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은 세계의 변화를 초연하게 다루는 고고한 학문인 것 같지만, 역사학도 변화한다. 외부의 세계가 변화하는 것에 맞추어 변화하기도 하고, 역사학 내부의 필연적인 요구에 의해 변화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신문화사’라는 담론 역시 그런 변화의 산물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그것을 지탱해 주던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붕괴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기도 하며, 역사학계에 있어서는 20세기 최대의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사’에 대한 비판적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한다면 신문화사의 출현에는 인식론적인 이유와 정치적인 이유가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실로 마르크시즘과 아날학파를 양대 버팀목으로 삼았던 사회사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실천에 옮기면서 종래의 역사학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서술의 대상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점차 사회사를 실행에 옮기던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날학파의 역사가들은 사회사의 방법이나 인식론에 의문을 품으면서 그 단점을 수정·보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즉 역사를 보는 무수히 다양한 틀 중에서 어떻게 마르크시즘의 경제적 결정론에 의거한 ‘계급’이라는 틀만이 위와 아래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계급만으로 인간사의 다양한 변수들을 설명하려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환원론이 아닌가, 아날학파의 지리적 결정론에 가까운 구조주의 속에서 역사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개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기후와 풍토가 중요하다면 인간을 다루는 학문인 역사학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등등의 문제점들이 제기된 것이다.註 001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나라의 여러 역사가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추구했다. 그 방안을 미국의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은 인류학적 역사학에서 찾았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동료인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의 상징인류학을 무기로 삼은 단턴의 결론은, 계급의 구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논했던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문화적 경험의 차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부르주아가 부르주아인 것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 특유한 생활양식을 발전시켜 그것을 소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註 002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E.P. 톰슨(E. P. Thompson)과 미국의 중세사가 나탈리 데이비스(Natalie Davis)와 같이 사회사로 출발하였던 역사가들 역시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톰슨은 계급을 결정하는 요인은 ‘계급’ 자체라기보다는 ‘계급의식’이라는 주장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문화적 해석을 접목시켜야 할 필요성을 논했고,註 003 데이비스는 계급과는 상관없는 분석의 틀로도 사회사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註 004 이에 더해 린 헌트(Lynn Hunt)는 소설, 그림, 포르노그라피, 멜로드라마 등 이른바 문화적 산물의 분석을 통해 프랑스 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종래와는 전혀 다르게 설명할 수 있음을 보였다.註 005
한편, 프랑스의 역사가들은 구조주의의 지리적 결정론에 매몰된 인간의식을 되찾는 길을 망탈리테(mentaliteˊ)의 역사에서 찾았다. 즉 인간의식의 잠재적이고 장기지속적인 측면이 역사에 작용하는 방식을 찾음으로써 역사에서 문화를 복원시킨 것이다. 이탈리아의 역사가들은 무명인사 개인의 역사를 통해 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미시사의 방안을 발전시켰다.註 006 독일에서는 일상생활사를 발전시켜 대중이 문화를 소비하던 방식이 독일의 현대사에 드리운 그림자를 밝히는 작업을 진행시켰다.註 007
이런 경향들은 서로 관련이 없었지만,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문화사’ 또는 ‘신문화사’란, 이러한 유사성을 걸러본 결과 공통분모로 떠오른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뿐만 아니라 ‘어떻게 생각했는가’가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인식에서 비롯된 신문화사라는 새로운 조류의 역사서술은 대단히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을 굳이 분류한다면, 그것은 역사적인 자료를 읽고 해석함에 있어, ‘두껍게 읽기’, ‘다르게 읽기’, ‘작은 것을 통해 읽기’, ‘깨뜨리기’ 등의 방법에 의존하여 역사적 사건이나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이라고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두껍게 읽기’란 자연과학과 대비되는 인문과학에서의 글읽기에 전제가 되는 방법으로서 클리포드 기어츠의 ‘두꺼운 묘사(thick description)'라는 개념에 힘입은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단어에 대해 접근할 때에 자연과학의 입장에서는 사과라는 물체와 관련된 외형적, 객관적 사실들을 묘사한다. 즉 사과의 원산지, 주요 생산지, 크기, 색깔, 영양가와 같은 것들을 얇게 묘사한다. 