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정권, 매판자본만의 고도성장과 민중수탈 : 한국현대사 34 >
“한국에서의 제국주의의 수탈은 극히 불평등하게 이루어졌다. 제국주의의 수탈과정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며 더욱 살이 찌는 소수의 특권층과 장래 희망 없이 오로지 장시간 노동과 극심한 빈곤만 강요당하는 대다수 민중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소수의 특권층이란 매판재벌과 넓은 의미에서의 권력집단이다. 이들은 상호 공생관계이면서 동시에 미국과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매판재벌 대다수는 외국자본과 직접 결탁한 상태에서 해외에서 값비싼 부품과 원료를 수입하여 가공한 뒤 헐값으로 해외에 내다파는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였다. 그 과정은 개별 기업과 국가에 이익은 남지 않고 제국주의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셈이었다.매판자본이 제국주의의 이익에 봉사하면서 자신의 몫까지 차지하기 위해서는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18년간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시종일관 제국주의, 친일파 정치권력, 매판자본 3자 간의 공모 하에 민중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온갖 수단들이 총동원되었다.민중수탈을 위해 집중적으로 추구된 것은 노동자의 임금 수준을 최대한으로 낮추는 것인데, 사무직과 서비스직을 포함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저임금의 강요와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농민의 몰락이었다. 임금 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으로 몰락한 농민은 대거 대도시로 쫒겨나 임금 상승을 압박하는 대규모 실업자군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농민의 몰락은 이미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에 의해서 시작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끊이지 읺고 계속되었다.이같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은 미공법 480호(PL480)가 중단된 1971년부터는 유상판매로 바뀌었는데, 잉여농산물을 단순히 저임금 창출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장사를 위한 상품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였다.이러한 식량도입 비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증가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1980~198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미국의 잉여농산물 구입에 충당된 자금은 6조 3,280억 원에 달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매년 수입액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미국 농산물 수입국 중 세계에서 네번째였다.[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원조와 차관, 그리고 직합작투자 등 미국이 이 땅에 진출시킨 모든 형태의 수탈방법이 그러했듯이 잉여농산물의 원조와 판매 역시 남한의 예속정권에 대한 매수행위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되었다.예컨대 미하원 윤리위원회의 폭로에 의하면 박 정권은 하수인인 박동선을 통해 1969년부터 1976년 1월까지 미국 쌀의 도입댓가로 920만 4,815달러의 뇌물을 제공받았다.[남북한 비교연구, 마크 셀던]이같은 매수행위는 미국의 식량상인뿐 아니라 미국 정부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1970년 미국 정부는 박정권이 유리한 조건으로 일본 쌀을 수입하려 하자 군사무기 도입으 연계시켜 압력을 넣어 포기시킨 후 2,400만 달러의 개발차관을 재공받기도 했던 것이다.[프레이저 보고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그런데 미국에 의해 제공된 이같은 매수자금조차 교묘한 방법을 통해 남한의 부담으로 떠넘겨졌다. 그것은 식량도입을 위한 계약과정에서 도입가격을 실제 가격보다 높게 책정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한때 국제가격보다 38%나 높은 가격으로 미국 쌀이 도입되어 문제를 일으킨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남한의 농업에 미친 영향은 가히 파멸적인 것이었다. 농산물 가격을 하락을 불러오고 수지가 맞지 않는 농민은 작물의 재배를 포기했다. 그러면 재배를 포기한 작물은 미국 농산물로 대체되었다.이런 과정을 통해 농산물의 자급율은 해마다 떨어져 1981년에 이르러서는 식량의 자급도가 43.2%에 불과하게 되었고, 밀과 옥수수 등은 거의 전량 미국에서 수입하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식량 자급도의 하락은 농민들로 하여금 계속 수입이 곤란한 특정 작물, 예를 들어 채소 등의 재배에 몰리게 만들었고 이는 걸핏하면 과잉생산으로 인한 채소값 폭락현상을 야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이처럼 전반적인 농산물 가격 하락과 재배 작물의 제한성은 농민들에게 계속되는 적자만을 안겨주었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농가부채의 누적을 초래하였다. 농가부채 상환을 위해 농민들은 농지를 팔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토지가 없거나 부족한 소작농을 양산시켰다.
농촌파탄이 초래한 가장 심각한 결과는 대규모 이농현상이었다. 이농현상은 전국이서 전개되었지만 전통적 농업지억이면서도 공업화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호남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그러나 농촌애서 쫒겨나 도시로 몰려든 이들 농민에게 새로운 직장과 거주지가 기다리고 있는 않았다. 당연하게도...
