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의 기적'의 진실 - 더욱 교묘해진 제국주의적 수탈 : 한국현대사 33 >
"미국의 직접적인 주도 하에 이루어진 이른바 경제개발이 최우선적으로 역점을 둔 것은 '매판자본'의 육성이었다. 미국이 매판자본의 육성에 우선 힘을 기울인 것은 지난날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던 때와는 사회역사적인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지난날 일본은 스스로의 자본축적의 정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을 자신들에 대한 경쟁상대로 보면서 이를 극력 저지하였다. 다만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하의 필요성에 의해 제한된 공업화를 자신들이 직접 장악한 가운데 추진하였을 뿐이다.그러나 미국이 남한을 지배하면서부터는 여러모로 사정이 달라졌다. 우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농업과 원자재 산업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남한을 식량과 공업원료의 공급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남아도는 자신들의 식량과 공업원료를 처리하는 판매시장으로 만들어야 했다.이와 함께 양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면서 급속히 발전된 독점자본주의가 임금상승 등 여러가지 곤란을 겪게 되자 미국은 이러한 곤란에서 벗어나 보다 안전하고 저렴하게 상품생산을 해낼 곳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남한은 이에 적합한 나라로 떠오른 것이다.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은 남한에서의 자본주의적 공업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자본주의적 공업화는 과거 일제 시대처럼 제국주의가 모든 것을 직접 장악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기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그같은 노골적인 수탈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을 만큼 반제국주의의 역량이 비상하게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비록 남한의 민중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조직적인 투쟁역량에서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치열한 투쟁의 시기를 거친 경험이 있었기에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풍부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나아가 민족의 나머지 절반인 이북에서의 자립적인 공업화의 성공은 그것이 지닌 대비효과로 인해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수탈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이같은 요인으로 인하여 미국은 겉으로는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는 듯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해 낼 수 있는 보다 교묘한 방식이 필요하게 되었다.그 교묘한 방식이 바로 매판자본을 육성하여 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매판자본을 육성함에 있어 사용된 수단은 크게 차관과 정부의 금융지원으로 구성되었다.미국과 일본에 의해서 제공된 차관은 화폐가 아닌 현물 방식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차관은 상품의 외상거래와 사실상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특히 1960년대 이후 남한에 제공된 차관은 순수한 경제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즉 미국은 차관공급의 댓가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요구하였고 일본은 차관공급을 남한에 대한 새로운 지배의 길을 여는 국교정상화의 미끼로 사용하였다.차관 액수는 1959년~1975년 사이에 들어온 외국자본 총액 89억 8천만 달러 중에서 약 90%가 차관이었다. 차관은 1960년대 이후 나타난 고도경제성장정책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동원된 투자재원 중에서 차관을 중심으로 한 외국자본이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경제성장에서 외국자본의 역할은 2,3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외국자본에 의한 연평균 경제성장율이 4.1%, 4.8%에 이르렀다. 이를 제외한 경제성장율은 대략 5% 정도가 되는데 이는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서 결국 고도성장의 비밀이란 다름아닌 외국자본의 대대적인 유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한국경제의 관점, 이내영]
그렇다면 차관은 어떻게 매판자본을 육성해 냈는가?차관은 하나의 기업이 세워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남한 내에서는 조달이 불가능한 요소들(미국은 1945년 강제 점령 이후 원조와 잉여농산물 등으로 한국 내 자립적인 기술축적과 원료공급 능력을 이미 철저히 말살시켰다.)을 외상으로 공급해주기 위한 것이었다.말할 필요도 없이 이렇게 공급되는 기술과 원료는 지난날 미국의 원조에 기생하여 성장해 온 매판자본의 손에 건네졌다. 이에 발맞추어 남한 정부는 공장부지의 마련과 노동자의 고용에 필요한 추가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이같은 자금조달은 재정지원과 은행대출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조세부담의 가중과 물가상승이라는 경로를 통해 최종적으로 그 부담이 일반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겨지는 것이었다.결국 남한 정부는 민중의 재산을 강제로 가로챈 뒤 이를 매판기업의 설립 및 확장에 사용한 셈이었다.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매판기업이 쉽게 창설되거나 규모가 확장되었는데, 대표적인 매판기업의 하나가 바로 삼성그룹의 주력 업종에 해당하는 제일합섬이었다. 제일합섬은 공장의 건설을 위해 차관 350만 달러, 외화대출 650만 달러, 그리고 70~80억원의 은행융자 및 사채를 이용했다. 자기자금의 투입은 겨우 17억원 뿐이었다.
