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니아에서의 분쟁 : 피레네 방면에서


이미 3주 동안 계속됐던 지난 카탈로니아에서의 정부의 위기상황 동안 이미 언급된 반대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CNT는 스스로 반대세력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반파시즘 세력의 단결을 위하여 혁명적 노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몇 가지를 희생시켰다. CNT 조합원들은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서 그들 스스로가 잘 규율되었고 조직되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도발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태들이 일어났다.

피레네 방면은 노동자 민병대들로 인해 잘 방어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갑자기 노동자 민병대들을 대체하는 병력들로서 수천 명의 병력을 보낸 것이다. 이 병력들 (카라비네로스) 은 몇 달 동안 중앙정부를 통해 신중히 선별되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거의 두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지지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카탈로니아에 도달한 것은 엄청난 충격을 자아냈고, 그들의 전선 배치는 도발행위로 간주되었다. 폭력적인 충돌들이 국경에서 나타났다. CNTFAI가 외국인 방문자들조차도 감탄할 정도의 사회, 문화적 성과를 거둔 작고 순수한 아나키스트들의 마을인 푸이그세르다가 새로운 갈등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탈로니아 아나키스트 운동의 대표격 인사 중 하나인 푸이그세르다 인민위원회 위원장 마르틴이 중앙정부의 편에 선 카탈로니아 분리주의자들의 총탄에 쓰러진 것이다.

 

롤란 코르타다의 죽음

 

그와 동시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UGT의 유명한 전투적 활동가였던 롤란 코르타다가 오늘날까지 이어진 모든 수색에도 불구하고 알아내지 못한 누군가들에게 살해당했다. CNT 지역위원회는 성명서를 통해 이와 같은 살인 행위를 비판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 근교의 몰린스에서 9명의 CNT 조합원이 이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됐다. 그들에게서 그 어떤 유죄의 증거도 찾아내지 못하자, 그들은 풀려나게 되었다. 그 뒤로 CNT에 대한 비방이 시작되었다. CNT가 우세했던 농업 중심지에서는 방어를 위한 준비가 시작됐고, 무장된 노동자들에 의해 치안이 유지됐다. 부분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낡은 경찰들이 활동했던 곳에서, 특히 바르셀로나 중심부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레네 지역에 평온은 다시 돌아왔으며, 바르셀로나의 농업 중심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 카탈로니아와 프랑스 국경지대에 배치될 병력을 719일 이전 수준으로 줄이는 것으로 중앙정부와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임의적으로 체포됐던 CNT 조합원들은 석방되었다. 그렇게 잠재적인 갈등은 해결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53~6일 동안 충돌을 일으켰던 도발행위가 나타났다.

최근 카탈로니아 정부의 장관 구성에서 공공질서와 내부방위에 대한 통제는 좌익 부르주아 정당의 정치인인 아이구아데의 손에 맡겨졌다. 공공질서위원회의 위원장은 공산주의자인 로드리게스 살라스였다. 두 사람 모두 1931년에서 1934년까지 CNT 조합원들을 체포하고 최대한의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던 정치인이었다. 소인배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카탈로니아 분리주의자들은 혁명적 노동자들의 투쟁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이라 보았다. 그리고 좌파 부르주아들과 제 3 인터내셔널에 소속되어 있던 카탈로니아 통합사회당 (P.S.U.C) 간의 핵심 원칙 차이는 거의 없었다. 둘 모두 1931년에서 1934년까지 같은 사회적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공화정의 반혁명적 전통을 추구했다. 스페인 치안 안전을 책임지는 조직들에 소속되어 있던 그들의 대표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그 힘을 활용했다.

바르셀로나 전화교환국은 CNTUGT, 그리고 카탈로니아 정부의 일부 대표단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53, 아이구아데는 로드리게스 살라스가 지휘하는 강력한 경찰들을 보내어 전화교환국을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경찰들이 건물 위층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격렬한 전투가 있었고, 건물 앞에서는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으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해당 구역의 CNT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동원됐다. “혁명 방위를 위해 거리로!” 와 같은 말들이 그들의 구호였다. 그 즉시 CNT 지역위원회와 정부 사이의 협상장이 조성되었고, 밤중에 서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이구아데와 로드리게스 살라스가 촉발시킨 도발적 행위로 인해 3일 동안 지속된 유혈사태는 카탈로니아 반파시스트 진영의 단결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처음부터 CNT의 태도는 순전히 방어적이었는데, 이는 19367월 이래로 반파시스트 전선을 만들어내고 그 스스로의 큰 희생을 대가로 유지했던 것이 CNT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CNT는 스페인이 가장 위급한 상황 속에서 프랑코, 히틀러, 무솔리니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스페인 아나키즘 운동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들의 목표와 이상을 보류하기까지 했다.

