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습’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에는 우익들의 비판만이 아니다. 이른바 ‘좌파’, ‘진보’진영 내에서도 북‘세습’을 둘러싼 치열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기 전에 몇 가지 전제를 말하고자 한다. 먼저 북권력 승계를 둘러싼 논란은 권력변화를 계기로 표출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 사회 성격을 분석하는 것이다. 한 사회에 대한 과학적 성격규정은 과학적이고 역사적이어야 한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논란에서 ‘세습’이라는 규정 자체는 북체제의 권력변화가 봉건제 하에의 왕조세습과 같다는 전제가 함축돼 있다. 지주-소작관계라는 경제관계에 바탕을 둔 상부구조로서의 봉건제와 북사회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과학적이지 못하다.

북사회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이어야 하는데 일제로부터의 해방, 한반도 이남의 일제를 대신한 미군의 진주와 한반도 이북의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 내전과 분단, 사회주의 국가내부에서의 중쏘논쟁과 분열, 미제와 부르주아 정권에 의한 반공산주의 동맹과 제국주의 무력공세와 경제적 압살 정책, 쏘련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북의 고립과 봉쇄의 강화... 북의 사회주의는 이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현재 제기되는 북‘세습’논란은 이러한 역사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없다.
마지막으로 한 사회 성격과 정치 쟁점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역사적이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리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논란은 좌우파 가릴 것 없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극단적인 표현인 반공, 반북주의의 기초 위에서 제기되고 있다.

맑스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은 늘 지배계급의 사상이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우리 사회 지배계급의 사상은 독점자본주의의 사상이다. 우리는 부르주아 체제를 물질적으로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할 뿐만 아니라 반공주의 사상으로 인해 오염된 우리 내부에 뼛속 깊이 침투한 부르주아 사상을 제거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상투쟁이다.
북 권력변화를 둘러싼 논란은 부르주아 의식이 대중들의 사상과 의식에 깊게 뿌리 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부르주아 의식과 사상에 맞서 대중들의 의식을 전위적으로 바꿔나가야 할 임무를 가지고 있는 이른바 좌파, 진보세력 내에조차 뿌리 깊게 부르주아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우익들은 진보진영 내부의 논란을 부추기면서 사상검열을 하고 있다.

3대 세습이란 북한 정권의 변태적 모습이 김씨 왕조의 내막을 만천하에 폭로했다면, 3대 세습과 그 아래 신음하는 북한 동포의 참상을 못 본 체하는 국내 좌파의 모습은 그들이 좌파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린 무늬뿐인 가짜 좌파, 엉터리 좌파라는 점을 온 세상에 알렸다(3대 세습 못 본 체하는 左派는 가짜 左派다, 조선일보 사설, 2010.09.29).      

소부르주아 경향신문이 여기에 발맞춰 “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경향 사설, 2010.0930)라며 민주노동당을 공격했다. 여기에 사이비 좌파와 사이비 진보세력들이 우익과 부르주아에 대한 충성서약을 하듯 우리는 북을 비판하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떠들어대고 있다.

3대 세습은 엎질러진 물이 되어 가고 있고 이 같은 북한의 시대착오적 선택에 대해 진보진영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다. 답답한 일이다. 그렇다고 진보진영이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소한 낯부끄러운 3대 세습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적 시선이 진보진영에까지 확산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남한 진보여,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라」, 프레시안, 2010-09-30).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은 북에 대한 비난이 진보라고 떠들어대지만 주관적 의도와 상관없이 그것은 우익과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자임하는 것이다. 저들이 떠들어 대는 ‘국민들의 비판적 시선’은 바로 반공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국가보안법 논리의 내면화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나 <경향신문>이 언제 북한 세습을 비판하지 않는 진보세력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시키라고 했습니까? 북한의 세습비판과 국가보안법이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손호철, 「北 세습비판은 공안논리이고 오리엔탈리즘인가?」, 프레시안, 2010-10-11)

