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1장 4절에 나와 있는 물신숭배(Fetishism) 섹션은 굉장히 흥미롭다.

구체적으로는 독자의 전공에 따라 반응이 다소 나뉘는데, 경제학 전공자나 현장활동가들의 경우 물신숭배를 다소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반면 언론정보/사회/심리학 전공이라든지 또 물리학이나 자연과학 전공자들의 경우 굉장히 흥미롭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는 아마도 전공/활동분야에 따라 어필하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읽기 어렵다는 평이 다른 섹션에 비해 많은 편인데, 혹시나 이 글이 이해에 도움이 될까 해서 쓴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이 물신숭배 섹션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상품 특유의 수수께끼 같고 신비한 성격은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비롯된다.

2.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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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1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면, 맑스는 이런 말을 한다.

"A commodity is therefore a mysterious thing, simply because in it the social character of men’s labour appears to them as an objective character stamped upon the product of that labour"

상품이란 신비롭다고 한다. 왜 신비롭느냐?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상품에 찍힌 "객관적 성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물신성의 정의).


다른 문장을 살펴보자.

"This I call the Fetishism which attaches itself to the products of labour, so soon as they are produced as commodities, and which is therefore inseparable from the production of commodities”

상품으로 생산되자마자 물신성이 발생하며 이것은 상품생산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한다.

이것은 물신성이 인식의 문제를 넘어선 문제이며 본질적으로 상품생산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 보자.

"In other words, the labour of the individual asserts itself as a part of the labour of society, only by means of the relations which the act of exchange establishes directly between the products, and indirectly, through them, between the producers. To the latter, therefore, the relations connecting the labour of one individual with that of the rest appear, not as direct social relations between individuals at work, but as what they really are, material relations between persons and social relations between things. It is only by being exchanged that the products of labour acquire, as values, one uniform social status, distinct from their varied forms of existence as objects of utility."

한국어로 번역하기 상당히 난해한 문장이다. 자본론의 문장들은 번역하게 되면 문장이 괴이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해당 문단에서의 포인트를 요약해 본다면,

1.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들은 개인 대 개인으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2.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들은 시장에 존재하는 상품들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개만 이해하면 맑스의 문장을 충분히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너무 난해하다. 무슨 의미인지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오늘 저녁 돼지고기를 먹으려고 마트에 가서 항정살을 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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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 보는 거다. 이 항정살은 어디서 왔을까? 또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식탁에 올라오게 된 걸까?

그런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란 항정살이 굉장히 멀리서(최소한 집 근처는 아니다) 왔다는 것이고, 유통과정이 굉장히 복잡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어떤 축산업자가 이 돼지를 키웠는지도 모르고, 그 축산업자를 개인적으로 본 적도 없다.

오직 내가 알 수 있는 건 나는 이 항정살을 샀고 오늘 저녁에 이걸 먹을 거라는 사실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나와 이 돼지를 키운 축산업자는 돼지고기와 돈이라는 두 가지 요인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혀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즉 핵심적인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인간들을 아주 복잡한 방식으로 매개하고 이어 준다.

* 이것은 시장경제에서 특히 화폐상품들이 실제 자본주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아주 효율적으로 은폐시키는 유용한 방식이다.


이렇게 사회적 관계가 거래되는 물건들 간의 관계로 꾸며지는(mystified) 현상을 물화(reification)라고 한다.


맑스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지점이 이거다.

"맞아 니네들도 보다시피 상품은 물건이야. 물건은 존재하지. 그런데, 그 이면에 뭐가 존재하는지 알 길이 없다니까?"

즉 맑스는 화폐와 상품이 현실을 복잡하게 감추고(은폐하고) 있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텍스트를 한번 읽어보자.

"Hence, when we bring the products of our labour into relation with each other as values, it is not because we see in these articles the material receptacles of homogeneous human labour. Quite the contrary: whenever, by an exchange, we equate as values our different products, by that very act, we also equate, as human labour, the different kinds of labour expended upon them. We are not aware of this, nevertheless we do it. Value, therefore, does not stalk about with a label describing what it is. It is value, rather, that converts every product into a social hieroglyphic. Later on, we try to decipher the hieroglyphic, to get behind the secret of our own social products; for to stamp an object of utility as a value, is just as much a social product as language. The recent scientific discovery, that the products of labour, so far as they are values, are but material expressions of the human labour spent in their production, marks, indeed, an epoch in the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the human race, but, by no means, dissipates the mist through which the social character of labour appears to us to be an objective character of the products themselves."

중간에 굵은 글씨로 칠해놓은 scientific discovery=과학인데 실질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적 정치경제학을 가리킨다.

즉 고전적 정치경제학의 발견들(애덤스미스, 존로크, 홉스 등등..)에도 불구하고 물신성이 없어지지는 못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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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2로 넘어가 보자.

