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은 건국당시부터 미국 원주민들을 학살하면서 성장한 범죄적 조직이다. 미국 백인들은 건국시부터 타인종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 밖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는 늘 학살을 저지르곤 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필리핀인들은 미국을 도와 스페인을 필리핀에서 추방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미국은 곧 야욕을 드러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다. 미군은 이에 항의하는 필리핀인들을 학살했고, 기근이나 그밖의 다른 재해가 겹치기는 했지만, 이후 100만명 가량의 필리핀인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도 이런 미군의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아서, 스미스 대대가 인민군에게 패전하자 분풀이로 피난민 수백명을 학살한 노근리 학살이 있다. 미군 당국은 노근리에서 학살 명령을 부인했고, 후에 학살명령이 있었다고 증언한 참전군인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며 입을 막았다.
10여년후 벌어진 베트남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지만, 전선이 없는 비정규전이었던 만큼 한국전쟁보다도 더 참혹했다. 1971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오즈번은 피닉스 작전에 대해 증언했다. 캐나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군이 전개한 피닉스 전략을 통해서 1968년 부터 1971년 까지 약 2만7천명을 체포하여 2만명을 어떠한 물증이나 근거도 없이 학살했다고 한다.[14] 피닉스 작전으로 인한 사망자가 2만 명이라는 것은 가장 적게잡은 수치이고, 많게는 4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 이 작전에는 미 해군 특수부대인 네이비 씰(Navy Seal)과 그린베레(Green Beret)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의 특수부대들이 참여 했고, 그리고 남베트남 비밀 경찰들이 참가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을 납치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성고문, 전기고문, 거꾸로 매단 상태에서 행하는 물고문 그리고 무차별 구타와 같은 잔혹한 고문들을 자행했다고 한다. 오즈번은 "피닉스 작전은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가장 야수적인 범죄"였다고 털어놓았고, 6인치 나사못으로 뇌를 관통 당해 사망한 시신을 자신이 직접 확인했다고도 증언했다. 확실한 물증없이 사살된 사람들 대다수는 고문으로 죽거나 산 채로 헬기에 실려 태평양에 던져졌다고 한다. 즉 미군은 구정 공세 이후 피닉스 작전을 통해 계획적으로 전쟁범죄를 범한 것이다.
1970년 봄 사이공 농과대학에 다니던 남녀 학생 11명이 반정부시위와 관련하여 가혹한 고문을 받은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70년 7월 인권유린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맥클로스키 등을 포함한 미 하원의원 4명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이를 확인해보는 일까지 있었다. 심지어 베트남 수용시설 조사단에 참가했던 호킨스 하원의원은 북베트남 미군포로 수용시설이 남베트남의 미군 관활 수용시설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라며 미군의 범죄행위를 규탄하기도 했다.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피해를 보자 화가 난 미군들은 죄없는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68년에 일어난 미군 최악의 학살인 미라이 학살이다.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가 이끄는 미군은 미라이 촌에 들어가 단 하루 동안 총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미라이 학살 당시 미군에게 학살 당한 504명 중 17명이 임산부와 173명의 어린이 그리고 5개월 미만의 유아 56명이었다.[15] 이 학살은 1969년 어느 양심있는 기자의 폭로로 인하여 진상이 규명됐다. 미라이 학살은 당시 학살을 저지른 찰리 부대가 상급 부대에 공식보고한 전황에는 적 128 사살 아군 1명 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라이 학살이 보여주듯이 제국주의자들의 학살은 얼마든지 은폐될 수 있었다. 즉 미라이 학살은 미군이 베트남 곳곳에서 체계적인 양민 학살 가운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라이 사건을 은폐한 죄목으로 기소당한 오렌 핸더슨 대령은 1971년 초 기자들에게 여단 정도 크기의 모든 미군 부대는 어딘가에 각자의 미라이를 숨겨두고 있다고 고백했었다.[16] 또한 미국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닉 터스(Nick Turse)는 2013년에 출간한 자신의 책 『Kill Anything That Moves: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이라는 책에서 미라이 학살 사건 외에도 최소 100건 혹은 그 이상의 학살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규모는 다를 지라도 그러한 학살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는 얘기다.[17][18] 당시 미라이 학살을 주도했던 사람들 중 윌리엄 캘리 중위만이 처벌을 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닉슨 정부에 의해 가택연금 3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미라이 학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으면 진보위키에 있는 미라이 학살 문서를 참고하라. 그외에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타이거 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가 있다. 1965년 말에 창설된 타이거 부대는 1967년부터 베트남의 꽝응아이성에서 무고한 민간인 에게 베트콩이라는 혐의를 씌워 고문 및 살해하고, 생업에 전념하는 오지 마을을 습격하여 어린이 부녀자 노약자 등 주민을 학살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젊은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살해하고, 희생자의 고환을 잘라 전리품으로 들고 다니는가 하면, 부녀자의 품에 있던 유아의 목을 베거나 군홧발로 밟아 죽였고 한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호치민 루트, 라오스, 캄보디아 그리고 남베트남의 밀림을 무차별 폭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남베트남 숲에 에이전트 오렌지를 비롯한 각종 고엽제를 살포하여 수백만의 민간인들을 죽이고 테러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사망자가 2백만 이상이 나온 것은 사실 미국의 무차별 폭격과 고엽제 투하가 큰 원인이다. 1961년 8월 초부터 1971년 10월 말까지 만 10년 동안 미국은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 총 7300만 리터의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했다. 주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는 고엽제였는데, 베트남 인민 1인당 2.7kg에 달하는 달하는 다이옥신을 퍼부은 셈이었다. 고엽제로 인한 피해는 미군과 한국군 등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그 피해자는 참전 장병 및 그 자녀들을 포함하여 수십만에 이른다. 남베트남에서 미국은 전체 1만 5000개 촌락 가운데 9000개를 파괴했다. 북베트남에서은 산업도시 6곳 모두가 완전히 초토화됐다.[19] 남베트남에서 미군은 소위 수색과 섬멸 작전을 전개하면서 이러한 짓거리를 밥먹듯이 했고, 당연히 이러한 과정에서는 극심한 민간인 사살과 피해를 불러왔다.베트남에서 침략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후일 아메리칸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연하는 자리에서 베트남인 380만 명이 사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출처: 진보위키 베트남 전쟁 문서 5.1문단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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