손호철은 북에 대한 세습비난이 국가보안법 논리의 내면화 주장이 아니라고 한다. 손호철의 항변은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데 손호철을 비판하는 그 누구도 손호철이 국가보안법을 직접적으로 찬양했다고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호철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이른바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의 ‘세습’비판이 주관적 의지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효과를 가져 오는지, 그 결과 어떻게 지배계급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되는가이다. 조선일보는 우익반동의 어릿광대, 똥강아지를 자처하고 나선 손호철을 격려하며 또 부추기고 있다.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목소리를 낸 진보좌파 지식인은 손호철 서강대 교수였다 …… '북한 3대 세습' 비판은 거기서 그칠 수 없다.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북한을 어떻게 올바른 자리에 갖다 놓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좌파 지식인들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새로운 대북정책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손호철 교수는 북한 민중 스스로가 민주적 역량을 육성하고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보적인 북한민주화운동'을 제창했다....그런 고민의 결과로 북한의 진정한 변화를 지향하는 진보좌파 나름의 대북정책이 만들어질 때 우리 사회에도 '지속가능한 진보좌파'가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이선민 문화부장, 진보좌파의 시험대, '북한 3대 세습', 조선일보 [태평로], 2010.10.14).

이른바 사이비 ‘진보좌파’들은 조선일보의 시험대에 들었다. 조선일보의 시험대를 최종적으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북을 적대시하고 대립하는 반동적인 '대북정책’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사이비 좌파들이 조선일보의 시험대를 최종 통과하고 그리하여 그 자신들이 얼마나 반동 우익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귀결되는지를 증명하기를 고대한다.

저들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이 파렴치하게도 너나없이 북비판에 나서는 것은, 이른바 ‘냉전의 시기’, ‘군사독재의 시기’가 지나고 민주주의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는 모종의 정치적 변화, 진보를 염두에 둔 것인데 과연 그 변화와 진보의 실체는 어떠한가? 저들 사이비 진보주의자들과 다르게 여전히 지금 한국의 진보, 민주 인사들, 사회주의 세력들은 저들이 ‘잔재와 유물’이라고 말하는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고 있고 구속되어 있다. 정권은 인터넷에 북 관련한 자료를 올렸다는 이유로, 북에 대한 신념을 말하고 교류했다는 이유로, 한상렬 목사처럼 한(조선)반도 평화체제를 위해 방북했다는 이유로 고무, 찬양죄, 잠입ㆍ탈출, 회합ㆍ통신 혐의 등 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 반국가 단체의 혐의를 뒤집어 씌어 구속 탄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군사독재와 냉전 시기의 ‘잔재와 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서 우리 사회를 공포로 짓누르고 있다.

이러한 정치상황 하에서 북 세습 논란은 자유로운 논쟁이 아니다. 지배계급과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은 우익신문의 방조와 칭찬 아래 자유롭게 부르주아 사상의 자유를 누리며 활보하고 있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사실상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단지 “말하지 않겠다”가 아니라 말 할 수 없는 정치적 억압의 굴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공당’으로서 말하라고 한다. 저들은 정치적으로 물려 있는 ‘재갈’을 풀기 위한 투쟁은커녕 재갈에 물려 말할 수 없는, 말하지 않으려는 민주노동당을 윽박지르고 있다. 지배적인 부르주아 사상인 반북, 반공 이데올로기를 등지고, 지배계급의 부추김을 받고서 침묵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회주의적이고 반동적인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의 부르주아적 실체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이 북‘세습’비판에서 또 하나 전제되어 있는 것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보편적 가치’의 옹호이다.

우리는 그동안 북한의 현실에 대해 발언하기에 신중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소극적 태도를 견지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랜 투쟁과 참여로 남한의 민주화를 주도하였다고 자부하는 우리는 이제 북한의 일당독재에 더한 '선군 정치'라는 군사독재, 나아가 일족에 의한 왕조 건설을 비판하고, 민주화와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경제개혁을 요구한다. 이는 일관된 민주주의자이고자 하는 우리의 절실한 외침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티아 센은 최근, 북한 핵무기보다 민주주의를 먼저 말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의 충고를 받고 실로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북한 인민에게도 민주주의를 누릴 천부의 권리가 있다.」, 사회민주주의연대 성명서, 2010년 10월 18일).