 

노동자들과 CNT

 

53일의 사건들은 카탈로니아의 아나르코-생디칼리슴 운동이 무엇인지 다시금 보여주었다. 719일과 마찬가지로, 수 시간 안에 모든 노동자들이 총동원되었다. 이는 거리에서의 진정한 민중의 의사표명이었다. 도시의 모든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노동하는 곳은 CNT의 요새로 전환되었다. 병영, 경찰서, 공화주의 혹은 공산주의 민병대가 있는 곳의 노동자들은 CNT에 지지를 표명하거나 (산스와 산 게르바시오의 경우처럼), 사리아의 공산주의자들의 병영과 같이 중립을 표명했다.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은 CNT와 함께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낡은 경찰들과 부르주아들, 공화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들의 구역과 도심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는 정확히 그들 정당들의 지지자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대개 노동자들에 맞서지 않았다. 경찰들 대부분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으며, 대중이 흥분하거나 특정 사건들로 인해 도발행위가 벌어져 유혈사태로 번졌을 때만 극소수의 경찰이 CNT 조합원들과의 싸움에 끌려들어갔다.

총파업은 그 즉시 일어났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산업만이 계속 운영되었다. 경찰과 공산주의자들은 몇몇 노동조합 건물을 공격했고, 혁명적 노동자들도 공격받았으며, 노동자들은 경찰 건물, 여러 정당들의 당사들, 개량주의 성향 노동조합의 건물에서 총격을 받았다. CNT 지역위원회 본부는 이 일이 일어나는 며칠 동안 적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이러한 일들이 있음으로서 CNT는 또 다시 귀중한 동지들을 잃었다.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 베르네리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집에서 체포됐고, 그 다음날 포로가 되어 총살당했다. 1936720, 파시스트들의 총탄에 사망한 프란시스코의 동생 아스카소는 도시 중심부에서 살해당했다. 프란시스코 페레르의 조카는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가던 중 길거리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전선에서 부상당하여 지팡이를 짚고 가던 중이었다.

55일에는 위원회가 발렌시아로부터 도착했는데, 이 위원회는 UGT 집행위원회 위원 두 명과 CNT 전국위원회 위원 두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록 이 위원회가 카탈로니아의 다양한 반파시스트 세력과 즉각적으로 교섭하기 시작했지만, 사태를 즉각 진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56CNTUGT가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내건 뒤에는 경찰과 공산주의자들이 CNT 가죽세공노동조합 본부를 타격했으며, 그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것을 파괴했다. 다른 CNT 노동조합 청사들도, 특히나 상수도망이나 유통망을 담당하는 조합의 청사들은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 도시 중심부에서는 다른 반파시스트 조직과 마찬가지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다 허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CNTFAI의 조직원들이 체포당하고 무장해제 되어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도심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경찰 권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맞섰다. 산스에서는 격렬한 전투 끝에 헌병대 병영들이 점령되었으며, 400명의 경찰병력이 CNT 조합원들에 의해 죄수로서 연행되었다. 병영들에서는 파시스트들과 군주주의자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은 인도적으로 대우받았고, 평화가 되돌아온 뒤에는 자유를 되찾게 되었는데 이는 CNT가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정규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다시 되돌아온 평온

 

55일 저녁, CNT 대표 1, UGT 대표 1, 좌파 부르주아 정당들 중 하나와 작은 농민정당들 중 하나로 구성된 새로운 카탈로니아 정부가 결성되었다. CNTFAI가 내린 명령으로 인해 전투가 중지되고 바리케이드가 해체되자, 발렌시아의 중앙정부는 5000명의 돌격 경비대를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던 카탈로니아 경찰을 대체하기 위해 파견했다.

카탈로니아 자치에 관련된 헌법 조항은 영구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시, 중앙정부가 임시적으로 카탈로니아의 공공질서를 통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이구아데 장관과 로드리게스 살라스 경찰청장은 해임됐다. 이로서 공공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CNTFAI를 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혁명적 노동자들의 악명 높은 적 두 명은 사라졌다. 경찰력과 반파시스트 순찰대를 통솔하고 발렌시아 중앙정부에 의해 새로 임명된 공공질서를 담당하는 부처의 수장들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그들의 공직 의무를 다할 것임을 보장했다.

