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제국의 시대
미국에게 있어 1900년대는 제국의 시대다. 1898년 미서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를 사실상 자신들의 식민지 국가로 만들었고, 동남아시아에선 필리핀을 중남미에선 푸에트리코를 가져갔다. 또한 하와이 왕국을 군사력으로 합병하기에 이른다. 필리핀 식민지화 과정에서 최소 20만 명에서 60만 명에 달하는 필리핀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우리 역사에선 잊을 수 없는 가츠라-테프트 밀약도 이때 체결되었다. 또한 파나마 운하를 이때 건설하였으며 1979년까지 이곳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미국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10년대, 중립과 간섭의 시대
19세기에 미국이 천명한 먼로 독트린은 사실상 미국이 아메리카에 대해 사실상의 간섭을 뜻했는데, 1910년대의 미국은 이러한 중립과 간섭이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중남미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을 점령하였으며, 중남미의 작은 국가들을 미국 자본과 다국적 기업들의 착취에 놓이게 했다. 대표적으로 니카라과 같은 나라는 1912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의 보호령 신세였고, 그 외의 중남미 국가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멕시코 같은 경우 국경분쟁에서 미군의 대대적인 침략과 공격을 받았었다.
그러나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형식상 중립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보았고, 독일의 잠수함 공격과 치머만 사건으로 인해 1917년에 참전한다. 이후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 자리에 오르고, 서구 열강 사이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일어난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간섭군대를 블라디보스토크와 아르헨겔스크에 파병한다.
1920년대, 재즈와 풍요의 시대
1920년대의 미국은 과잉과 풍요를 누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여파로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보게 된 미국은 과잉생산과 과잉소비가 전 사회적으로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 흑인들이 연주하는 재즈가 인기를 끌었고,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위대한 개츠비처럼 부유한 계층은 과잉 소비와 파티를 즐겼다. 또한 그들은 그런 풍요로움 속에서 주식시장에 과잉 투기했다. 또한 자동차가 보편화 되어 1920년대 말엽에는 3000만 대가 넘는 자동차가 미국의 도로를 달리게 되었고, 광고 산업과 영화 소비량이 증가하였으며, 신문도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실업률이 감소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했지만, 여성 문제, 흑인 차별은 비롯한 인종 차별 문제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고질적 문제인 빈부격차의 문제는 당연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소위 ‘플래퍼(flapper)’ 불리는 신여성이 미국에서 탄생했다. 이민자들도 증가하여 1924년 의회는 이들을 제한하는 ‘이민법’을 통과시켰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는 1929년을 겪으면서 이러한 시대는 막을 내린다.
1930년대, 공황과 뉴딜의 시대
1929년에 시작된 검은 화요일은 미국 사회 전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주가가 폭락하고 돈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파산하기에 이른다. 성장과 풍요를 달리던 1920년대와는 달리 1930년대 초 미국 경제 상황은 하락의 연속이었다. 5000개가 넘는 은행들과 수천 개의 회사가 도산했고, 도산하지 않은 회사나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1932년에 들어 대략 25%되는 노동자들이 실업 상태였고, 고용 노동자들 또한 대체로 불완전고용 상태에 있었다. 1933년에는 1500만 명이나 되는 미국인이 실직했다. 경제 대공황이 실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집값을 낼 수 없어 ‘후버빌(Hooverville)’과 같은 판자촌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던 1933년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른바 뉴딜(New Deal)이라는 정책을 내놓는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하며 전국부흥법, 농업 조정법 테네시 계곡 댐 건설 등을 실행했고, 시장과 개인이 담당하던 문제를 국가가 개입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도 생기고 경제도 차츰회복세를 보였지만, 공황 자체를 완벽하게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1930년대 후반은 1930년대 초에 비해 경제가 상당히 많이 좋아졌고, 일자리가 생겼으며, 미국인들에게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1940년대, 전쟁과 초강대국 부상의 시대
루스벨트가 뉴딜을 해나가던 중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중립을 표명했지만, 2년 뒤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유럽에선 히틀러와 무솔리니 아시아에선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다.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소련과 동맹관계를 유지했고,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미국의 경제는 상승하고, 일자리는 1930년대 뉴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또한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도 엄청났다. 그 덕분에 미국의 군대는 세계 최강의 공군력과 육군력 그리고 해군력을 소유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드웨이 해전과 과다카날 전투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해 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나치독일이 항복한 이후에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결국 일본은 항복했고, 미국은 소련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드레스덴 폭격이나 원자폭탄 투하 등과 같은 도덕성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과 경쟁하는 체제로 갔고, 1947년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하면서 더 극심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력은 경제 성장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확장됐다. 일본, 한반도, 중국, 그리스, 서유럽, 인도차이나 등에서 미국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사회주의 소련을 적 혹은 악의제국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생각은 1949년이 되면서 더 심해졌다.
