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티토주의 관련해서 찾아보다가 번역해놓은건데 공유하는게 안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 올려봄.
토니 클리프
1958년 7월, Socialist Review
임레 너지(주 - 헝가리의 반스탈린주의 정치가)를 비롯한 헝가리의 반대파들을 사살한 것은 스탈린주의의 피비린내나는 역사의 수많은 오점들 중 하나였다. 기억해야할 사실은 1956년 11월까지 카다르 야노시(주 - 헝가리의 친소파 정치인)는 너지와 그 동료들로 하여금 유고 대사관을 떠나 자택으로 돌아갈 수 있게 통행증을 발급했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루마니아로 호송되었다. 그리고 올해(주 - 1958년) 3월 카다르는 티토에게 '넛지에게 과거 행적을 근거로 어떠한 처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했다. 그리고 지금 그 약속은 배반당했다.
너지는 스탈린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살해당한 공산당 지도부들 중 첫번째도, 아마 유감스럽게도 마지막도 아니다. 1917년의 첫 볼셰비키 정부의 15인 중 오직 1명, 스탈린만이 1930년대의 대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넷은 자연사했으나, 10명은 스탈링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옥사하였다. 139명의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들 중 24명만이 1939년에 살아남았다.
전후 대숙청
'인민민주주의'가 형성된지 얼마 안된 전쟁 직후, 이들 국가들은 지도부에서의 '대숙청'에 휩쓸렸다. '인민민주주의'가 성립된 직후 각 당의 사무총장을 맡은 6명 중 4명은 '반역자' 또는 '파시스트의 주구'로 몰렸는데,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불가리아의 코스토프(처형), 폴란드의 고무카(체포), 체코슬로바키아의 슬란스키(처형)이 그들이다. 각 당의 외무장관 6명 중 4명 또한 그러했는데, 유고슬라비아의 카라델리, 루마니아의 안나 파우커(체포), 체코슬로바키아의 클레멘티스(처형), 헝가리의 라이크(처형)이 그들이다. 이런 식으로 살생부는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다.
흐루시초프는 제20차 당대회에서의 '비밀 연설'에서 스탈린과 베리야에게 숙청의 책임을 지웠다. 또한 베오그라드와 모스크바 사이의 불화의 책임또한 지웠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연설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헝가리 혁명은 진압당했다. 그리고 39년간 공산당의 충실한 당원이었던 너지는 처형당하였다.
너지와 그의 동료들은 결코 크렘린의 정치인들에게 위험분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왜 그들은 처형당하였는가. 가장 즉각적이고 확실하게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다. 넛지는 티토주의자로, 그리고 티토 자신은 '반역자'이자 '제국주의의 주구'로 고발당한 것이다.
'다윗' 티토 대 '골리앗' 소련
왜 크렘린의 정치인들은 티토를 그리도 증오했는가? 무엇이 지난 3달동안 모스크바와 베오그라드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켰는가. 왜 베이징까지 모스크바를 돕는가?(주 - 당시 중-소 관계 또한 좋지 않았다.) 이 갈등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래의 글들은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크렘린의 정치인들은 군말없이 지도자의 명령을 받아들이는데 특화된 자들이다. Vozhd(지도자)는 생산 계확을 명령하고, 관료들을 음지에서 끌어올리고 양지에서 끌어내리며, 교육 정책을 정하고, 무엇이 예술인지를 정하고, 출판을 허가하고 금지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 크렘린의 통치자들의 이 권능은 소국 유고슬라비아에 의해 도전받았다. '다윗' 티토는 '골리앗' 스탈린으로부터 자주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 투쟁을 결심했다.
