈로니아에서 점점 더 폭력적인 양상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