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8월에 중국 해군일보와 인민일보에 앞서 봤던 이연록의 회고 기사가 처음 실리고,
이어서 9월3일자 아카하타에 그 회고 기사와 내용이 실립니다.
왜 이다 스케오는 30여년간 기억되지 못하다가
왜 1965년에 되살아났는가?
-이연록 외 중국 만주 공산당 간부들이 그동안 이걸 발언을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사상자가 많았다 해도 이연록 웨이쩡민 우핑 주보중 등 유명 간부들은 모두 살아서 중국 건국을 맞이했고 그 이후에도 특별히 숙청된 적이 없었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문혁 때부터는 이들이 확실히 숙청당함) 아무리 건국기 혼란기 동안에 과거를 회상하기 어려운 조건이라 하더라도 1955년부터 10년간 그렇게 중요한 핵심적 에피소드-항일무장투쟁과 국제연대라는 핵심적 가치를 이렇게 잘 상징하는 에피소드가 이거말고 있겠는가?-를 발언하지 않고 아껴두고 있었다는건 큰 의문이다.
-중국에서 우연히 기억해내서 실은걸 중국 신문 체크하던 일공이 우연히 발견하고 와 좋다! 하고 소개한 것인가?
-아니면 1960년대 내내 친중과 친소 그룹 간의 당내 분쟁을 격렬히 겪던, 그리고 중국공산당과 매우 끈끈한 관계를 실제로 갖고있었던 일본공산당에서 친중 그룹이, 큰 건수는 아니더라도 그러한 어떤 중국과 일본의 연대를 상징하는 일화를 제공해주기를 원한다고 의사를 전달하여 중국 측에서 하나 만들어준것인가?
-일본 패잔병들이 중국 팔로군 공산당들과 접촉하여 세뇌로까지 폄하될 정도로 사상교육을 많이 받고 영향을 받았고, 일본 공산당 친중 그룹들은 중국에 잠시 망명하기도 하고 중국의 지도를 따르기도 하는등 패전 이후부터 매우 긴밀한 상호접촉이 이루어졌는데 왜 그동안에는 이다 스케오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일본 패잔병 사상교육에서 이다 스케오를 이야기했으면 얼마나 대박이었겠는데!!! 그런일은 없었다.
사실 제일 궁극의 미스테리는 사실은 , 1965년 전에 1961년에 사 상 최 초 로 아카하타에 이다 스케오 이야기가 실렸다는 것이다. 내용은 대략 비슷하다. 머리가 아파온다. 1965년설이 아니라 1961년이 최초라니 이것은 소스가 어디이며 이 이야기는 이연록이 쓴것인지 그러면 이연록은 대체 왜 61년에 중국 발표를 안하고 일본에 먼저 실은 것인지 그리고 왜 65년판 아카하타는 61년판 아카하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고있지 않은것인지
??? : 어찌보면 만화같은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