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가? 무서운가? 불쾌한가?

가부장·자본주의사회 전복 향해야


지수┃사회운동위원회


사회변혁노동자당은 지난 8월 ‘변혁을 설계하라’는 제목의 2016년 정치캠프에서 다양한 주제와 함께 사회운동 영역의 주제들도 다뤘다. <변혁정치>는 정치캠프에서 다룬 사회운동 영역의 주제별로 당시 발제와 토론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변혁정치>는 이를 계기로 해당 주제에 관한 토론과 고민이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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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에서 더 이상 포르노는 검열의 대상이 아니다. 공중파 TV에서 연예인들이 “야동 봤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을 만큼 한국 사회에서 포르노에 대한 합법과 불법의 경계는 모호하다. 아동포르노나 리벤지포르노(헤어진 연인에 대한 보복 등 악의적 의도로 유포한 민감한 사생활을 담은 촬영물), 스너프필름(폭력·살인·강간 등의 모습을 담은 필름) 등은 범죄로 인식되지만, 이를 제외한 성적재현물인 포르노를 검열·금지해야한다는 주장이 이제는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형법과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에관한법률,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등을 통해 포르노를 규제하고 있지만, 포르노산업은 이를 비웃듯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으며, 성서비스산업와 연동된 방식으로 사이버공간을 통해 그 위치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다.

성인사이트들은 이제 포르노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경쟁적으로 이용자들에게 직접 촬영한 영상과 인증 글을 올리도록 독려한다. 많은 호응을 받은 게시물에 상금을 걸거나 등급제를 통해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였던 개별 회원들은 이제 적극적인 공모의 주체로 등장한다. 가족과 연인의 사진을 몰래 찍어 올리고 공유하는 공모의 과정에서 죄의식은 사라진다. 강간이나 리벤지포르노 영상을 올린 몰카범은 영웅으로 떠받들어진다. 현실이 아닌 판타지라고, 성적 재현물의 위험성 역시 과장되어 있다고 치부했던 포르노 영역에서 이제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점차 모호해져만 간다.


포르노 속 여성의 왜곡된 이미지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과잉폐기를 본질로 삼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속성과 포르노는 그 맥을 같이 했다. 과잉욕구를 자극해야 하는 자본주의는 성적 욕망의 자극을 필요로 했다. 즉, 직접적인 성적 충족을 가능하게 하는 성서비스산업의 한편에서 성적 욕구를 만드는 동시에 저렴한 가격에 성적 욕구를 직접 채울 포르노물 생산이 다시 성서비스산업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후기 자본주의사회가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 된다. 공룡으로 성장한 포르노산업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결합된 결과물로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는 포르노라는 도구를 통해 서로를 강화시키고 있다.

포르노의 해악성은 미풍양속을 해치는 음란성이 아니라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는 행태의 극단적 표현에 있다. 포르노에서 여성은 대개 성적으로 종속되고 노예처럼 행동한다. 여성은 몸의 일부가 수시로 절단되거나 결박당하고 강간이나 모욕 등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성적 대상이 된다. 이를 관람하는 남성은 포르노 속의 이미지를 현실과 혼동하면서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포르노적 성행동을 모방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영향은 남성들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여성들도 포르노 속의 여성 이미지를 통해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화되고, 왜곡된 여성이미지를 주입받는다.


원인 아니라 가부장적 자본주의 산물

물론 포르노가 성범죄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는 권력관계에 의해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폭력 범죄의 대상으로 권력관계의 하위에 있는 약자, 젊은 여성이나 노인여성 또는 아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포르노가 성폭력을 일으킨다”는 인식은 성폭력을 여전히 ‘성욕’ 프레임에서 인식하려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성폭력사건이 ‘포르노-성욕-성폭력’이라는 도식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폭력은 약자에 대해 권력을 남용하는 방식이다. 오히려 포르노의 문제를 지적하려면 포르노산업에서 여성이 얼마나 왜곡된 모습으로 비춰지는지를 말해야 한다.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포르노 속에 재현되는 섹스의 내용,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이다. 포르노의 문제는 그 속에 투영된 여성에 대한 시선과 관점에 있다. 포르노 속의 여성은 남성관객의 쾌락을 담보하는 성적인 대상인 반면, 포르노 속의 남성은 그러한 남성관객에게 동일시를 통해 욕망을 대리 배설해 주는 존재다. 남성은 포르노 속에서 능동적 주체로 존재할 수 있지만, 여성의 육체는 남성의 시각적 쾌락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탈인간화되고 파편화돼 등장한다.

포르노로 대표되는 왜곡된 성적 이미지는 우리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10대 여성아이돌에게 과도한 섹시컨셉을 강요하는 예능시스템, ‘여성 캐릭터=선정적 캐릭터’가 공식으로 자리 잡은 한국 게임시장, 강간신화를 모티브로 하는 작품이 흥행하는 영화시장, 성폭력 사건에서조차 피해자인 여성을 부각하고 범행 상황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언론, 맥심코리아와 같은 남성잡지뿐 아니라 여성의 미모를 획일화하는 여성잡지에서도 왜곡된 성적 이미지는 동일하게 발견된다. 결국 포르노는 여성억압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가부장적 가치가 자본주의에 힘입어 재생산되는데 기여하는 수단일 뿐이다.


성평등한 방향으로 미디어 재구성하자

사회변혁노동자당 정치캠프 ‘포르노마당’ 토론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포르노에 대한 경험과 느낌을 공유했다. 포르노는 누군가에겐 무섭고 더러운 것, 누군가에겐 호기심에 보지만 썩 유쾌하지는 않은 것, 누군가에겐 가학적인 시선과 폭력으로 불편한 것이었다. 보통 포르노를 접하는 시기가 청소년 시기이다보니 포르노가 일종의 교본역할을 하고 있으며, 폭력적이고 왜곡된 성적 판타지가 현실에서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그러나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라는 주장은 논쟁적이었다. 포르노와 성범죄와의 직접적인 연관을 증명하기 힘들다는 주장과, 간접적인 영향이 쌓여 실제 행위와의 개연성을 찾을 수 있다는 의견이 대립됐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건설할 사회주의에서 포르노’라는 주제에서 참가자들은 성적재현물의 생산은 이후 사회에서도 이어질 것이라 전망했다. 단, 포르노에서 비춰지는 여성의 모습이 현재사회의 지배적인 코드들과 사회문화적 맥락의 반영이기에,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굳이 국가의 검열이라는 강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구성원의 자율적 합의를 통해 통제되는 방식이 가능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포르노에 대한 일소의 방법은 여전한 고민으로 남았다.

이윤창출로서의 포르노산업이 사라진 사회주의사회에도 과연 포르노는 존재할까. 여성에 대한 불평등한 사회관계가 그대로 투영되어있는 것이 포르노라면, 가부장적 자본주의 권력이 그 힘을 잃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 공동체구성원의 자율적 합의로 인해 용인되지 않는 사회가 되면 포르노의 존재 이유가 지금과는 달라지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대안포르노운동이 꿈꿨던 것처럼 자유로운 성적실천의 매개로서 성평등한 포르노가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포르노를 포르노이게 하는 현 사회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한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상의 시선과 관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미디어를 성평등한 방향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여성억압의 종식을 위해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공격, 전복을 지향하는 실천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참고문헌]

- 이나영, <포르노 섹슈얼리티 그리고 페미니즘>, 서원, 1999

-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2005년 여름)

- 권현정,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가족과 성욕을 둘러싼 쟁점들)>, 공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