한 때 개량주의 운동 진영 내에서 유팔무교수는 ‘사민주의자임을 부끄러워하지 말자!’는 식으로 말했다. 베른슈타인주의, 카우츠키주의로 대변되는 개량주의 사상이 현실에서 비과학적이고 반동적인 것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에 사민주의를 노골적으로 주장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저들 사민주의자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준동하고 있다. 저들 파렴치한 사민주의자들은 ‘일심회’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해서 “국가기관이 국가의 주요 범법행위를 위반하는 행위를 조사하는 것이 "공안탄압"이란 말인가?”며 국가기관에 수사협조해야 한다면서 반동적으로 국가보안법과 부르주아 체제를 옹호하였다.

저들의 ‘북한 민주화’와 ‘인권’은 우익세력들의 주장과 정치적으로 하나가 되고 있다. 사회당은 일치감치 ‘종,북주의 반대, 조선노동당 반대’를 내걸고 반공, 반북주의의 선봉역할을 자임해 왔고,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하면서 국가보안법 구속자 제명을 외치면서 ‘종,북주의’ 반대를 분열의 근거로 삼았다. 현재 진보신당 당대표인 조승수는 당시 조선일보 기고를 통해 자신의 반공, 반북주의 이데올로기를 유포하였다. 사실상 진보신당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레디앙은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우익 세력들의 기고문을 버젓이 싣기도 하였다. 진보신당 노회찬은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여 축배를 들기도 하였다. 저들 부르주아 언론은 이러한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을 일관되게 옹호하였고 지금의 북‘세습’논란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동안 진보는 북한 문제를 소홀히 해왔다. 북한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은 보수의 영역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인권과 민주주의, 생존권, 인간해방은 진보의 가치이다.... 자격없는 보수의 인권 수호자 역할은 더 방치하면 안된다. 이는 진보가 경각심을 잃고 나태한 결과이다. 북한의 실패를 지적하고 바로잡는 일에 진보가 나서야 한다. 그것이 본래적 의미로서 진보의 과제이다(「북한 3대 세습과 진보정치의 과제」, 경향사설, 2010-10-14).

저들이 말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보편적 민주주의는 바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부르주아 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이라크 민주화, 인권을 위한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 인민들을 얼마나 학살하고, 고문과 인권유린으로 점철되고 이라크에 전쟁의 파괴와 참화를 가져왔는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제의 침략과 학살행위, 이 학살전쟁에 참여한 미군역시도 스스로 인간성을 파괴하는 만행에 앞장서서 고문과 학살을 놀이로 즐겼다.
손호철은 북인권과 민주화를 외치는 것이 제국주의 관점으로 식민지를 인식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아니라고 한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을 비판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일까요? 일부다처제를 비판하는 것, 비인간적인 노예제도를 비판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이라, 우리를 일부다처제와 노예제를 비판하지 말고 그 사회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 것인가요?”(손호철,  「北 세습비판은 공안논리이고 오리엔탈리즘인가?」, 프레시안, 2010-10-11)

손호철은 북 세습에 대한 비판은 봉건제에 대해 민주주의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로 비판하는 논리와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민주주의와 인권은 조선에 대한 일제 식민지를 옹호하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근대화’론으로도 이용됐다. 일제는 조선의 봉건주의를 비판하면서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제국주의 논리 하에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 노예들이 서로 인육을 먹게 하고, 여성들을 ‘성노예’로 유린하고 제국주의 수탈과 범죄를 보편주의의 이름으로 태연하게 저질렀다. 결국 보편적 민주주의 입장에서 북 민주화와 인권을 부르짖는 손호철의 논리는 어떤 정치적 실천으로 귀결되는가?

