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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관자 - 일본 우익의 국가주의와 아시이주의 연구 :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론과 이시와라 간지의 쇼와유신론 中


기타는 사회주의의 ‘사회 만능설’과 공산주의의 ‘획일성’을 배제한다. 「개조법안」 의 각 항목에는 몇 개의 각주를 기입하여,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취지에서 자신의 논지를 정당화한다. 「개조법안」 의 총론에 해당하는 서언(觸言)과 결언(結言),그리고 주가 달린 권의 각 항목에서는 좌/우의 소유 관념과 사회정책을 비판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는 셈이다. 「개조법안」 의 목차 중에서 〈권1- 4〉는 사유재산을 ‘민주적 개인’의 ‘인격적 기초’로 인정하되,소유 한도를 정하고 소유권을 직계가족에게 한정하고,국가적 토지소유 및 공공적 생산 시스템을 확정한다. 자본주의의 비능률과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할 ‘민주사회주의’ 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가사회주의’로 해석되는 「개조법안」 은 정치 경제적인 기득권자의 권한을 제한하고,노동자 ·국민· 국가의 권리를 새롭게 부여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기타는 관료와 독점재벌 군벌을 정치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국민과 일체된 천황의 통치권 회복을 주장하고 노동자· 여성· 아동의 권익보호 등 사회혁신 논리를 제시한다. 인간의 이기성과 사회의 공공성을 국가적 관리와 통제 하에 조화시키자는 발상으로 보인다. 소자본의 사적 경영과 대자본의 국가통일을 공존시키는 점에서 레닌의 신경제 정책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기타는 사회주의의 관념적 평등관과 노동중심의 인간관에 대해 비판적이며 인간의 창조 활동을 무시하고 강제노동을 강요하는 것은 자유의 억압이라고 보았다〈노동임금/주2〉.

〈서언〉의 마지막 단락에서는 ‘일본개조’에서부터 ‘아시아연맹’, 그리고 ‘세계연방’ 으로 나아갈 ‘검의 복음’(劍 の福音)을 강조한다. 그는 식민지배의 질서를 부정하지만,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현실적 허구에 그친다고 맹렬하게 비난한다〈조선인의 참정권/주2〉. 또한 인류의 평등과 민족주의의 발흥을 긍정하지만, 민족 및 국가 간 경쟁을 무시하고 안일한 평화론에 빠지는 사회주의자를 비판한다 〈국민교육의 원리/주3〉. 일본은 인종차별을 극복한 평등원리로 세계를 개조해야 한다. 제국의 전 영역에서 원주민의 소유권과 참정권 노동과 교육 등에서 “참된 공평무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중국과 인도의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의 ‘실력 원조’가 필수적이다. 기타는 일본의 영유권이 시베리아와 호주로 확장하기 위하여 영국과의 대전을 구상하는데,장차 조선,중국,인도인은 ‘동서문명의 융합’을 시도할 새로운 국민적 주체로서 호명된다. 그의 전투적인 상상력 속에서는 “개조된 합리적 국개 혁명적 대제국”의 국가적 보호 하에 아시아 7억 인구의 ‘연맹’이 실현된다. 확장된 제국 안에서 조선은 일본과 평등한 법역으로 상정된다. 〈권7: 조선 군현제〉에서는 “조선을 일본 내지와 동일한 행정법 하에 둔다.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 아니고,일본인의 식민지도 아니다. 일한합병의 본래 취지에 비추어 일본제국의 일부이며 한 행정구라는 근본 대의를 밝힌다”고 썼다.

〈결언〉에서 국가의 권리로 제시된 것은 정병제를 유지하고 전쟁을 개시하는 적극성이다. 그에 따르면, 현재의 얼본은 ‘국제적 무산자’에 해당하므로, 국제사회는 일본의 군비확산과 국민개병제의 정당성 및 그 실행을 무조건 인정해야 한다. 개전의 적극적 권리란, “국가는 자기방위 이외에도 불의의 권력에 억압당하는 다른 국가 또는 민족을 위해 전쟁을 개시할 권력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개전의 적극적 권리(이하,개전)〉. 바야흐로 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 부상했지만,기타는 오히려 대영제국의 아시아 지배와 러시아의 극동시베리아 영유를 적극적으로 견제한다. 그는 일본의 ‘삼대 국시’로서 “인도의 독립 원호,중국의 보전 확보 일본의 남방영토 취득”을 제시하며 영국에 대항할 해군력의 증강을 촉구한다〈개전/주6〉. “개조된 합리적 국가 혁명적 대제국이 국제적 정의를 부르짖을 때 여기에 대항할 수 있는 학설은 없다”며 개전의 정의를 확신하는 모습이다〈개전/주1〉.