[1950년대의 인식, 진덕규 외]
미국과 일본이 차관을 통해 공급한 공장설비는 대부분 임금상승에 의해 수지가 안맞거나 새로운 기술개발로 인해 사양화된 것, 그리고 심각한 공해발생 때문에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고 있는 업종들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고철덩어리와 다름없는 것들을 정확히 이자까지 붙여 팔아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엄청난 이득을 본 셈이었다. 이렇게 하여 남한은 미국과 일본의 낡은 자본을 위한 연명처이자 부패한 자본의 도피처가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낡고 부패한 업종을 이전시키면서도 미국과 일본은 핵심적인 기술만은 자기들 손에 움켜쥔 채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이는 독점기술로 자신들의 제품을 계속 팔아먹기 위한 의도였다.이로 인해서 남한 경제가 성장할수록 기술의 해외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은 기계생산의 자립화를 추구한다고 했던 1970년대조차 국산기계 사용율이 1973년 33.1%, 1975년 32.9%, 1978년 28.9%, 1979년 25%로 게속 낮아지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민족분단과 통일문제, 김병오]
경제의 예속화는 기술뿐만이 아니었다. 일단 차관을 도입하게 되면 머지 않아 이것을 갚기 위해, 그리고 기계부품과 원료를 해외에서 구입하기 위해 달러가 필요하게 된다. 이처럼 '없어서는 안되는'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서는 수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출은 민중의 빈곤화와 구매력 저하로 인해 국내시장이 협소해짐으로써 더욱 불가피한 것으로 되었다.이러한 맥락에서 1960년대에 막을 올린 고도성장정책은 곧 수출지상주의를 낳게 되었다.그러나 수출마저도 딜레마인 것이, 수출을 위한 제품 역시 외국의 기계와 원료로 만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수출의 증가는 자연히 그에 상응하는 수입의 증가를 유발시키게 된 것이다.결국 수출과 수입의 비중이 동시에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수출은 헐값, 수입은 독점가격 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입을 수출보다 더 큰 폭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예컨대 1968년의 수출은 5억 달러(전년대비 37.5% 증가)에 수입은 14억 7천만 달러(전년대비 47.4% 증가)였다.[1960년대, 김성환]
아울러 국민총생산 중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계속 증가하게 되어 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 수출과 수입의존도는 각각 5.0%와 16.6%였으나, 1970년에는 각각 14.3%와 24%로, 1980년에는 31.5%와 41.2%로 계속 증가했다.[민족분단과 통일문제, 김병오]
이처럼 무역의존도가 높아지고 수입과 수출간의 간격이 확대됨으로 인해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수입이 수출보다 항상 많게 되자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달러만으로는 외화의 상환은 고사하고 당장 필요한 수입조차 곤란해지게 되었다.결국 부족한 달러를 메우기 위해 계속 외국빚을 얻어와야만 하는 결론이 내려졌고 급기야 외채가 1980년 500억 달러라는 놀라운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미국은 일본을 대동하고서 차관을 무기로 매판자본을 육성하고 이를 통해 국가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자본, 기술, 시장 모두를 자신의 수중에 끌어들이고 이를 확실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같은 장악은 직합작투자에 의해 보다 확고한 것이 되었다. 직합작투자로의 전환은 이미 차관공급 과정에서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것으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먼저 박정희 정권은 1962년 6월 '외자도입 촉진법'을 제정하여 차관공급의 댓가로 모든 형태의 외국자본에게 한국경제의 진출을 허용했다. 외국자본 비율만 50% 이내로 제한하였을 뿐이다.