다른 '인민민주주의' 지도자들과 달리, 티토와 그의 동지들은 러시아군의 지원 없이 스스로 권력을 쟁취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충복 모세 피야데는 '다른 당의 지도자들은...파이프를 꼬나물고 비행기를 타고 해방된 조국에 당도했다. (중략) (주 - 그들은) 4년간 매일 4차례 라디오를 통해 대중들에게 공연히 투쟁을 선동하기만 했지만, 그 동안 우리는 우리 손으로 무기를 들고 자유를 쟁취했다. (후략)'(1948년 7월 10일)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들은 마차시 라코시, 안나 파우커나 러시아의 지방 지도자들에 비해 상대적 우월감을 느낄만 했다. 그리고 소련 공산당의 지도자들과 같은 급으로 올라서길 원했다. 그들은 러시아와 유고가 동등한 대우를 받길 원했으며, 완전한 자치를 하길 원했다.
모스크바의 지배에 맞설 투쟁의 논리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들에게 하여금 스탈린 정권의 실상을 더욱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그 볼썽사나운 모습을 폭로하게 했다. 이를 유고슬라비아 정부로 하여금 대중적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생사가 걸린 질문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서, 이러한 투쟁은 독재로부터 해방하게 하였다. 스탈린의 '중앙관료제'에 맞서, 티토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 했다.
제국의 종말
경제를 시작으로, 행정부는 탈중앙화되었다. 노동자평의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권력이 제한된 상태에서, 그들은 소련 제국 행정부의 권위적 구조(1인 통제 시스템)에 도전해야 했다.
또한, 티토는 농민들에게 모스크바의 정치인들보다 자비로웠다. 그는 소련의 '집산화'가 고립을 자초하였고, 존속이 위태로운 국가를 약화시켰다고 보았다. 그는 외부의 소련이라는 적과 내부의 농민이라는 적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떠한 대규모의 강제 집산화 시도라도 그를 스탈린으로부터의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었다.
문화적 배경에 있어서도, 베오그라드는 모스크바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곳이었다. 두말할 필요없이 양국의 전시회를 가서 보라.(하지만, 질라스의 경우에서 보듯(주 - 티토의 동지인 질라스는 티토 노선에 대해 반발과 비난을 이유로 수감되었다.), 지나치게 이를 과장해서 봐서는 안된다.)
시소 쇼크
티토주의는 소련 제국주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스탈린의 제국이 중부 유럽으로 확장되면서, 전체 구조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티토의 저항은 스탈린주의의 내부 모순을 논란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뒤떨어진 국가가 제국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스탈린주의가 서쪽으로 진격할수록, 러시아 인민들보다 물질적, 문화적으로 앞선, 각자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가졌으며, 외세에 의해 성향이 결정되지 않는 인구는 더 증가하였다. 지금(주 - 1950년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민중들이 민족 해방을 위한 싸움에 눈뜨고 있는 이 시기에는, 민족주의와 민족국가의 요람이 된 유럽의 민중들에게는 제국주의 권력에 굴복할 가능성이 결코 없다.
티토주의는 또한 전체주의 국가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순응주의 체제를 깼다. 릴리풋(주 -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에서 걸리버는 황제가 '고작 자신의 손톱만한데도 궁정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다는 이유만으로 신민들에게 경외시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누군가가 황제만큼 커진다면, 그러한 숭배와 경외는 눈녹듯 사라진다. 이것이 티토의 효과였던 것이다.
왜 모스크바와 베오그라드 사이에 갈등이 터져나오는가?
헝가리 혁명 이래로 크렘린의 정치인들에게 체제를 묶을 강철 고리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위로부터의 양보와 개혁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낳을 것이란 점은 분명해져갔다. 그런 이유로, 헝가리 혁명 직후, 풀라에서 티토가 결정적 연설을 하고(1956년 11월 11일) 소련이 유고에 대한 신용 거래를 동결하면서 모스크바와 베오그라드 사이의 관계는 어느정도 냉각되었다. 그러나, 몇달 지나지 않아, 티토는 (예를 들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면서 경제적 손실을 각오하고 서독과의 외교 관계를 끊는 식으로) 소련과 협상할 준비를 보인다. 모스크바는 살짝 긴장을 풀었고, 소련과의 신용 거래도 풀리게 된다.