1950년대, 반공주의와 풍요의 시대
미국에게 있어 1949년은 충격의 해였다.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를 했고,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했다. 이렇게 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피해망상은 더 커져만 갔다. 이게 바로 매카시즘의 등장 배경이었다. 거기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국 내의 매카시즘은 더욱 극성을 부렸고, 심지어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비상식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저명한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초를 겪고, 미국의 정치계, 연예계 그리고 그 외의 행정분야에서 수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심지어 이렇게 몰렸던 로젠버그 부부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와 더불어 미국의 경제는 다시 호황을 누렸다. 1920년대를 훨씬 능가하는 호황 말이다. 1945년에서 1960년 사이 미국의 국내총생산(GNP)는 2000억 달러에서 5000억 달러나 증가했고, 경제 대공황 시기 평균 25%였던 실업률은 1950년대에는 5%까지 하락했다. 또한 이런 호황 속에서 미국인들은 아이를 많이 낳았는데, 이때 태어난 이들이 바로 베이비붐 세대다.
1950년대 미국은 소비재에 대한 몰입이 증가했는데, 이것은 번영의 증대, 제품의 다양성과 이용 가능성 증가, 그리고 그러한 제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던 광고업자들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러한 소비재 수요의 증가로 신용카드(Credit Card)가 발달했다. 1920년대부터 미국 사회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생산이 증가하였던 자동차의 경우 미국 중산층 가정 하나당 소유하고 있었으며, TV의 보급도 증가하여 1957년에는 대략 4000만 대의 TV가 미국인들에게 보급되었다. 텔레비전의 증가로 인하여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이미지”가 미국 사회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로 대표되는 록큰롤에 대한 젊은이들의 사랑과 비트족의 탄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풍요는 영화 플레전트 빌에서 잘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매카시즘 열풍이 풍요속에서 약해졌지만, 여전히 반공주의는 강력히 남아있었고,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호 발사와 더불어 미소대립과정에서의 핵경쟁은 계속됐다. 미국은 이런 풍요 속에서 소련과의 핵전쟁을 걱정했고, 이러한 걱정은 1962년 쿠마 미사일 사태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저항과 혁명의 시대
1960년대의 미국은 저항과 혁명의 시대다. 1950년대의 풍요에 대한 환상과 반공에 대한 환상이 점차 감소했고, 1950년대부터 시작된 마틴 루터 킹으로 대표되는 흑인인권운동은 더욱 확장됐다. 이와 더불어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으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전하면서 미국 사회는 저항과 혁명의 불길이 크게 일어났다. 수많은 단체가 여성운동, 흑인인권운동, 환경운동, 성소수자 운동, 반핵운동 등과 같은 시위를 벌였으며, 이것은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과 연장선상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은 호치민이나 체게바라 그리고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며, 처음만난 이들과 자유롭게 구속없는 섹스와 마약을 즐기기도 했다. 특히 히피(Hippie)로 대표되는 이들은 자연으로의 복귀와 전쟁 반대 평화 추구라는 목적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1960년대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엄청난 군사적 낭비와 소모로 인해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 좌절과 개인의 시대
1970년대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의식으로 인한 좌절과 개인주의가 만연하던 시대다. 1970년대 미국은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에 따라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1960년대에 있던 사회 혁명적 분위기는 조금씩 잠들기 시작하며, 사람들이 정치적인 부분보단 개인적인 문제나 개성에 관심을 두게 된 시대였다.