이리하여 미국과 일본의 자본이 직접 진출하게 되었고 외국자본과의 합작투자에 의해 최초로 울산정유공장이 건설되게 되었다. 울산정유공장은 1964년 미국 거대 석유회사 걸프가 주식의 48%를 차지하는 조건으로 석유공사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기술과 시장확보 능력 등으로 사실상 경영권은 걸프사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후에 칼텍스사도 진출하였다.나아가 이들 미국 자본은 주유소 등 유통시장과 함께 나프타 생산과 같은 기초 석유화학 부문을 잠식해 들어감으로써 남한 경제의 밑바탕이자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산업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비슷한 양상이 비료, 섬유, 시멘트 등 중요 산업 분야에서도 빚어지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남한 경제의 골간은 외국자본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여지게 되었다.직접투자는 외국자본 중에서 10% 안팎으로 적었지만 그 진출 분야가 경제 전반의 운명을 좌우하는 성격으로 인해 그것의 비중은 양과 무관하게 절대적이었다. 차관기업의 자체 취약점으로 직합작투자에 의한 외국자본 진출은 점점 늘어났다.
차관기업은 거액의 부채와 낙후된 기술로 인해 쉽게 부실화되었는데 이들 기업들은 그같은 곤란을 결국 외국자본의 유치로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예를 들어 1969년에 설립된 제일모직 경산공장은 경영부실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의 도레미쓰이물산의 출자를 받아 차관기업에서 합작회사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같은 양상은 개별기업 수준에 그치지 않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즉 무리한 차관도입과 계속되는 무역수지의 적자와 그에 따른 외채부담의 증가라는 곤란을 타개하기 위해, 상환부담이 없으며 달러 부족과 시장확보의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외국자본의 직합작투자를 보다 적극적으로 유도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박정희 정권은 1969년 이후부터는 그동안 지켜왔던 49% 투자상한선마저 철폐하고 외국자본에게 무한대의 투자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전체 경제에서 외국자본이 직접 지해하는 분야가 꾸준히 확대되었다. 그 결과 석유, 자동차, 전기, 섬유, 의료, 시멘트, 유리, 알리미늄, 컴퓨터, 플라스틱 등 중심적인 산업의 대부분이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외국자본의 직접적인 비해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적 수탈의 경로와 방법은 무엇이었을까?미국과 일본의 남한에 대한 경제적 수탈은 크게 차관대부를 통한 수탈, 불평등 무역을 통한 수탈, 그리고 직합작투자에 의한 수탈로 나눌 수 있다. 1960년대 초기 개발차관은 이자가 대체로 싼 편이었으나 무역수지 확대와 외채누적으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이자가 싼 차관은 줄어들고 이자가 비싼 단기성차관, 금융차관, 변동금리차관이 대체하였다.결국 고리대금업자나 대부업체처럼 값싼 차관은 미끼였던 셈이다. 이로 인해 1980년대 이후부터는 매년 국민총샌산의 거의 10%나 되는 경제잉여가 차관에 대한 원리금 상환으로 지출되어야만 했다. 불평등한 무역을 통한 수탈은 수출경쟁을 통한 저가 수출과 고가의 수입품으로 발생하였다. 미국은 아시아와 중남미 국가들에게 한국처럼 원조와 차관, 투자를 통해 노동집약적 경제구조를 만들어내었고, 한국은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수출하기 위해 저가 수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 미국은 이들 개발도상국들을 자신의 안정된 상품시장으로 삼으면서 독점적으로 생산되는 자기들의 상품을 비싼 값으로 팔아먹을 수 있었다.한국의 수출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달러 획득과 재고자금 회수에 대한 강한 압력으로 인해 대부분 '제조원가의 42~59%'에 해당하는 출혈적인 덤핑수출, 적자수출을 관행처럼 유지해 왔다.[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외]
