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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야 사람들은 흔히들 자기는 불행의 표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애. 그러지만 실지론 불행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 같애?"

"오빤?"

둘은 집 뒤 낮은 동상에서 뒤뜰 꽃밭을 바라보고 앉은 모양이 싱그럽다.

"내가 먼저 물었으니까 희야가 대답을 할 차례야."

바람이 제법 기운을 낸다. 아주까리 약한 허리를 꺾을려고 덤빈다. 키다리 해바라기는 머리가 무거워 큰 키를 굽혀 사정을 한다. 제발 화를 풀으시고 잠잠 하시라고.

난쟁이 맨드라미는 해바라기 하는 꼴이 우스워서 못 참겠는 표정이다. 웃지 않으려고 얼굴빛이 노오랗다. 해바라기 옆에 선 코스모스는 허리가 휠까봐 그 날씬한 허리를 심술꾸러기 가시철망에다 기댄다. 철망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냘픈 허리를 정말 휘어지게 끌어 안는다. 질색을 하는 코스모스. 해바라기는 목이 아파 못 견디겠는지 노오란 눈물을 한 방울 두 잎 날린다.

"정말 불행한 사람은 난 수도원의 수녀라고 생각해요. 오빤?"

"왜 수녀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이상한데, 정희의 생각은."

"수녀들은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고 또 평생 혼자 살아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불행하지 뭐예요. 남들처럼 고운 옷도 못 입어보고 여행도 못하고, 또."

"또 뭐지?"

"아니 뭐 말하면 못할 줄 알고. 오빠같은 사람하고 데이트도 못하고 얼마나 불행하우."

"하하. 이거 당했는데. 그만, 그만. 하하."

"그럼 오빤 어떻게 생각해요? 이번엔 오빠가 하실 차례예요."

"정희의 그 태도가 행복한 것이다. 이 순간만은."

"오빤 딴 말이유. 누가 행복을 말했나, 불행을 말했지. 이젠 건망증까지. 아유, 속상해." 하면서 정희는 준오의 가슴팍을 꼬집을 기세다. 눈은 장난기가 넘치는 짙은 호수.

"아 그래든가, 하하. 그럼 내가 이야기하지. 아주 뿔이 보이는구나. 개미라면 더듬이 같이 빨갛게 열을 내겠는데, 하하."

"정말 놀리시기예요. 요번엔 용서 없어요."

상아로 조각을 한 것 같은 조그마한 주먹이 준오의 믿음직한 가슴을 향해 돌진한다. 눈을 감고 힘껏 때린 주먹. 뚝.

"아이구 가슴이야."

준오는 가슴을 움켜잡고 뒹군다. 황금빛으로 퇴색하는 누런 잔디 위를 얼굴을 찡그리고 곧 죽은 시늉이다. 곧 잠잠해지는 준오. 거짓인 줄 알면서 어떻게 명연기인지 겁을 내는 정희. 개구리가 가시를 먹고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다.

"오빠."

정희는 준오를 흔들어 일응키려고 한다. 그러나 꼼짝을 않는 준오.

"아, 나는 지금 기절을 했어. 기절을 한 사람은 물을 먹어야 빨리 깨어나는 거야. 빨리."

그 말과 동시에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면서 바로 얼굴 위에 정희의 얼굴을 쳐다본다.

아...... 너는 너무나 순진했어. 너무 성스럽고 티없는 너를 내가, 이 무기력한 인간 준오가 가시밭길 험한 풍랑과 마주쳐야 할 내가 너를 동반자로 만들려 그려는구나. 사랑이라는 차가운 수갑으로 너와 나를 채울려고 하는구나. 그럴 순 없다. 아...... 속으로 자학을 하는 준오. 쳐다보고 내려다 보기를 이삼 분, 그렇게 명랑하던 정희도 준오의 강하면서도 우수가 스쳐가는 검은 눈 속에 흡수되어 굳어버렸다. 정희의 입술의 미각을 음미하려던 준오는 벌떡 일어섰다.

'아 내가 기어이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했구나. 언제나 타산이 없는 이해는 성립이 안 되는구나. 떠나자 떠나. 결코 남겨놓을 수 없는 짐이다. 정희 용서해. 난 언젠가는 정희를 또 한번 찾아오마. 아...... 정희야."

말없이 일어선 정희는 정신없는 사람처럼 방앗간 비탈길을 방향을 무각한 채 앞을 향해 뛰는 것이다. 마침 큰 길가에 서울행 시외버스는 뽀얀 연막을 뽑으며 막 떠나려고 앞 차장이 문을 닫으려고 하는 찰나, 준오는 잽싸게 버스를 총알처럼 승강구에 박혔다. 온 전신엔 땀이 줄줄 내린다. 까만색 가다마이(양복)엔 잔디의 짜뜨려기(찌꺼기)가 매달려 있다.

"오랏이."

차장의 발차 신호. 그제서야 방앗간 다리 위로 정희의 뛰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준오씨를 제창하면서.




정희. 얼마나 이 준오를 많이 원망하였소. 언제나 그랬듯이 정희는 나의 소중한 동생이야. 그 이상의 자격을 줄 수 없어. 역시 자격부족일 거야. 그리고 너무 거리가 멀면 미성이야. 아무리 가까운 거리에 있어도 손에 잡아보지 못할 신성한, 그리고 손때가 묻으면 안 될, 아니 묻히면 안 될 거룩한 보배였다. 값을 잴 수 없는 보배. 그렇지만 정희 너는 내가 아는 보배. 어떤 무엇이든지 값이 붙은 것은 아무리 거액이라도, 귀중한 것이라도 가치를 상실한 거야. 값이 붙은 그 순간부터. 정희는 값을 붙이지 못하는 무형의 실재야. 내가 값을 어쩌구 운운하는 것부터 죄송하다. 그날 내가 정희 집에서 뛰지 않을 수 없었던 나를 너같이 이해해 줄 것으로 알며 끝내 준오를, 이 인간 준오를 정희 너의 마음에서 밀어내지 말아줘. 최초의 부탁이면서 최후의 부탁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너의 보름달처럼 환한 그 우울한 낮을 내던 정희. 우수를 깐 짙은 호수는 방울방울 수정을 떨군다. 석간신문은 무릎 위에 편 채로.



동아일보 X년 X월 X일

법학도, 법 자체의 모순을 시정하지 못하자 법이 시정되기를 기도 자살.

서울특별시 관수동 25의 5호에 세들어 자취를 하던 법대생 김준오군. 오늘 아침 새벽 2시 50분쯤 방에서 신음하던 것을 주인집에서 발견, 곧 성묘병원에 급송되었으나 워낙 다량 복용으로 아침 4시 50분에 숨졌다. 유족은 아무도 없었으며 책상엔 소녀의 초상화가 있었을 뿐이다. 김준오군은 전쟁고아이면서도 학우들은 그가 고아인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언제나 명량한 성격에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구차한 형편을 몰랐다고 한다. 구멍이라는 것은 보도통제로 기사화하지 못한 것이 못내 유감스럽다. 이중 성묘병원장의 말은 원래 심장병이 있는 증세가 보인단 말씀이시다.







이 글은 전태일 열사가

1969년 11월에 쓴 것으로

자신의 고뇌와 번민을 주제로

썼던 여러 개의 소설초안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