우선 비판이론(Critical theory)에 대해 인지할 필요가 있다.

보통 비판이론이라 함은,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표면을 넘어 이면을 들여다보는" 이론을 지칭한다.

맑스뿐 아니라 구조주의자들, 또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예시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맑스의 자본론에서 페티시즘 섹션은 즉 전형적인 비판이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단순히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에만 천착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자면 "Surface appearances are not simply illusions" 이런 말도 했었다,

단순히 표면적 모습을 환상으로 치부하고, discard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이 정신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봐, 표면이 진실을 감추고 있잖아!"라고 말하는 걸 생각해 보자.

정신분석학자들이 우리가 일상세계를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다 거짓이고 허구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심리가 표면상으로 드러내지 못한 몇몇 reality들이 있다는 뜻이고, 맑스도 역시 그 점을 짚고 있는 것이다.

즉 맑스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진실들을 포착하는 데 관심이 있다.


"Consequently it was the analysis of the prices of commodities that alone led to the determination of the magnitude of value, and it was the common expression of all commodities in money that alone l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ir characters as values. It is, however, just this ultimate money form of the world of commodities that actually conceals, instead of disclosing, the social character of private labour, and the social relations between the individual producers. When I state that coats or boots stand in a relation to linen, because it is the universal incarnation of abstract human labour, the absurdity of the statement is self-evident. Nevertheless, when the producers of coats and boots compare those articles with linen, or, what is the same thing, with gold or silver, as the universal equivalent, they express the relation between their own private labour and the collective labour of society in the same absurd form."

이 부분도 읽어볼 만하다. 결국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가 맺어지는 게 아니라, 물건 대 물건으로 관계가 맺어지고 있는 현실을 잘 나타냈다.

어떻게 보면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떠오르는데,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들(commodities)과 돈이 인간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다만, 슬픈 현실은 자본주의는 우화 애니메이션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걸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맑스의 평소 시각과 유사하다.

인프라가 상부구조(superstructure)를 지배하고, 물질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후 맑스는 종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즉 종교적 신념이 이러한 물신성과 노동가치이론의 부상으로 인해 내적 변화를 거쳤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유물론자의 사고이다.

한편 여담이지만 맑스 이후의 저명한 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맑스의 주장을 이렇게 변주한다.

"자본주의는 사실 이러한 종교적 신념의 표출일 따름이다."


아무튼 지금까지 일관되게 우리가 봐 온 맑스의 주장은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이 사회, 정치, 종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맑스는 완전 결정론자/유물론자네?"

맑스의 주장이 환원주의(reductionism)적인 것은 사실이나, 꼭 그의 주장이 100% 결정론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물론 그가 자본론을 집필한 시대인 1860년대가 역사적으로 결정론의 황금기이자 대성공 시대이기는 했다.

당장 필자의 전공인 물리학만 보더라도 라그랑지언 포말리즘이나 정준 포말리즘이 나타나고 고전 전자기학이 완성되었던 시기가 당시이다.

맑스가 철학과 물리학 전반에 깊은 관심을 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틀림없이 그의 기본적인 태도는 결정론적이었다. 따라서 맑스는 결정론자가 맞다.

그러나 한편으로 맑스가 화폐와 상품에 숨겨진 상징(symbolism)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이건 상당히 구성주의적이다.

그랬기에 맑스의 사상은 1860년대에서도 당시의 고전적 결정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게 느껴지는 부분도 분명 있었던 것이다.

만일 맑스가 고전적 결정론자였다면 오늘날 구조주의자들이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상당수가 맑시스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결정론이나 환원주의의 기여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당장 환원주의의 기반이 없었다면 양자역학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트2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맑스의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가"이다.

자본론 전체를 통틀어 강조되는 유물론적 사고가 여기서 나타나고, 물질이 사회/정치/종교에 영향을 미친다는 그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맑시즘이 100% 결정론적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결정론적인 attitude를 가지고 변증법의 경로에 있어서는 확률론적(stochastic)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맑시즘이며, 상당히 구성주의적이기까지 하다.

여기까지가 페티시즘 섹션에서 맑스가 말하고자 한 기본적인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맑스는 자신이 강조했던 노동가치이론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노동가치이론을 사회적 생산의 기본적 형태로 여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맑스는 분명히 페티시즘의 마지막 부분에서 당시의 고전경제학자들에게 노동가치론을 간과하지 말라고 경고장을 날린다.

따라서 노동가치론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 맑스의 주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대체 저 말은 무슨 맥락에서 한 것일까?


맑스의 의도는 결국, 노동가치이론조차도 역사적인 구성개념(historical construct)라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의 종말기에, 그게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먼 미래에는 노동가치이론도 해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노동가치이론을 절대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한 것은 당시의 고전학자들이었고, 맑스는 결코 절대적인 차원에서 인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