1960~70년대에 매년 한국이 미국 등지에 수출한 금액의 절반 정도는 원가에서 적자를 본 것이고 이 적자는 한국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세금징수를 통한 수출기업 지원으로 메웠다. 수출기업의 경영자와 자본가들은 항상 엄청난 흑자를 누려왔기 때문에 결국 미국과 매판기업의 이익은 한국 민중의 고혈을 짜내 이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입의 경우,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은 남한에 대한 상품공급의 독점적 지배력에 근거한 각종 불평등 계약과 기술독점에 입각한 상품공급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상품을 국제시장 가격보다 15~30% 심지어는 50~200% 이상 비싸게 팔아먹었다.[민족과 경제, 대동 편집부]1960~70년대에 한국이 미국, 일본 등지에서 매년 수입한 금액의 30% 이상의 수익은 추가로 제국주의 독점자본가들이 취했고, 국내에 고가로 수입된 원료와 상품, 기술들은 또다시 독점 매판기업들이 엄청난 독점 마진을 붙여 민중들에게 전가한 것이었으니 도대체 그 금액이 얼마나 될 지 계산하기도 어렵다. 무역수지가 적자냐 흑자냐에 관계없이 남한은 언제나 불평등한 무역을 통해 제국주의에 의한 수탈을 강요받고 있으며 그같은 수탈은 무역의존도가 증가함에 따라 지금까지 계속 확대되어 온 것이다. 직합작투자에 의한 수탈은, 대부분의 외국자본이 진출한 지 5년 만에 투자원금을 회수하였고 1962~1984녀 사이에 지점 설치와 기술 제공에 따른 수익을 포함하여 총 215억 4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이윤을 착복하게 되었다.[한국경제의 관점, 이내영]
이처럼 남한에 진출한 외국기업이 엄청난 폭리를 취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박정희 독재권력의 폭넓은 지원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들 외국자본은 처음 5년간 모든 세금을 면제받았고 이후 3년간도 절반을 면제받았다. 외국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노동3권이 전면 부정됨으로써 극단적인 임금 착취를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이밖에도 설립 당시부터 각종 부대비용을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등 온갖 특혜를 누렸다. 이렇듯 박정희에 의해 엄청난 폭리를 취한 외국자본들은 박정희에게 대한 자금지원을 빈번하게 행했다. 이러한 자금지원은 특히 선거를 전후해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미국계 기업들은 약 850만 달러의 거금을 박정희에게 제공했다. [프레이저 보고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이외에도 일본 무역회사 미쓰비시, 미쓰이 등은 1971~1973년 250만 달러, 미국 걸프사는 1966년 100만 달러를 공화당에게 제공했다. 미국 상원의원 처치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이 박정희에게 제공한 뇌물은 총 2,500만~3,000만 달러에 달하였다.[프레이저 보고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1975년 5월 16일 미국 상원 다국적기업조사소위원회가 마련한 청문회에서 클라크 상원의원을 질문과 걸프 석유회사 사장 봅 도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클라크 상원의원 : 한국의 민주공화당은 1971년 선거에서 겨우 51%의 득표로 이겼습니다. 당신들의 정치헌금이 그런 표차를 만들어 공화당을 이기게 한 것으로 보는데,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요?봅 도시 : 통계적으로는 의원의 말씀이 맞다고 인정합니다.'[국가안전기획부, 조갑제]
이상과 같이 미국과 일본은 차관을 미끼로 남한의 경제를 교묘하게 자신들의 수중으로 끌어들이면서 광범위한 수탈을 자행하여 왔다. 제국주의에 의한 수탈이야말로 이 땅의 민중들이 그토록 장시간의 혹독한 노동에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곤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궁극적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p.161~172)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휴전에서 10.26까지 > 중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주도 하에 이루어진 이른바 경제개발이 최우선적으로 역점을 둔 것은 '매판자본'의 육성이었다. 미국이 매판자본의 육성에 우선 힘을 기울인 것은 지난날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던 때와는 사회역사적인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지난날 일본은 스스로의 자본축적의 정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을 자신들에 대한 경쟁상대로 보면서 이를 극력 저지하였다. 다만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하의 필요성에 의해 제한된 공업화를 자신들이 직접 장악한 가운데 추진하였을 뿐이다.그러나 미국이 남한을 지배하면서부터는 여러모로 사정이 달라졌다. 우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농업과 원자재 산업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남한을 식량과 공업원료의 공급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남아도는 자신들의 식량과 공업원료를 처리하는 판매시장으로 만들어야 했다.