1962년부터 1977년까지 약 700~750만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갔는데 같은 시기에 공업부문애서 고용된 사람은 150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결국 6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고도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본래의 터전에서 쫒겨나 도시의 거리로 내팽개쳐진 것이다.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영세소기업과 상업, 서비스 분야에서 봉건시대의 종처럼 장시간 저임금 상태로 취업해 있거나 막노동과 노점 행상을 통해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뿐이었다. 도시빈민이 본격 탄생한 것이다.
또 이들은 마땅한 주거지가 없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도시의 주번 지역에 판자집을 짓고 살았는데 1970년대 중반의 서울 인구의 1/3에서 1/5에 해당하는 100~300만 명이 판자촌 주민이었다.[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이처럼 농민의 몰락과 몰락애 따른 실업자의 양산은 즉각적으로 취업경쟁을 야기하고 그로 인해 임금과 노동조건은 최악의 상태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대규모 실업자의 존재가 그 자체만 가지고 임금의 저하와 노동조건 악화를 초래하는 건 아니다. 정치권력이 노동자의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파업의 자유를 제약한 것이다.박 정권은 등장하면서부터 전적으로 매판 자본가의 편에 서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억압기구를 총동원하여 투쟁에 일서선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쫒고, 노동자의 단결의지에 찬물을 끼얹으며 헌신적인 노동운동가를 불순분자로 매도하여 체포 구금하는 등의 탄압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상과 같은 조건 하에서 미국 노동자의 1/12에 해당하는 저임금,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고의 산업재해를 자랑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악랄한 수탈이 자행되었는데, 이로 인해 우리 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상태에 관해서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러나 박 정권과 매판자본들의 노동현장에서의 수탈로 만족하지 않고 일단 지급된 노동자의 임금을 포함한 민중의 소득을 재차 강탈하는 과정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추가적인 수탈은 크게 독점가곡에 의한 수탈과 정부의 지원에 의한 금융,조세 상의 수탈로 나눌 수 있다.정치권력에 의한 수탈은 특히 자체의 힘만으로는 이윤 획득이 곤란한 매판 수출기업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갖가지 방법을 총동원하여 민중의 재산을 가로채 이를 수출기업에 건네줌으로써 적자수출로 인한 손실을 보충해주고 아울러 이윤까지도 보장해주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기업 설립시의 지원과 유사한 성격의 혜택을 제공하였다. 이는 관세를 포함한 세금감면 혜택, 수출기업에 대한 융자우대책, 정부주도의 수출자유지역이나 수출공업단지의 개발, 수출보조금 제공 등이다.[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방법들은 물가 상승, 세금부담의 증가, 사채이자의 가중 등의 형태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그 부담이 민중의 어깨 위로 전가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민중의 고혈로써 매판자본을 살찌우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같은 사실은 민중이 겪어야 하는 과중한 세금부담의 실상 하나만을 보아도 쉽게 증명이 되는데, 사진에서 보듯이 한국의 세금구조는 그 부담다가 민중일 수밖에 없는 간접세 중심으로 되어 있고 직접세마저도 기업이 아닌 가계가 중심이 되어 있다.
정부의 지원에 의한 수탈과 더불어 민중에 대한 매판자본의 추가적인 수탈은 국내시장에서 자기들의 제품을 독점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1979년 종업원 수 500인 이상 대기업은 총 사업체 수의 약 2%에 불과함에도 전체 종업원수와 부가가치액은 전체의 43.5%와 54.4%로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한국사회의 재인식, 변형윤 외]그 결과 1977년 이후 3개의 대기업이 전체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즉 독점가격 형서이 가능한 품목이 무려 90% 수준에 육박하게 되었다.[해방 40년의 재인식 II] 예를 들면 해외에 10만 원대로 파는 컬러티비를 국내에서는 30만 원대에 판매했다.
이상과 같이 정치권력과 공모 하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민중수탈을 지행한 결과 남한의 매판재벌은 제국주의에 의한 엄청난 수탈의 와중에도 상당한 폭리를 취하게 되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소수 특권층과 다수 민중 사이에 심각한 빈부격차를 심회시켰다.
박정희 일당은 1980년대 이후에는 빈부격차가 해소될 것이라 주장했지만, 1980년 현재 소득 수준 상위 20%의 가구가 전체 소득의 45.4%를 차지한 대신 하위 40%는 불과 16.1%에 불과하였다는 점에서 사기라고 할 수 있다. (p.173~185)
-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휴전에서 10.26까지 > 중에서..