그같이 생각하게 된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몇 년 전 뉴스를 보다가 받은 충격이었습니다. 뉴스에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강재섭 의원이 회의를 주재하는 한나라당 회의장이 나오는데 강 대표 뒤에 '인권', '반핵'이라고 크게 써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글씨를 보며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 북한의 인권이 더욱 악화되고 북한이 핵개발을 하면서, 나아가 우리 진보운동이 이에 대해 침묵하거나 이를 옹호하면서, 엉뚱하게도 인권과 반핵이 한나라당과 뉴라이트의 담론으로 변해버렸습니다 …… 제가 북한문제에 대해 진보진영이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이유 뿐만은 아닙니다. 또 다른 이유는 북한의 현실입니다. 만일 북한에서 정말 '최소의 최소의 최소의 최소한의 인권과 민주주의'만이라도 지켜진다면 진보진영의 커밍아웃은 불필요했을지 모릅니다(손호철, 같은 글).

손호철이 충격을 받았다는 한나라당 회의장에서 나온 ‘인권’, ‘반핵’은 무엇인가? 손호철은 진보진영이 북의 인권문제나 핵문제에 대해 기권하면서 ‘인권, 반핵’ 같은 진보진영의 요구가 한나라당과 뉴라이트의 담론으로 변했다고 한다. 진보진영 내에서의 인권과 반핵이 과연 한나라당과 우익들과 같은 역사적 배경과 조건 내에서의 요구였는가? 진보진영의 인권 요구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와 부르주아 체제 하에서의 인권유린과 생존권 말살에 맞서 투쟁하는 진보적 요구였다. 진보진영의 반핵은 수천, 수만 개의 핵을 가지고 있고, 핵우산을 가지고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고, 핵을 빌미로 북에 대한 제국주의 공세를 일삼던 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이 말하는 민주, 인권, 반핵은 무엇인가? 한나라당의 인권은 비정규직 말살, 정리해고 같은 사회적 학살, 정치탄압, 도청, 경찰폭력, 집시법 억압 등 부르주아 독재 체제의 반동성을 은폐하는 기만적 요구이다. 저들은 인권, 북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미제와 더불어 대북 말살 봉쇄정책을 펼치고 한반도에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북인민들은 제국주의 고립과 봉쇄정책 때문에 경제적 고통과 생존권적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저들이 말하는 반핵은 미제로부터의 군사적 공격을 막기 위한 자위권인 북핵의 무장해제를 주장하고 미제가 가진 수천, 수만 개의 핵독점권을 유지, 강화하도록 한다.
손호철은 한나라당과 뉴라이트가 독점한 인권, 반핵 등의 요구에 앞장서서 진보의 이름으로 선점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손호철은 우익들에게 뒤치지 않기 위해서 북민주화, 북핵 반대의 선봉장이 되는 것이다. 우익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나서야 한다. 이것이 손호철이 말하는 보편적 민주주의이고 진보의 과제이다. 이른바 자칭 진보주의자들과 우익들이 보편적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결속하고 있는 것이다.