이와 함께 양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면서 급속히 발전된 독점자본주의가 임금상승 등 여러가지 곤란을 겪게 되자 미국은 이러한 곤란에서 벗어나 보다 안전하고 저렴하게 상품생산을 해낼 곳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남한은 이에 적합한 나라로 떠오른 것이다.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은 남한에서의 자본주의적 공업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자본주의적 공업화는 과거 일제 시대처럼 제국주의가 모든 것을 직접 장악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기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그같은 노골적인 수탈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을 만큼 반제국주의의 역량이 비상하게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비록 남한의 민중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조직적인 투쟁역량에서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치열한 투쟁의 시기를 거친 경험이 있었기에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풍부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나아가 민족의 나머지 절반인 이북에서의 자립적인 공업화의 성공은 그것이 지닌 대비효과로 인해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수탈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이같은 요인으로 인하여 미국은 겉으로는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는 듯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해 낼 수 있는 보다 교묘한 방식이 필요하게 되었다.그 교묘한 방식이 바로 매판자본을 육성하여 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매판자본을 육성함에 있어 사용된 수단은 크게 차관과 정부의 금융지원으로 구성되었다.미국과 일본에 의해서 제공된 차관은 화폐가 아닌 현물 방식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차관은 상품의 외상거래와 사실상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특히 1960년대 이후 남한에 제공된 차관은 순수한 경제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즉 미국은 차관공급의 댓가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요구하였고 일본은 차관공급을 남한에 대한 새로운 지배의 길을 여는 국교정상화의 미끼로 사용하였다.차관 액수는 1959년~1975년 사이에 들어온 외국자본 총액 89억 8천만 달러 중에서 약 90%가 차관이었다. 차관은 1960년대 이후 나타난 고도경제성장정책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동원된 투자재원 중에서 차관을 중심으로 한 외국자본이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경제성장에서 외국자본의 역할은 2,3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외국자본에 의한 연평균 경제성장율이 4.1%, 4.8%에 이르렀다. 이를 제외한 경제성장율은 대략 5% 정도가 되는데 이는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서 결국 고도성장의 비밀이란 다름아닌 외국자본의 대대적인 유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한국경제의 관점, 이내영]
그렇다면 차관은 어떻게 매판자본을 육성해 냈는가?차관은 하나의 기업이 세워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남한 내에서는 조달이 불가능한 요소들(미국은 1945년 강제 점령 이후 원조와 잉여농산물 등으로 한국 내 자립적인 기술축적과 원료공급 능력을 이미 철저히 말살시켰다.)을 외상으로 공급해주기 위한 것이었다.말할 필요도 없이 이렇게 공급되는 기술과 원료는 지난날 미국의 원조에 기생하여 성장해 온 매판자본의 손에 건네졌다. 이에 발맞추어 남한 정부는 공장부지의 마련과 노동자의 고용에 필요한 추가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이같은 자금조달은 재정지원과 은행대출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조세부담의 가중과 물가상승이라는 경로를 통해 최종적으로 그 부담이 일반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겨지는 것이었다.결국 남한 정부는 민중의 재산을 강제로 가로챈 뒤 이를 매판기업의 설립 및 확장에 사용한 셈이었다.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매판기업이 쉽게 창설되거나 규모가 확장되었는데, 대표적인 매판기업의 하나가 바로 삼성그룹의 주력 업종에 해당하는 제일합섬이었다. 제일합섬은 공장의 건설을 위해 차관 350만 달러, 외화대출 650만 달러, 그리고 70~80억원의 은행융자 및 사채를 이용했다. 자기자금의 투입은 겨우 17억원 뿐이었다.
