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동물권 그 자체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동물권 행동주의(activism)의 영역으로 갔을 때 활동가들의 투쟁 양식이 어떠한가에 대한 논쟁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좌파에도 동물권 운동에 대한 시각은 일관되기보다는 여러 갈래로 나뉘지만, 이번 글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주관적인 평가를 해 보고자 한다.
<산양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피터 싱어>
우선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을 기점으로 동물권 활동가들의 투쟁 방식이 전반적으로 변화한 점을 지적하며 이야기를 시작해 볼 수 있겠다. 피터 싱어 이전에는 동물에 대해 인간이 일부 호의를 베푼다는 개념의 투쟁 양식이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다.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이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이후부터는 동물을 인간과 완전히 평등한 존재로 보려는 시각이 생겨났다.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을 보면 피터 싱어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 인권론을 비판했던 토머스 테일러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며 논리를 전개한다. 토머스 테일러가 "여성에게 인권을 허용한다면, 짐승도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던 것을 단순한 조롱이 아닌, 타당한 명제로서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이후 종 차별주의(speciesism)라는 이름으로, 동물권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동물을 즉시 해방시켜야 한다는 급진적인 담론이 힘을 얻게 되었고, 이들은 안티파(Antifa)적인 방식을 시위에 일부 차용하여 게릴라식으로 정육점 앞에서 시위를 펼치는 등 획기적인 방식의 투쟁을 전개한다.
현대 동물권 활동가들이 펼치는 주장의 요체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흑인과 여성이 해방된 것처럼(완전히 해방된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동물들도 해방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즉 백인 남성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인권과 평등이 역사적으로 흑인으로 확장되었고, 여성으로까지 확장되었는데 동물권으로까지 확장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일견 타당한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본질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사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동물해방에 대한 논의는 흑인, 여성에 대한 그것과 사뭇 결이 다르다. 흑인이나 여성의 해방은 흑인과 여성이 하나의 주체로서 치열하게 투쟁을 전개해 나갔기에 얻어진 것이다. 결코 백인 남성들이 시혜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 처음부터 마음을 열고 부여한 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시시피 자유여름을 위시로 한 흑인민권운동에서 나온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미진한 흑인 인권조차도 없었을지 모르는 일이고, 비록 화이트 페미니즘이자 리버럴 페미니즘이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여성인권운동의 기념비적 사건인 서프러제트 운동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페미니즘이 없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즉 시대적 한계나 일부 미진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흑인 운동과 여성 운동에서 공통적으로 관측되는 점은 사회적 약자들이 적극적 주체로서 권리를 얻기 위한 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물권의 경우 동물이 본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한 적이 있던가? 또한, 동물들이 정말로 원하는 권리란 무엇인가? 그 소위 권리라는 것이 인간의 시선으로 재단되고, 인간의 감응력에 한정된 담론으로만 진행된다면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만족할 만한 답변이 나올 수 있을까? 동물의 권리를 생각하고 배려하고 챙겨 주는 것은 모두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체로 잘못된 일은 절대 아니며 오히려 권장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개인윤리의 영역에 머무를 때 보다 효과적이다. 그것이 보편도덕으로 확대되고, 타 문화권 민중의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돔물권이 절대적인 도덕주의로써 강요된다면 해당 문화권의 민중들은 동물권의 타당성보다 해당 문화권에 가해지는 압력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종래는 그것을 또 다른 형태의 서구제국주의로 인식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도덕이 극단적 도덕주의로 변질되어 망가지는 사례를 여러 차례 봐 왔다. 미국이 타국에 개입하는 명분은 일반적으로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평화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폭넓게 사용되고 또 공감받는 보편도덕이다. 그런데 그 보편도덕이자 지극히 타당해 보이는 언설이 학살과 착취에 이용되는 현장을 우리는 이라크와 소말리아 등 제3세계의 국가들에서 무수히 목격해 왔으며, 이는 명백하게 도덕이 도덕을 배반한 것이다. 동물권과 관련한 담론도 마찬가지의 위험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즉 동물권 담론은 인간의 도덕성과 윤리에 의존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대체로 동물권 활동가들은 이런 담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따라서 그 투쟁 양식이 동물권 담론이 지배적이지 못한 비서구권의 소위 "야만적 행위"를 비난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일이 잦다. 이슬람의 할랄 도축 과정이 매우 잔인하다든가, 한국의 개고기 섭취 문화가 비인격적이라는 비난을 하는 경우 등이 이것에 해당한다. 하지만 동물권 활동가들 중 애완동물에 대한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애완동물 공급이 확대되고, 그 과정에서 개, 고양이 등의 공급과 유통이 동물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부분은 누구도 쉽게 지적하지 않는다. 적어도 애완동물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애완동물에 대한 애정을 갖고 키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판단인가? 동물의 주체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결국 인간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결과물일 뿐이다. 그 점에서 치명적인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동물권 담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도덕과 윤리에 의해 규정되고 판단되는 것이지, 결코 동물의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소리다. 동물권 활동가들에 의해 동물이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고, 해방되었다는 것도 객관적 실체가 아닌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물 해방을 포기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동물권을 도외시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 생태주의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동물은 언제나 수요의 대상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혁파하지 않고는 동물이 수요와 욕망의 대상에 머물러 있는 근본적 병폐를 절대 해소할 수 없다. 대량 도축체제의 근원을 극복하는 길은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타파하고, 서구권이 만들어 놓은 도축시스템의 본원에 대해 최소한의 숙고를 거치는 것이다. 설사 당장 혁명이 불가능하더라도 반려견 산업의 공급 부문을 규제한다든가 하는 보다 거시적이고 본질적인 투쟁 방식은 충분히 존재한다.
<섬 원주민들을 향해 "타락한 야만인"이라는 망언을 쏟아낸 브리짓 바르도>
나는 동물권 담론에서의 미시적 투쟁이 아예 의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시적 투쟁이 타인에게, 또는 타 문화권에게 나의 도덕을 강요하는 일으로 변질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고 야만, 비도덕이 되어 버리고 만다. 특히나 동물권을 자본주의 하에 예속시킨 주범인 서구권과 1세계 활동가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방문해 개 도축을 그만두라는 식의 투쟁을 벌이는 것은 서구제국주의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게 된다. 동물권 담론이 자본주의나 인종, 젠더 등의 문제와 완벽히 분리된 문제라고 생각하는 순간, 브리짓 바르도와 같이 개고기 식용화를 비난하면서 마린 르펜의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것처럼 해괴한 사례들이 튀어나오게 된다. 다만, 브리짓 바르도는 유럽 사회에서 절대 미친 극단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동물권 담론을 단일한 이슈로 한정짓고, 생태주의와 여성주의 등 다양한 담론들과 교차되고 얽힌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며 단지 불쌍해 보이고 애처로워 보이는 "이미지 정치"에 집중한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시일 뿐이다.
요컨대 동물권 운동이나 채식주의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연계성과 교차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담론을 순시적이고 일차원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을 크게 경계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진지한 검토 없이 동물권을 외치는 시도가 종래는 리버럴리즘이나 보수주의와 야합하면 애완견 몇 마리 데리고 리본 치장해 주면서 그것이 동물인권이라고 말하는 동물 버전의 토크니즘(tokenism)에 빠질 우려가 매우 매우 크기 때문이다. 현재 일부 동물권 활동가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대신, 우리는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유기성을 충분히 존중하며 반자본주의적 투쟁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동물이 자발적인 의지로 반인류 투쟁을 진행하지 않는 이상, 가장 현실적이고 부작용도 적으며 가장 구조적인 대안에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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