묘사된 것을 벗기면 그 밑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면 인문과학에서는 사과 자체보다는 그것에 담겨 있는 여러 의미를 다룬다. 예를 들면 트로이 전쟁의 사과, 뉴턴의 사과, 빌헬름 텔의 사과와 같은 역사적 층위의 의미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사과가 파생시키는 의미의 연상작용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형적으로 사과에 대해 쓰고 있다는 것은 같을지라도 거기에 담겨진 의미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인문학 또는 인류학에서의 묘사는 원래가 ‘두꺼운 묘사’이며, 이 두꺼운 의미의 층위를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징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두껍게’ 읽은 역사적 자료는 역사에서 객관적 사실만을 확인하려던 종래의 과학적 역사와는 확연하게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르게 읽기’란 역사학이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역사를 보는 관점과는 다른 맥락에서 역사를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어떤 면에서 역사학은 서구 중심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다.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승리자 중심으로 역사의 서술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으로서, 의도적이었건 아니었건 역사학이 체제를 미화시키는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시각은 이미 너무도 깊게 뿌리 박혀 있어 사람들은 역사학의 이런 보수적 성격에 의문을 품지도 않은 채, 기존의 역사서술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
‘다르게 읽기’란 이런 관행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만일 西勢東漸의 역사를 동양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예제를 노예의 관점에서 본다면, 프랑스 혁명을 여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 패배자의 지평선으로 세상을 본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며 그 서술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환경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환경사도 새로운 분야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것 역시 지금까지의 인간 중심의 관점을 뒤바꾸어 자연을 무대의 전면으로 내세운 것임을 감안한다면 ‘다르게 읽기’의 또 다른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르게 읽기’를 통해 우리는 ‘작은 것을 통해 읽기’라는 새로운 문화사의 또 다른 접근 방식으로 들어간다. 다르게 읽기란 바꾸어 말하면 지금까지 역사를 지배해왔던 ‘큰 사람들’을 벗어나, 박해받고 소외되었던 ‘작은 사람들’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수탈과 핍박의 대상이었던 그들에게는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들에 대한 기록 역시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알아야 한다는 필요는 그 빈약한 자료를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는 방법론을 발명해냈다. 미시사라고 불리는 ‘작은 것을 통해 읽기’는 단지 역사 속에서 사라져간 무명인물의 개인적인 역사를 복원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역사를 통해 그들로 대변되는 대다수 민중의 삶과 생각의 방식을 종래와는 다른 시각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다.
‘두껍게 읽기’와 ‘다르게 읽기’와 ‘작은 것을 통해 읽기’는 결국 ‘깨뜨리기’로 통합된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기존의 역사학이 유지해왔던 역사의 이해와 서술방식을 해체시키는 작업이다. 이것은 우리가 비판의 정신을 사용하기 이전에 언제나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정형화된 틀을 깨뜨리려는 노력이다. 이것은 단지 파괴를 하기 위한 깨뜨림이 아니라 그 정형화된 틀을 새로운 방식으로 성찰하여 더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틀을 만들자는 주문이다. 이러한 주문의 구체적인 모습은 이렇게 나타난다. 왜 중세의 평범한 농민의 일상생활이 역사책에, 특히 역사 교과서에 실릴 수 없는 것인가? 왜 우리는 뛰어난 사상가나 예술가의 업적만을 문화적 유산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는가? 인권을 확립시킨 위대한 혁명들에서 여성이 차지하지 못하던 위상은 어떤 것이었는가? 왜 포르노그라피와 같은 매체는 사료로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인가? 역사적 인과관계는 과연 인간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
미시사란 지금까지 설명하였던 모든 경향이나 문제 제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물론 독일의 일상생활사와 이탈리아의 미시사가 성격을 달리하고 있고, 이탈리아의 미시사 내부에서도 ‘일화적 미시사’와 ‘체계적 미시사’의 구분이 있을 정도로 미시사라는 경향 역시 단순화시켜 말하기는 어렵다.註 008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잘 테두리 지어진 구역 내에서 이름 없는 ‘작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복원시키려는 의도는 인류학이 지향하는 바와 방향을 같이하며, 피지배자의 관점으로 보자는 시도는 사회사에서 출발시켰던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한층 실제적인 차원에서 실천에 옮기자는 것이며, 결국 그것은 이제까지 관행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역사학의 기본적인 전제를 깨뜨리려는 해체의 전략과 맞물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문화사와 많은 공통점을 나누고 있는 미시사는 미시문화사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