[1950년대의 인식, 진덕규 외]
미국과 일본이 차관을 통해 공급한 공장설비는 대부분 임금상승에 의해 수지가 안맞거나 새로운 기술개발로 인해 사양화된 것, 그리고 심각한 공해발생 때문에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고 있는 업종들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고철덩어리와 다름없는 것들을 정확히 이자까지 붙여 팔아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엄청난 이득을 본 셈이었다. 이렇게 하여 남한은 미국과 일본의 낡은 자본을 위한 연명처이자 부패한 자본의 도피처가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낡고 부패한 업종을 이전시키면서도 미국과 일본은 핵심적인 기술만은 자기들 손에 움켜쥔 채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이는 독점기술로 자신들의 제품을 계속 팔아먹기 위한 의도였다.이로 인해서 남한 경제가 성장할수록 기술의 해외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은 기계생산의 자립화를 추구한다고 했던 1970년대조차 국산기계 사용율이 1973년 33.1%, 1975년 32.9%, 1978년 28.9%, 1979년 25%로 게속 낮아지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민족분단과 통일문제, 김병오]
경제의 예속화는 기술뿐만이 아니었다. 일단 차관을 도입하게 되면 머지 않아 이것을 갚기 위해, 그리고 기계부품과 원료를 해외에서 구입하기 위해 달러가 필요하게 된다. 이처럼 '없어서는 안되는'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서는 수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출은 민중의 빈곤화와 구매력 저하로 인해 국내시장이 협소해짐으로써 더욱 불가피한 것으로 되었다.이러한 맥락에서 1960년대에 막을 올린 고도성장정책은 곧 수출지상주의를 낳게 되었다.그러나 수출마저도 딜레마인 것이, 수출을 위한 제품 역시 외국의 기계와 원료로 만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수출의 증가는 자연히 그에 상응하는 수입의 증가를 유발시키게 된 것이다.결국 수출과 수입의 비중이 동시에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수출은 헐값, 수입은 독점가격 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입을 수출보다 더 큰 폭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예컨대 1968년의 수출은 5억 달러(전년대비 37.5% 증가)에 수입은 14억 7천만 달러(전년대비 47.4% 증가)였다.[1960년대, 김성환]
아울러 국민총생산 중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계속 증가하게 되어 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 수출과 수입의존도는 각각 5.0%와 16.6%였으나, 1970년에는 각각 14.3%와 24%로, 1980년에는 31.5%와 41.2%로 계속 증가했다.[민족분단과 통일문제, 김병오]
이처럼 무역의존도가 높아지고 수입과 수출간의 간격이 확대됨으로 인해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수입이 수출보다 항상 많게 되자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달러만으로는 외화의 상환은 고사하고 당장 필요한 수입조차 곤란해지게 되었다.결국 부족한 달러를 메우기 위해 계속 외국빚을 얻어와야만 하는 결론이 내려졌고 급기야 외채가 1980년 500억 달러라는 놀라운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미국은 일본을 대동하고서 차관을 무기로 매판자본을 육성하고 이를 통해 국가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자본, 기술, 시장 모두를 자신의 수중에 끌어들이고 이를 확실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같은 장악은 직합작투자에 의해 보다 확고한 것이 되었다. 직합작투자로의 전환은 이미 차관공급 과정에서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것으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먼저 박정희 정권은 1962년 6월 '외자도입 촉진법'을 제정하여 차관공급의 댓가로 모든 형태의 외국자본에게 한국경제의 진출을 허용했다. 외국자본 비율만 50% 이내로 제한하였을 뿐이다.