북‘세습’을 비판하는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에게는 보통선거제에 대한 물신주의가 숨어져 있다. 물론 보통선거제는 노동자 민중들에 의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투쟁의 성과였다. 자본주의 지배계급들은 자신들의 계급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보통선거제를 결사반대하다가 민중들의 투쟁에 밀려서 처음에는 재산에 비례한 선거, 남성만의 선거권으로 양보하다가 20세기 초에 들어서야 현재의 보통선거제를 도입했다. 부르주아는 보통선거제의 도입으로 자신들의 영속적인 계급지배에 위기에 몰리자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성과인 선거제도를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합법적인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형식적으로는 통치자의 얼굴이 합법적으로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바뀐다. 그러나 교체는 부르주아 지배권력의 교체가 아니다. 엥겔스의 말대로 하면 “단지 몇 년에 한번 착취자의 얼굴을 교체”함으로써 자신들의 영속적인 계급독재를 유지, 강화하게 된 것이다. 독점자본에 의한 정치선동, 막대한 재정력을 바탕으로 치르는 선거, 정치광고에서 보듯 부르주아 정치인의 서민 정치인으로의 상징조직, 부르주아 정치인에 대한 매수와 로비, 심지어는 노동자계급을 대변한다는 사민주의에 의한 부르주아 정치체제의 유지 등 수천가지 방식으로 계급지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보통선거를 통해 지배계급의 면면이 바뀐다 해도 실제적인 경제권력과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독점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독점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대중들은 4년에 한번 권력의 주인이 된다. 권력자들은 표를 위해 소상인들을 찾아가고, 노동현장에 찾아간다. 굽실거린다. 투표 날 잠시 권력의 주인들은 자신의 노예주를 선택하고 이들의 지배를 받는다. 대중들은 철저하게 권력에서 소외된다. 참여정부라는 슬로건, 경영참가라는 산업민주주의 거짓 위선적 구호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독점한 독점부르주아 계급의 노예로, 피통치자로, 전락한다. 자본은 경영권 침해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인 해고, 생산수단의 독점을 강화한다. 주식 민주화는 주식의 자유로운 매매를 통해 사회 전체의 유휴 화폐자본을 집중시키고, 독점자본이 주식독점과 기업지배를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대중들은 이러한 부르주아 체제에 대해 매번 배신과 환멸을 느낀다. 그러나 사회주의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인해 선거에 기권하거나 차선이라는 이름으로 어쩔 수 없이 기존 부르주아 정치인들을 다시 선택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독점자본가 영속적 지배는 소수 독점자본가 계급의 다수에 대한 억압과 지배, 착취, 수탈의 강화를 의미한다. 권력자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폭력적 경찰, 군대, 정보기구, 법률기구 등은 그대로 존속되어 인민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삼성의 3대 세습에서 보듯 부르주아 경제권력의 3대 세습은 각종 불법과 편법, 사기와 비리, 상속제를 통해 부와 권력을 재생산하는 것이고 이것이 노동자계급한테 의미하는 바는 무노조, 백혈병, 비정규직 약탈, 집단 정리해고 등 노예화에 다름 아니다.


사이비 진보의 부르주아와의 반북, 반공 신성동맹

부르주아 체제가 지배자들의 형식적인 교체에도 불구하고 독점자본가 계급의 영속적인 계급지배를 유지, 강화한다면 북에서의 권력승계의 계급적 의미는 무엇인가?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은 ‘세습’이라는 권력변화의 형식만 주목하지 그것의 계급적 내용은 무엇이고, 무엇이 그것을 강제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북의 권력변화는 사회주의 체제의 전형적인 권력승계의 문제는 아니다. 독특하고 특수한 권력승계이다. 그런데 이것은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북사회주의 건설은 내전을 거치면서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체 사회가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원시상태에서 다시 출발해야 했다. 미제국주의는 전쟁 이후에도 반공산주의 한미동맹이라는 이름으로 60여 년 동안 북에 대한 포위, 봉쇄정책을 지속하였다. 후르시초프 시절에 들어서는 중쏘분쟁이라는 사회주의 국가 내부의 분열로 인해 사회주의 내에서도 자주성을 강조해야 했다. 이러한 외부적 난관 속에서의 북사회주의 발전은 남에서 반공주의 독재체제와 수탈체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북의 진보적인 조치에 영향을 받은 유상몰수와 유상분배를 통한 봉건적 수탈체제의 폐기, 남 내에서의 민중적 투쟁과 북의 무상복지의 영향으로 박정희정권 당시 의료보험 체제를 갖추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북사회주의의 선군정치와 권력변화는 사회주의 일반원리가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취해진 일종의 ‘전시 공산주의’체제의 특수성 속에서 만들어졌다. 제국주의 공세 속에서 북의 핵무기 개발은 인민들의 복지로 가야할 상당부분의 재원을 군대와 군사비 강화로 들어가게 하는 손비로 만들고 있다.