우리는 스페인 공산당과 부르주아 정당들이 편향된 시각으로 스페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이 일들을 퍼뜨리는 것에 대해 동지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그들이 퍼뜨리는 유언비어에 의하면, “정부에 반대하는봉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확신에 가득찬 유언비어는 CNT가 중앙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카탈로니아 정부에까지 대표단을 파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CNT는 그 자체가 정부의 한 부분이었기에 정부에 맞서 봉기하지도 않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CNT의 협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재건해야만 했다. 그 시위와 투쟁은 혁명적 노동자들에 대한 도발행위를 실시하기 위해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당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더욱이, 이번 사건은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무책임한선동가들의 짓이 결코 아니었다. 우리의 적들은 CNT의 무장한 전투원뿐만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조차도 무책임하다고 성급하게 결론짓고 있다. 53일 오후, 누구든지 이 사태를 목격하고 주목하며, 지난 70년간 스페인 아나키즘 운동에 비방을 가하듯 거짓말을 일부러 하고 있지 않다면, 이번 사태가 자발적인 민중의 움직임이자 우발적으로 일어난 봉기이며, 인민의 격렬한 항의표시였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정 노동조합에 트로츠키주의자나 파시스트 선동가들이 잠입해있다면서 떠들어대는 자들은, 정작 그들의 확언을 근거하는 그 어떤 사소한 증거도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로부터 찾아낼 수 없었다.

 

전투가 일어난 날들의 문건들

 

충돌이 시작되던 때에, CNTFAI의 위원회는 카탈로니아의 상황을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주민들에게 발표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카탈로니아에 좋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면서 여러 반파시스트 전선의 동지들과의 신뢰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다. 다른 문제를 제쳐두고서, 전쟁과 혁명에 문제에 있어 카탈로니아 내무부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에 대해 모두에게 알리고자 한다. 혁명이 일어나는 초반에 중앙정부는 법령을 통해 경찰 조직 내에 경찰 세력 안에 있는 파시즘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위원회를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지금 내무부 장관을 맡고 있는 아이구아데가 취임했을 때, 그는 이런 위원회들의 법적인 지위에도 불구하고 위원회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경찰에서 파시스트적 요소가 일관되게 배제되고 있을 때, 카탈로니아에서는 장관과 몇몇 경찰서장, 경찰관들이 협력하여 이러한 모든 조치에 반대했기 때문에 파시스트들이 그들의 직무에 남아있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런 훌륭한 보호조치 덕분에 62명의 헌병대가 제로나 경찰서에서 국경까지 쉽게 도망치는 것을 허용했다. 바르셀로나 경찰서에서는 31명의 경찰관들이 중요한 서류들, 특히 해안 요새화에 대한 서류들을 빼돌려 달아났다. 그런데 이들이 달아나기 몇 달 전, 이들이 이미 파시스트라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마드리드에 소재한 헌병대 중앙사령부는 아우시아스 지역 병영에서 신병 40명이 탈출을 시도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 사령부는 카탈로니아 헌병대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복무 중에 있는 반동주의 찬동가들과 반동들의 명단을 요구했다. 이러한 자들이 중앙정부의 훈령에 의해 배제되어야 한다고 명령이 내려온 것은 413일이었다. 그러나 카탈로니아의 내무부 장관은 중앙정부가 내린 예편명령을 막았고, 파시스트들이 직위에 남을 수 있도록 용인했다. 동시에 그는 파시스트들을 색출하는 모든 위원회들에 대한 반대 입장을 굳혔다. 한편, 그는 특정 정당들의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아, 국가의 억압과 정권의 착취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노동자들을 보호할 최고의 보장책인 CNTFAI의 모든 조직원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그 혁명적 힘을 부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했다.

선언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반파시스트 전선의 자신감 회복을 위하여! 파시즘에 대한 승리를 위하여! 체제적 탄압자인 아이구아데와 로드리게즈에 맞서자! 모든 고위 경찰들에게 죽음을! 사회혁명 만세!“

이 선언문은 CNTFAI의 지역위원회, 자유지상주의자 청년단, CNTFAI의 바르셀로나 지역위원회가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