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그 뭐시기 이다 어쩌고 이야기 시간입니다
태백산맥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의 챕터가 있습니다.
등장인물 이학송은 좌익신문 기자로서 6.25전쟁중 미군의 폭격에 죽은 모녀의 시체를 보고 이것을 그냥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드라이하게 사실 위주로 서술해야할지 죽어가는 과정을 소설처럼 써서 미군의 폭격의 악랄함과 민중의 희생을 극적으로 형상화해야할지, 사실과 이념 사이에 갈등합니다.
죽은자는 말이없습니다. 그 죽은자의 말없음을 존중할 것인지, 아니면 목격자이자 운동가인 자신이 그것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적으로 창조해내야 할지 그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속류적으로 지칭되었기에 쓰는 말.
유사한 긴장이 이다 스케오의 이야기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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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1933년 3월 30일에 이다 스케오 사건이 있었다고 하는 이연록의 1965년 서사가 진실이라면, 이연록의 서사의 세부내용과 달리, 그 사건을 촉발하고, 이다 스케오의 뜻을 편지든 뭐든 어떤 방식으로든 알아차렸을 사람은 리광도 이연록도 아니고 동장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장영童長榮은 양징위 주보중 등과 함께 1930년초에 동북지방으로 파견되었던 중국공산당 고위간부로서 활동하다가 1934년 일찍 전사했으나, 역시 김일성 등의 회고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하고 길림성 항일열사유적에서도 높이 기려지는 등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1925년부터 28년까지 동경제대 일본유학 경험이 있던 중국공산당 길동국 서기 동장영이 ‘일본군이 통과하는 각지의 나무와 전신주에 삐라, 슬로건 등을 붙이는 등’ 일본군 대상 선전을 실시했으며 이것이 이다 스케오 사건을 야기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기 때문입니다.(孫金科,『日本人民的反戦闘争』,北京出版社,1996年2月 , 15-17쪽, ) (日中戦争期における 中国共産党の対日プロパガンダ戦術・戦略 ――日本兵捕虜対応に見る「2分法」の意味――에서 재인용)
그리고 이 동장영이 사건의 상세한 개요를 딱히 크게 공표를 못하고 혼자 들고있다가(일본군의 전면토벌 국면입니다 이때는) 1년뒤인 1934년에 급작스럽게 전사했다면, 1935년 코민테른 왕밍보고에 상세내용이 누락되어있고 전후에도 오랫동안 묻혀있었던 사실도 끼워맞쳐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깁니다. 이연록은 국민당 이탈파인 구국군의 지휘관이고 군인 출신이라 국제연대나 일본인의 일화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다른 만주지역 고위간부들은 직접 상세내용을 본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연록 서사에서는 "선전물을 골짜기마다 뿌려서 내가 보고 왔다"고 하는 표현과 ‘일본군이 통과하는 각지의 나무와 전신주에 삐라, 슬로건 등을 붙이는 등’ 이라는 동장영의 선전활동에 대한 기록과 모순되는 점이 존재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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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왔습니다. 이다 스케오 사건이 실재인가, 날조인가, 흔적밖에 없었던 것인가, 또는 진실인가 거짓인가 자체가 무의미한가 결론들 모두 각각 자신들의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확실한 정설이 없고 각자만의 정합성 있는 내러티브가 있다는 거네 - dc App
깔끔하게 안 떨어지는거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