기타의 급진적인 국가주의는 언어 통일론과 천황 대권론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다민족의 언어 소통과 제국의 공공영역을 확립시키기 위해서는 영어를 폐지하고 에스페란토어를 제 1국어로 삼아야 한다. 영어권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비군국주의 사상을 원초적으로 배제하고,에스페란토로 새로운 국민정신을 교육하자는 논지다. 그는 일본어로 세계의 영유권을 지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장차 에스페란토가 국어이자 국제어로서 통일되어야 하며,일본어와 각 민족어가 자연 소멸되는 것은 마땅한 이치라고 과감하게 말한다. 국제어로 통일될 때,영어와 각 민족어는 연구와 보존의 대상으로 잔존할 수 있다 는 것이다〈국민교육의 원리/주4〉.

인도 독립과 중국의 보전을 말하면서도 기타는 ‘반제 민족해방’이라는 내셔널리즘의 완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에게 ‘민족’은 ‘혁명적 대제국’과 ‘국제적 정의’에 귀속될 가치일 뿐이다. 일본의 세계사적 사명에 도취하여 ‘일본맹주론’을 제창한 기타였지만,일본어와 천황으로 상정되는 일본이라는 일국적 가치는 우선시하지 않는다. 그에게 천황은 국민이 봉공할 지존의 대상이 아니라,국가의 통치를 위임받은 책임자였다. 그는 관료와 재벌이 국가의 권리를 한탈한 상황에서,천황 대권을 발동하라고 천횡을 호출한다 일본의 국가개조를 위해서 천황이 직접 삼년 간 헌법을 정지하고 양원을 해산시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헌법정지〉. 기타는 천황을 일본의 혈통에 내재된 절대신=인격자로서 숭상한 것이 아니라,오히려 국가라는 절대 권력을 구현하고 통합하는 상정적 중심으로서 천황을 수단시했다.

〈결언〉의 마지막 문장은 “싸우지 않는 평화는 천국의 도가 아니다”라는 말로 맺어진다. 국가개조로부터 아시아연맹 세계연방으로 전진할 것을 강조한 후,“사해동포가 모두 이 불자의 천도를 선포하고 동서로 그 규범을 전해야 한다. 국가의 무장을 꺼리는 자 따위는 지혜와 견식이 유치한 부류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이 결구는〈서언〉의 마지막 문장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이러한 폭력 옹호론은 만주사변 이후 파국의 전쟁으로 치달았던 일본사회를 관통해 온 집요저음이라 할 것이다. 「개조법안」은 중일전쟁과 ‘대동아공영권’의 사상적 기조로 숭계되었다. 만주국과 동아협동체 건설에 협력한 좌파의 다수도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의 기회로 전환시킨다는 폭력혁명 노선을 달리고 있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 국민과 지식인들의 뇌리에 새겨진 ‘근대의 초극’ 과 ‘세계사의 모랄’도 전쟁과 파괴를 통해 비약하는 신세계를 장엄하게 수식한 표어들이었다.

기타의 혁명운동은 실패했다. 그러나 기타의 문제적 사상은 당대를 넘어서서 세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약육강식의 현세에서 대중을 구원할 방편으로 폭력적 저항을 인정하는 불교 사상은 1920년대 신채호에게서도 나타난다. 동시대의 기타 잇키가 국가 무장과 개전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은 세계혁명사에 대한 인식 및 2차례의 세계대전을 관통했던 시대정신의 주요한 흐름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 역사적 연원이 근대 국민국가의 합법적 무력행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1793년 자코뱅파는 국민 정병제를 실시하고 국가총동원을 선포하여 프랑스혁명에 대한 외국의 간섭을 막아냈다. 1794년 2월 국민공회는 공포정치 하에서 프랑스 식민지에서 흑인노예제를 폐지하는 법안을 세계 최초로 통과시켰다. 일국적 차원 에서 구제도를 타도한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세계에 전파했을 뿐 아니라,폭력의 당위성과 국민국가의 전쟁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확대했다. 1914년에 간행된 기타의 저작 『중국혁명외사』(支那革命外史)에서도 프랑스혁명을 주도하여 절대주의 왕정을 타도한 자코뱅파의 폭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기타의 국가론과 이시와라의 전쟁론은 일본에 고유한 종교적 또는 사무라이 전통이나,일본제국주의에 특이한 집단적 병리현상만은 아니다. 기타의 혁명론과 이시와라의 최종전쟁론은 동시대 인류사회에서 평등과 평화의 공공적 이익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전후 일본의 ‘평화’에서 그 의미를 구제하거나 재해석하려는 학술연구가 지속되었고, 특히 기타 잇키는 대중의 집단적 기억 속에서 전후의 민주적 개혁에까지 영향을 미친 우익 혁명가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