“한국에서의 제국주의의 수탈은 극히 불평등하게 이루어졌다. 제국주의의 수탈과정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며 더욱 살이 찌는 소수의 특권층과 장래 희망 없이 오로지 장시간 노동과 극심한 빈곤만 강요당하는 대다수 민중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소수의 특권층이란 매판재벌과 넓은 의미에서의 권력집단이다. 이들은 상호 공생관계이면서 동시에 미국과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매판재벌 대다수는 외국자본과 직접 결탁한 상태에서 해외에서 값비싼 부품과 원료를 수입하여 가공한 뒤 헐값으로 해외에 내다파는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였다. 그 과정은 개별 기업과 국가에 이익은 남지 않고 제국주의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셈이었다.매판자본이 제국주의의 이익에 봉사하면서 자신의 몫까지 차지하기 위해서는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18년간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시종일관 제국주의, 친일파 정치권력, 매판자본 3자 간의 공모 하에 민중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온갖 수단들이 총동원되었다.민중수탈을 위해 집중적으로 추구된 것은 노동자의 임금 수준을 최대한으로 낮추는 것인데, 사무직과 서비스직을 포함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저임금의 강요와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농민의 몰락이었다. 임금 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으로 몰락한 농민은 대거 대도시로 쫒겨나 임금 상승을 압박하는 대규모 실업자군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농민의 몰락은 이미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에 의해서 시작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끊이지 읺고 계속되었다.이같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은 미공법 480호(PL480)가 중단된 1971년부터는 유상판매로 바뀌었는데, 잉여농산물을 단순히 저임금 창출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장사를 위한 상품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였다.이러한 식량도입 비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증가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1980~198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미국의 잉여농산물 구입에 충당된 자금은 6조 3,280억 원에 달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매년 수입액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미국 농산물 수입국 중 세계에서 네번째였다.[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원조와 차관, 그리고 직합작투자 등 미국이 이 땅에 진출시킨 모든 형태의 수탈방법이 그러했듯이 잉여농산물의 원조와 판매 역시 남한의 예속정권에 대한 매수행위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되었다.예컨대 미하원 윤리위원회의 폭로에 의하면 박 정권은 하수인인 박동선을 통해 1969년부터 1976년 1월까지 미국 쌀의 도입댓가로 920만 4,815달러의 뇌물을 제공받았다.[남북한 비교연구, 마크 셀던]이같은 매수행위는 미국의 식량상인뿐 아니라 미국 정부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1970년 미국 정부는 박정권이 유리한 조건으로 일본 쌀을 수입하려 하자 군사무기 도입으 연계시켜 압력을 넣어 포기시킨 후 2,400만 달러의 개발차관을 재공받기도 했던 것이다.[프레이저 보고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그런데 미국에 의해 제공된 이같은 매수자금조차 교묘한 방법을 통해 남한의 부담으로 떠넘겨졌다. 그것은 식량도입을 위한 계약과정에서 도입가격을 실제 가격보다 높게 책정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한때 국제가격보다 38%나 높은 가격으로 미국 쌀이 도입되어 문제를 일으킨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남한의 농업에 미친 영향은 가히 파멸적인 것이었다. 농산물 가격을 하락을 불러오고 수지가 맞지 않는 농민은 작물의 재배를 포기했다. 그러면 재배를 포기한 작물은 미국 농산물로 대체되었다.이런 과정을 통해 농산물의 자급율은 해마다 떨어져 1981년에 이르러서는 식량의 자급도가 43.2%에 불과하게 되었고, 밀과 옥수수 등은 거의 전량 미국에서 수입하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식량 자급도의 하락은 농민들로 하여금 계속 수입이 곤란한 특정 작물, 예를 들어 채소 등의 재배에 몰리게 만들었고 이는 걸핏하면 과잉생산으로 인한 채소값 폭락현상을 야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이처럼 전반적인 농산물 가격 하락과 재배 작물의 제한성은 농민들에게 계속되는 적자만을 안겨주었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농가부채의 누적을 초래하였다. 농가부채 상환을 위해 농민들은 농지를 팔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토지가 없거나 부족한 소작농을 양산시켰다.
농촌파탄이 초래한 가장 심각한 결과는 대규모 이농현상이었다. 이농현상은 전국이서 전개되었지만 전통적 농업지억이면서도 공업화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호남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그러나 농촌애서 쫒겨나 도시로 몰려든 이들 농민에게 새로운 직장과 거주지가 기다리고 있는 않았다. 당연하게도...