이리하여 미국과 일본의 자본이 직접 진출하게 되었고 외국자본과의 합작투자에 의해 최초로 울산정유공장이 건설되게 되었다. 울산정유공장은 1964년 미국 거대 석유회사 걸프가 주식의 48%를 차지하는 조건으로 석유공사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기술과 시장확보 능력 등으로 사실상 경영권은 걸프사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후에 칼텍스사도 진출하였다.나아가 이들 미국 자본은 주유소 등 유통시장과 함께 나프타 생산과 같은 기초 석유화학 부문을 잠식해 들어감으로써 남한 경제의 밑바탕이자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산업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비슷한 양상이 비료, 섬유, 시멘트 등 중요 산업 분야에서도 빚어지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남한 경제의 골간은 외국자본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여지게 되었다.직접투자는 외국자본 중에서 10% 안팎으로 적었지만 그 진출 분야가 경제 전반의 운명을 좌우하는 성격으로 인해 그것의 비중은 양과 무관하게 절대적이었다. 차관기업의 자체 취약점으로 직합작투자에 의한 외국자본 진출은 점점 늘어났다.
차관기업은 거액의 부채와 낙후된 기술로 인해 쉽게 부실화되었는데 이들 기업들은 그같은 곤란을 결국 외국자본의 유치로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예를 들어 1969년에 설립된 제일모직 경산공장은 경영부실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의 도레미쓰이물산의 출자를 받아 차관기업에서 합작회사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같은 양상은 개별기업 수준에 그치지 않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즉 무리한 차관도입과 계속되는 무역수지의 적자와 그에 따른 외채부담의 증가라는 곤란을 타개하기 위해, 상환부담이 없으며 달러 부족과 시장확보의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외국자본의 직합작투자를 보다 적극적으로 유도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박정희 정권은 1969년 이후부터는 그동안 지켜왔던 49% 투자상한선마저 철폐하고 외국자본에게 무한대의 투자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전체 경제에서 외국자본이 직접 지해하는 분야가 꾸준히 확대되었다. 그 결과 석유, 자동차, 전기, 섬유, 의료, 시멘트, 유리, 알리미늄, 컴퓨터, 플라스틱 등 중심적인 산업의 대부분이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외국자본의 직접적인 비해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적 수탈의 경로와 방법은 무엇이었을까?미국과 일본의 남한에 대한 경제적 수탈은 크게 차관대부를 통한 수탈, 불평등 무역을 통한 수탈, 그리고 직합작투자에 의한 수탈로 나눌 수 있다. 1960년대 초기 개발차관은 이자가 대체로 싼 편이었으나 무역수지 확대와 외채누적으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이자가 싼 차관은 줄어들고 이자가 비싼 단기성차관, 금융차관, 변동금리차관이 대체하였다.결국 고리대금업자나 대부업체처럼 값싼 차관은 미끼였던 셈이다. 이로 인해 1980년대 이후부터는 매년 국민총샌산의 거의 10%나 되는 경제잉여가 차관에 대한 원리금 상환으로 지출되어야만 했다. 불평등한 무역을 통한 수탈은 수출경쟁을 통한 저가 수출과 고가의 수입품으로 발생하였다. 미국은 아시아와 중남미 국가들에게 한국처럼 원조와 차관, 투자를 통해 노동집약적 경제구조를 만들어내었고, 한국은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수출하기 위해 저가 수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 미국은 이들 개발도상국들을 자신의 안정된 상품시장으로 삼으면서 독점적으로 생산되는 자기들의 상품을 비싼 값으로 팔아먹을 수 있었다.한국의 수출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달러 획득과 재고자금 회수에 대한 강한 압력으로 인해 대부분 '제조원가의 42~59%'에 해당하는 출혈적인 덤핑수출, 적자수출을 관행처럼 유지해 왔다.[한국경제의 현단계, 김낙중 외]