이러한 친선과 증오 사이의 시소는 1957년 11월 티토가 12개의 공산당이 지지한 소련 공산당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선언하는 것을 거절하여 모스크바의 패권 앞에 무릎을 꿇길 거부함으로서 치명적인 충격으로 돌아온다. 이후,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선동은 집요해지고 격렬해졌다. 소련과의 신용 거래 역시 다시 동결되었다. 1958년 3월 3일, 러시아의 위성국인 불가리아는 고토 회복을 위해 유고슬라비아를 비난했다. 같은 식으로 알바니아 역시 따라했다. 그리고 이제, 넛지가 처형당한 것이다.
그렇기에 헝가리 혁명은 소련-유고 관계의 변곡점인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모스크바는 위성국들을 강력한 순응주의로 옥죄었고, 그 결과 베오그라드와의 저돌적인 충돌은 필연인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새로운 공격 타이밍을 결정한 요소는 소련에서 흐루시초프 일인 독재의 강화이다.
스탈린이 죽은지 두 달이 안되어, 스탈린주의자와 서구 자본주의 언론들이 소련에서 집단지도체제가 등장할 것을 예고한 것과 달리, Socialist Review는
"소련 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1인 통제의 원리 하에 총체적으로 피라미드 형식으로 구성된다. 공장은 공장장에 의해 운영된다. 공장장은 부서장을 임명한다. 부서장은 조장을 임명한다. 공장장은 국가 기업집단의 사장에 의해 임명되며, 그 집단의 사장은 장관이 임명한다. 그리고 장관은, 명목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수상과 서기장이 임명한다. 스탈린은 일생동안 결정적인 결정들을 내렸다. 최상위 관료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라고, 그리고
"지금의 소련 체제 최상부의 집단지도체제는 그 경제, 사회, 국가 구조와 충돌한다. 이러한 충돌은 오랜 시간동안 존속할 수 없다. 관료제적 국가 자본주의 체제는 심각한 사회적 긴장과 함께 체제가 돌아가기 위해 피의 숙청을 요구한다. 지금의 상층부의 구조는 그렇기에 임시적인 것이다."
라고 보았다. 이 문단은 또한 흐루시초프를 스탈린의 공산당 서기장 직위의 계승자로, 그리고 장차 소련의 독재자로 예측하였다.
흐루시초프의 진전
흐루시초프의 권력 서열 상승은 작년(1957년)들어 급속히 진전되었다.
1953년 프레시디움(구 정치국, 당의 최상위 조직)의 10인 중 오직 3명(흐루시초프, 미코얀, 그리고 보로실로프)만이 남아있다. 나머지는 모두 숙청당한 것이다.
스탈린 사후의 수상 말렌코프는 그의 부수상 4명(베리야, 몰로토프, 불가닌, 그리고 카가노비치)와 함께 숙청당했다.
프레시디움의 현재 위원인 15명 중 11명은 당직자로, 당 구조상 흐루시초프의 밑에 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그러했듯이, 서기장과 수상을 모두 차지하였다.
스탈린 시대에 그러했듯, 언론들은 지도자 흐루시초프의 건축, 예술, 과학, 국제 관계, 농·공업, 교육, 등에 관한 고매하신 발언에 관해 아첨하고, 그의 지혜로우신 말씀을 비굴하게 인용한다.
역사는 새로운 지도자의 역할을 띄우기 위해 다시 쓰여지고 있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스탈린이 죽기 전, 원래대로라면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스탈린의 경이로운 전략 계획에 의해' 패주하였다. 스탈린 사후, 소련의 역사가들과 군부는 이 계획이 스탈린이 아니라 주코프에 의해 계획되었다고 하였다. 주코프가 밀려나자, 이 또한 잘못된 것으로 치부되었고, 주코프도 아닌 흐루시초프가 계획을 세운 것으로 바뀌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지휘한 에레멘코 원수에 의하면, '이 모든 고귀하고 고생스러운 일들(승리를 위한 준비)는 스탈린그라드와 남동부 전선의 전쟁 위원회의 위원이었던 니키타 흐루시초프 동지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누가 수령인지는 볼 것도 없다. '집단' 지도자들이 크렘린에 소련 정보국에 경의를 표하는 연회에 참석했을 때(2월 초), 연설과 함께 터져나온 환호는 철저히 평가되었다. 불가닌은 '환호'로, 보로실로프는 '우레같은 환호'로, 미코얀은 '열정적인 환호'로, 그리고 흐루시초프 자신은 '끝없이 지속되어 갈채로 이어진 환호'로 기록되었다.