1920년대 초 쏘련 볼셰비키가 행한 ‘전시 공산주의 정책’이야말로 사회주의 일반의 원칙이 아니라 ‘기형적인 사회주의 정책’이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내전의 폐허와 제국주의의 군사적 공세로부터 쏘련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 취해진 비상 시기의 ‘기형적’인 사회주의 조치다. 이 기형적인 사회주의 정책은 일시적이고 특수한 조건에서 취해졌지만 내전의 폐허와 제국주의 봉쇄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켜내도록 했다. 북의 ‘기형성’은 쏘련의 일시적인 고립과 내전, 제국주의 봉쇄의 일시적 특수한 조건보다도 더 극심한 외부적 조건 하에서 사회주의 건설 시기 내내 그러한 정책을 강요했다. 쏘련 당시의 전시 공산주의의 불리한 조건도 쏘련의 광대한 영토, 자원, 일시적 공세라는 조건 때문에 북이 받았던 60여 년의 특수한 조건보다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북사회주의는 중국의 자본주의화와 1990년 이후 쏘련 붕괴와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일화 이후에는 더욱 더 끔찍한 고립무원의 상태로 내몰렸다.

변증법은 구체적인 진리를 말한다. 이러한 특수하고 첨예한 조건 내에서 건설하는 사회주의 건설의 극단적 조건에서 일반적인 원칙을 들이대는 것은 구체의 변증법이 아니다. 사회주의의 일반적 원칙을 들이대며 북사회주의의 기형성을 말하기 전에 무엇이 그렇게 강제했던가를 봐야 한다. 다함께는 북‘세습’을 빌미로 비과학적이고 반동적인 국가자본주의론을 합리화하고 있다.

전면적으로 국유화된 경제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관과 아무 관계 없다 …… 북한 노동계급의 일부는 굶주림과 궁핍을 겪고 있다. 반면 북한 국가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위협을 이유로 핵무기와 군비를, 또 이를 위해 중공업 생산수단을 축적하고 있다 …… 자본주의에는 시장경제와 사유재산, 상품이 지배하는 유형만 있는 게 아니다. 만일 삼성이나 현대, LG, 포스코 등 남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기업이 거의 다 한국전력이나 토지주택공사 같은 공기업이 되고, 심지어 편의점들도 국유화되고, 우리는 여전히 회사 경영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다(「지도자 대물림하는 북한은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10월 12일 다함께 성명서).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노동자정치신문]에서 철학적, 경제적, 역사적 측면 등으로 다양하게 비판했고, ‘쏘련 사회주의의 붕괴의 원인! 계획과 시장의 문제를 중심으로’라는 팸플릿에서 다뤘으므로 여기서 전면비판을 다시 할 수는 없다. 다만 다함께가 말하는 핵무기와 군비, 중공업 생산수단 축적이나 자본주의 국유화와 비교하면서 국가자본주의론을 주장하는 것만 비판해보겠다.

맑스는 생산수단 생산부분에 대한 축적은 소비재 생산부문의 축적에 있어서도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는 사회주의에서도 필연적이다. 생산수단 생산부문의 축적이 없이는 인민복지로 가는 소비수단 생산도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독일제국주의 침략 위협 앞에서 쏘련 사회주의에서 중공업에 대한 축적이 상대적으로 강조됐던 것처럼, 미제국주의 공세는 군사비에 대한 비생산적인 투자로 내몰 수밖에 없다. 다함께도 이것이 미제국주의의 위협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 공세에 무력하게 당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가? 다함께는 물론 국제적 반제투쟁을 통한 평화를 운운하지만 국제적인 민중적 역할과 일국을 방어하기 위한 무장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다함께의 주장은 제국주의 공세 앞에서 군사무장을 포기하고 침략에 비폭력적 방식으로 저항하자는 무장해제 주장에 다름 아니다.