1960~70년대에 매년 한국이 미국 등지에 수출한 금액의 절반 정도는 원가에서 적자를 본 것이고 이 적자는 한국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세금징수를 통한 수출기업 지원으로 메웠다. 수출기업의 경영자와 자본가들은 항상 엄청난 흑자를 누려왔기 때문에 결국 미국과 매판기업의 이익은 한국 민중의 고혈을 짜내 이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입의 경우,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은 남한에 대한 상품공급의 독점적 지배력에 근거한 각종 불평등 계약과 기술독점에 입각한 상품공급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상품을 국제시장 가격보다 15~30% 심지어는 50~200% 이상 비싸게 팔아먹었다.[민족과 경제, 대동 편집부]1960~70년대에 한국이 미국, 일본 등지에서 매년 수입한 금액의 30% 이상의 수익은 추가로 제국주의 독점자본가들이 취했고, 국내에 고가로 수입된 원료와 상품, 기술들은 또다시 독점 매판기업들이 엄청난 독점 마진을 붙여 민중들에게 전가한 것이었으니 도대체 그 금액이 얼마나 될 지 계산하기도 어렵다. 무역수지가 적자냐 흑자냐에 관계없이 남한은 언제나 불평등한 무역을 통해 제국주의에 의한 수탈을 강요받고 있으며 그같은 수탈은 무역의존도가 증가함에 따라 지금까지 계속 확대되어 온 것이다. 직합작투자에 의한 수탈은, 대부분의 외국자본이 진출한 지 5년 만에 투자원금을 회수하였고 1962~1984녀 사이에 지점 설치와 기술 제공에 따른 수익을 포함하여 총 215억 4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이윤을 착복하게 되었다.[한국경제의 관점, 이내영]
이처럼 남한에 진출한 외국기업이 엄청난 폭리를 취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박정희 독재권력의 폭넓은 지원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들 외국자본은 처음 5년간 모든 세금을 면제받았고 이후 3년간도 절반을 면제받았다. 외국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노동3권이 전면 부정됨으로써 극단적인 임금 착취를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이밖에도 설립 당시부터 각종 부대비용을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등 온갖 특혜를 누렸다. 이렇듯 박정희에 의해 엄청난 폭리를 취한 외국자본들은 박정희에게 대한 자금지원을 빈번하게 행했다. 이러한 자금지원은 특히 선거를 전후해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미국계 기업들은 약 850만 달러의 거금을 박정희에게 제공했다. [프레이저 보고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이외에도 일본 무역회사 미쓰비시, 미쓰이 등은 1971~1973년 250만 달러, 미국 걸프사는 1966년 100만 달러를 공화당에게 제공했다. 미국 상원의원 처치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이 박정희에게 제공한 뇌물은 총 2,500만~3,000만 달러에 달하였다.[프레이저 보고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1975년 5월 16일 미국 상원 다국적기업조사소위원회가 마련한 청문회에서 클라크 상원의원을 질문과 걸프 석유회사 사장 봅 도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클라크 상원의원 : 한국의 민주공화당은 1971년 선거에서 겨우 51%의 득표로 이겼습니다. 당신들의 정치헌금이 그런 표차를 만들어 공화당을 이기게 한 것으로 보는데,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요?봅 도시 : 통계적으로는 의원의 말씀이 맞다고 인정합니다.'[국가안전기획부, 조갑제]
이상과 같이 미국과 일본은 차관을 미끼로 남한의 경제를 교묘하게 자신들의 수중으로 끌어들이면서 광범위한 수탈을 자행하여 왔다. 제국주의에 의한 수탈이야말로 이 땅의 민중들이 그토록 장시간의 혹독한 노동에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곤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궁극적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p.161~172)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휴전에서 10.26까지 > 중에서..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