흐루시초프는 그의 1인 독재 체제가 성립되자, 스탈린과 같이 공산권에서의 어떠한 반항이나 반론도 거절하고 다만 그에 대해 분노할 뿐이었다.
중국의 역할
마오쩌둥의 중국 또한 이 반유고슬라비아 선전에서 아주 추악한 역할을 맡았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헝가리 혁명이 일어난 이후, 마오쩌둥은 어느정도의 비판을 열어두어 김을 빼는 식으로 민중들에게 어느정도의 양보를 받아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라는 슬로건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이를 추진한지 1달만에 마오쩌둥의 한도를 넘어선 대중적인 비판이 일어났고, 체제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중국 언론에 의한 비판 중 일부를 싣는다. 리스춘은 공안 요원의 수가 '호랑이 터럭만큼 많'고 '가혹하고 혐오스럽다'고 했다. 또한, 난징대학의 학생은 '인사 서류들은 차르가 혁명가들에 그러했듯 통치자의 도구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류청은 '당원들은 비밀 요원이며, 그들은 일제의 요원들보다도 더 가혹하다'고 했다. 칭화대학에서는 수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은 공산주의자들이 '특권층'이자 '파시스트'라고 하였다. 쑤신칭은 '고급 관료들을 특권층으로 만드는 것을 중단하'길 원했다. 또한, 민중의 낮은 생활 수준에 항의하면서, 고베이츠는 모두가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높은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이 누굽니까? 그들은 당원들, 관료들로 과거에는 다 떨어진 신발을 신었지만, 지금은 고급 세단차를 몰고 모직 당복을 입고 다닙니다.' 또한, 추윈산은 '정부 관료는 의무에서 차별받아야지, 혜택에서 차별받아선 안됩니다. 일부는 고위 관료가 되는데에만 혈안이 되어잇습니다. 그들은 식사나 공연 관람에서도 특별석을 차지합니다.'
베이징항공대학의 학생 저우다치오는 공산당 간부로 이루어진 '신계급'에 대해 '재정정책을 좌주하여 많은 특권을 차지'한 '지도계급'이라고 하였다. 난징대학의 조교수 류치셩은 공산당에게 '다시금 중화인민을 해방'해야한다고 했다. 사회학 교수 리칭한은 공산당을 '왼손에는 맑스-레닌주의 교과서를, 오른손에는 소련의 무기를 들고 인민을 통치'한다고 하였다.
백화제방을 실시한지 1달 후, 마오쩌둥을 제외한 모두가 뿌리뽑혀야 할 싹이 되었다. '반동'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기에 마오쩌둥의 티토와 넛지에 대한 증오가 있는 것이다.
베이징의 인민일보는 6월 4일자 보도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실수에 대해 비판한 코민포름이 1948년 내린 결의는 기본적으로 정확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평했다. 그들은 티토주의자를 '변절자의 치욕적 집합'이라 했다.
전투태세
중국 공산당의 최고 이론가인 천포타는 '유고슬라비아의 반동주의는 제국주의적 정책의 결과물'이라는 기사에서 미국 제국주의가 성공적으로 '엄청난 양의 뇌물을 썼고, 티토 무리의 타락'을 몰고 왔다고 평했다.
스탈린주의는 전투태세에 들어간 것이다!
ㅂㅇㅊ
치토...그는 신이야
클리프주의자들이 '대중의 인기'라는 단 하나의 원칙에 입각해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던 수많은 스탈린주의자들과 소부르주아 독재자들에 티토도 끼어있었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