다함께는 사회주의 국유화와 자본주의 국유화를 비교하는데 이는 자본주의 국유화의 본질에 무지한 주장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에서는 독점자본 형성 이전에 국가가 직접 자본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기.철도.도로 등에서 보듯 독점자본에게 유리한 축적구조를 만들기 위해, 파시즘 전시경제 체제 하에서, 공황 시기 독점자본의 파산을 구제하기 위하여, 공적자금으로 국유화한 기업을 노동자에 대한 착취강화로 되살린 뒤 독점자본에 재매각 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유화가 진행되었다.

사회주의 국유화는 사적 생산수단의 집단적 생산수단으로의 교체이다. 국유화는 사회주의 하에서 대표적인 사회화의 한 표현이다. 다함께는 사회주의에서의 관료가 자본가라고 하는데 잉여가치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가와 관료를 비교하는 것이야말로 비과학적이다. 다함께는 북에 대한 ‘인상주의적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인상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논리를 구사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다함께의 논리는 비과학적일뿐더러 제국주의와 부르주아의 논리로 귀결된다. 한국내전에서의 중립입장, 쏘련 붕괴에 대한 환영, 북핵에 대한 양비론적 태도, 북‘세습’ 비난 등 다함께의 논리는 맑스주의로 위장한 반동적 논리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함께와 마찬가지로 북을 반동체제로 보고 타도해야 한다는 사노련, 사노위의 주장도 반동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부르주아 신문의 기사가 대부분 정확한 근거 없이 일방적인 보도를 일삼거나 국정원이 가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북관련 기사를 쏟아내는데, 한때 북에서 마취제 없이 다리 절단 수술을 한다는 기사가 게재됐다. 신뢰할 수 없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충격적인 보도가 아닐 수 없다. 팔레스타인에서도 마취제 없이 수술을 하는 경우가 자주 보도되곤 한다. 그렇다면 진보인사가 여기에 대해 취할 태도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수십 년 동안의 봉쇄정책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아사자가 늘어가고 있고, 마취제 없는 수술이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팔레스타인에 대해 인권유린 체제라고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대한 봉쇄정책을 취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야만성을 비난할 것인가? 북에 대한 인권과 민주화 운운 논리는 팔레스타인의 인권유린을 비난하는 논리와 한치라도 다른 게 있는가?

진보적 지식인이라면 주관적 의도, 의지와 상관없이 제국주의의 어릿광대짓으로 귀결되는 부르주아적 보편성으로 민주주의, 인권문제 등 북의 ‘기형성’에 대한 비난을 하기 전에, 이러한 특수한 전시체제의 조건을 강요하는 제국주의와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에 집중해야 한다.

북의 권력승계는 외부에서 강요된 사회주의 집단지도 체제라는 시스템의 위기의 한 표현이자 위기의 돌파구이기도 하다. 이는 체제 위기의 한 표현이면서도 권력변화를 통해 내부적 결속력이 유지된다면 외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안정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북사회를 평가할 때 우리 내부의 내면에서 떨쳐버리지 못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잔재와 싸워야 하고, 대북 정보가 통제되고 왜곡돼 있는 상태에서 승계된 권력이 얼마나 북인민들의 지지를 받는지, 결속력이 강한지, 지도력을 발휘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가운데 왜곡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북의 권력변화가 지금 현재 북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결속력과 지도력을 발휘할지 모른다. 다만 정확한 것은, 앞으로 승계된 지도부와 북인민의 결속과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제국주의의 공세라는 점이다. 제국주의 공세가 계속되는 한 북의 경제적 난관은 지속될 것이고, 인민들의 복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들은, 낯부끄러운 사이비진보주의자들처럼 제국주의의 우익들의 어릿광대짓을 할 것이 아니라 북사회주의에 대한 봉쇄정책 철회, 대북전쟁 책동 거부, 자결권을 위해 제국주의와 부르주아와 투쟁해야 한다.