1962년부터 1977년까지 약 700~750만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갔는데 같은 시기에 공업부문애서 고용된 사람은 150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결국 6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고도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본래의 터전에서 쫒겨나 도시의 거리로 내팽개쳐진 것이다.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영세소기업과 상업, 서비스 분야에서 봉건시대의 종처럼 장시간 저임금 상태로 취업해 있거나 막노동과 노점 행상을 통해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뿐이었다. 도시빈민이 본격 탄생한 것이다.
또 이들은 마땅한 주거지가 없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도시의 주번 지역에 판자집을 짓고 살았는데 1970년대 중반의 서울 인구의 1/3에서 1/5에 해당하는 100~300만 명이 판자촌 주민이었다.[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이처럼 농민의 몰락과 몰락애 따른 실업자의 양산은 즉각적으로 취업경쟁을 야기하고 그로 인해 임금과 노동조건은 최악의 상태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대규모 실업자의 존재가 그 자체만 가지고 임금의 저하와 노동조건 악화를 초래하는 건 아니다. 정치권력이 노동자의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파업의 자유를 제약한 것이다.박 정권은 등장하면서부터 전적으로 매판 자본가의 편에 서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억압기구를 총동원하여 투쟁에 일서선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쫒고, 노동자의 단결의지에 찬물을 끼얹으며 헌신적인 노동운동가를 불순분자로 매도하여 체포 구금하는 등의 탄압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상과 같은 조건 하에서 미국 노동자의 1/12에 해당하는 저임금,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고의 산업재해를 자랑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악랄한 수탈이 자행되었는데, 이로 인해 우리 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상태에 관해서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러나 박 정권과 매판자본들의 노동현장에서의 수탈로 만족하지 않고 일단 지급된 노동자의 임금을 포함한 민중의 소득을 재차 강탈하는 과정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추가적인 수탈은 크게 독점가곡에 의한 수탈과 정부의 지원에 의한 금융,조세 상의 수탈로 나눌 수 있다.정치권력에 의한 수탈은 특히 자체의 힘만으로는 이윤 획득이 곤란한 매판 수출기업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갖가지 방법을 총동원하여 민중의 재산을 가로채 이를 수출기업에 건네줌으로써 적자수출로 인한 손실을 보충해주고 아울러 이윤까지도 보장해주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기업 설립시의 지원과 유사한 성격의 혜택을 제공하였다. 이는 관세를 포함한 세금감면 혜택, 수출기업에 대한 융자우대책, 정부주도의 수출자유지역이나 수출공업단지의 개발, 수출보조금 제공 등이다.[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방법들은 물가 상승, 세금부담의 증가, 사채이자의 가중 등의 형태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그 부담이 민중의 어깨 위로 전가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민중의 고혈로써 매판자본을 살찌우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같은 사실은 민중이 겪어야 하는 과중한 세금부담의 실상 하나만을 보아도 쉽게 증명이 되는데, 사진에서 보듯이 한국의 세금구조는 그 부담다가 민중일 수밖에 없는 간접세 중심으로 되어 있고 직접세마저도 기업이 아닌 가계가 중심이 되어 있다.
정부의 지원에 의한 수탈과 더불어 민중에 대한 매판자본의 추가적인 수탈은 국내시장에서 자기들의 제품을 독점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1979년 종업원 수 500인 이상 대기업은 총 사업체 수의 약 2%에 불과함에도 전체 종업원수와 부가가치액은 전체의 43.5%와 54.4%로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한국사회의 재인식, 변형윤 외]그 결과 1977년 이후 3개의 대기업이 전체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즉 독점가격 형서이 가능한 품목이 무려 90% 수준에 육박하게 되었다.[해방 40년의 재인식 II] 예를 들면 해외에 10만 원대로 파는 컬러티비를 국내에서는 30만 원대에 판매했다.
이상과 같이 정치권력과 공모 하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민중수탈을 지행한 결과 남한의 매판재벌은 제국주의에 의한 엄청난 수탈의 와중에도 상당한 폭리를 취하게 되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소수 특권층과 다수 민중 사이에 심각한 빈부격차를 심회시켰다.
박정희 일당은 1980년대 이후에는 빈부격차가 해소될 것이라 주장했지만, 1980년 현재 소득 수준 상위 20%의 가구가 전체 소득의 45.4%를 차지한 대신 하위 40%는 불과 16.1%에 불과하였다는 점에서 사기라고 할 수 있다. (p.173~185)
-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휴전에서 10.26까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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