베트남 전쟁 말기 미국에서 터졌던 ‘웨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미국인들에게 정부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고, 1974년 중동에서 ‘오일 쇼크(Oil Shock)’가 터져 미국은 그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오일 쇼크로 인한 석유 가격 급등은 미국 경제의 전 영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인플레이션은 1972년 3.3%에서 1974년에 11%로 급증했다. 디트로이트의 제너럴 모터스의 경우 무려 3만 8000명의 노동자를 무기한 일시 해고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1970년대 초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베트남 전쟁의 패배와 더불어 히피로 대표되던 소위 ‘신좌파(New Left)’ 운동은 점차 힘을 잃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인 타격과 전쟁에서 졌다는 패배의식이 소위 좌파운동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970년대 미국인들은 자기 개성에 더욱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70년대 미국에선 조깅이나 다이어트 그리고 건강한 식단과 같은 것들이 국민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종교적인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침술과 같은 동양 의학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 제2의 반소반공의 시대
1970년대는 개인주의와 환경운동이 주목을 끌기도 했지만,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들이 세력을 넓혀나가기도 했다. 그 결과 1980년 신보수주의자인 로널드 레이건이 카터를 누르고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은 소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라고 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이것은 ‘공급 중심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에 기반한 것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 국내의 각종 사회, 경제 문제에서 줄곧 극단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며 보수주의자들의 편에 섰다.
그는 자유 기업 제도와 기업가의 판단을 믿었고, 자유 방임주의만이 경제 불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하면서 도시 지원, 노인 의료 보장제, 저소득층 의료 보조, 식량 구입권,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보조금, 학교 급식 등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복지와 사회 보장에 사용되는 예산을 삭감했다. 그는 부유층과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여 그들에게 세금을 삭감하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1983년 3월 레이건은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 ‘스타워즈’의 이름을 딴 전략 방어 계획인 ‘스타워즈 계획(Starwars Plan)’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20세기 말까지 우주와 지상에 빛이나 빔을 이용하는 지향성 에너지 무기에 공격용 위성과 요격 미사일이 더해지는 다중 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축하여 소련의 공격 미사일을 요격한다”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외에도 레이건은 니카라과와 그레나다, 쿠바, 이란-이라크 그리고 리비아 문제에 군사적 개입 및 간섭을 추구했고, 반소련 정책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에 맞서는 무자헤딘을 CIA를 통해 지원했다. 이러한 반공적 분위기는 1980년대 영화에도 나타났는데, <레드 던 Red Dawn>과 <람보 시리즈 Rambo> 그리고 <탑 건 Top Gun>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1990년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
1980년대 반소 반공정책을 추구하던 레이건은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협상하기도 했었는데, 1991년 45년간 냉전을 장식했던 소련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명실상부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 막대한 군사력을 동원했던 미국은 미군 전사자 200명 정도로 이라크군 수십만을 궤멸시키는 현대전의 파괴력을 과시했다. 1993년에는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하여 군사작전을 전개했고, 이러한 작전은 영화 블랙 호크 다운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1994년에는 북한과의 전쟁을 준비하기도 했으며,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내전에 NATO군이라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이처럼 미국은 1990년대 당시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는 여전히 문제가 많았다. 인종문제는 더더욱 그랬다. 1992년 LA 폭동으로 인해 로스엔젤레스 전체가 폭동의 혼란에 휩싸였고, 네오나치와 같은 백인우월주의자들도 비록 소수지만 세력을 넓혔으며 1995년 오클라호마시티 연방 청사 폭파 사건으로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외에도 죄수의 숫자도 워낙 많아 1950년대 소련의 굴라그 수감자 보다 300만이나 더 많은 수감자를 보유하기도 했다. 이처럼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는 레이건이 초래한 극심한 빈부격차와 더불어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1990년대 세계화의 시대를 맞으면서 인터넷의 발전은 인류사적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1990년대 를 지나면서 미국은 20세기를 지나갔다. 그러나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는 21세기를 맞으며 또 다른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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