사이비진보주의자들의 기회주의, 반동적 어릿광대 노름은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라고 선언하지만 객관적으로는 필히 이렇게 귀결된다.

북한의 3대 세습은 민주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와도 아무런 인연이 없다. 북한의 가족통치는 사회주의 이념을 배반하고, 사회주의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 누가 21세기 한반도 북쪽에 왕조의 탄생을 바랐을 것인가. 북한 스스로도 이번 당대표자회의 당 규약 개정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김정일·선군사상으로 바꾸었다(경향사설, 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 2010-09-30).

북의 권력변화가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사회주의와도 아무런 인연이 없다고 비판하는 경향신문은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사회주의 이념과 맑스-레닌주의를 옹호해 온 적이 있었던가? 경향은 북이 당대표자회의 규약변경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렸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고, 맑스-레닌주의의 가치를 강조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동안 부르주아와 그 대변자들은 북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쿠바와 쏘련에 대해서도 일당독재라고 비판해 왔다. 저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중앙위원회의 독재로, 결국은 개인에 의한 대중독재로 귀결됐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저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인독재로의 변질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진보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이 계급독재는 반드시 계급에 대한 독재로 귀결된다는 것을 집요하게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경향이 북에 대해 ‘사회주의 이념의 배반’, ‘사회주의적 가치를 훼손’, ‘마르크스-레닌주의’ 운운할 때의 논리구조와 같은 것이다.

저들은 심지어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일당독재와 개인독재를 낳았는데 그것은 레닌의 전위정당 노선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비난해왔다. 심지어는 볼셰비키의 독재 체제 운운하며 쏘련에 대한 악선동을 퍼부었던 ‘배신자’ 카우츠키로부터 쏘련 몰락 이후에 사이비 '좌익, 진보진영’들은 ‘일괴암주의’, 당독재, 개인독재 운운하며 이러한 비난에 동참해 왔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레닌의 전위정당의 필연적인 귀결이고, 레닌의 전위정당 사상은 맑스, 엥겔스 사상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것, 따라서 사회주의 체제의 문제는 맑스-레닌주의의 필연적인 도달이자 귀결점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이와는 달리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사회주의적 가치는 여전히 필요하다는 주장은 마치 맑스-레닌주의의 사상적 가치만은 옹호하는 듯싶지만 이 역시도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기는 마찬가지다. 맑스주의 사상이 무기의 비판에서 비판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혁명적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통해 물질적 힘으로 전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맑스주의는 물질적 힘으로 전화되는데 실패했다는, 사상 속에 필연적으로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교묘하게 맑스-레닌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의 북‘세습’ 비판은 부르주아에 의해 이렇게 수렴된다. 사회주의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고 맑스-레닌주의 사상은 이러한 실패에 원인을 제공했다. 인류의 역사적 진보를 위한 노력은 더 이상 가망 없는 반동으로 귀결된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가 더 이상 진보나 인류의 대안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났다.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진보적인 체제이고 인류 최후의 진보적 생산양식이다. 노동자계급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나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도전이고, 역사를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에 순응해야 한다.
결국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제국주의자들과의 반북, 반공 신성동맹을 체결하고 있는 셈이다. ‘세습’논란의 정치적 의도와 필연적 귀결을 압축적으로 정리해보자!

- 부르주아 사상을 침투시킨다.
- 북에 대한 제국주의와 부르주아의 체제붕괴 전략이다.
-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불신을 강화시킨다.
- 자본주의 모순을 은폐하고, 자본주의 우월성을 심어줌으로써 부르주아 체제를 강화한다.
- 노동자 민중 투쟁에 대해 불온한 낙인을 찍고, 이에 대한 탄압이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혁명적 정치세력화를 가로막는다.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이여! 당신들에게 사상적 변화까지는 요구하지 않겠다. 최소한의 염치와 도리가 있다면 반동적 작태를 즉각 중단하라!